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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꽃은 피더라고요"…정은채, 개화의 시간 (아너)

[Dispatch=이아진기자] "촬영할 땐 제 삶이 없어요."

배우 정은채는 작품 속에 사는 사람이다. 촬영이 없는 날에도 캐릭터를 곱씹는다. 그래서일까, 데뷔 15년 차에도 계속해서 인생 캐릭터를 경신하고 있다.

최근 3년간 보여준 연기만 해도 호평 일색이었다. '안나'(2022)의 철부지 부자 이현주, '유어 아너'(2024)의 열혈 형사 강소영, '정년이'(2024)의 보이쉬한 연극 배우 문옥경 등.

그런 그가 ENA 드라마 '아너 : 그녀들의 법정'(이하 '아너')에서 변호사 강신재 역할로 또 한 번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부와 미모 지성까지 완벽한 변호사지만, 인간적인 결을 놓치지 않았다.

정은채는 "촬영이 없는 날에도 계속 캐릭터에 가까워지는 시간을 보내곤 했다"며 "내가 맡은 캐릭터에 얼마나 가까워지느냐에 따라 캐릭터가 사랑받는 정도가 달라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디스패치'가 최근 서울 강남구 한 카페에서 정은채를 만났다. 강신재를 완성하기까지 밤을 지새우며 했던 고민부터 연기 비결, 차기작에 대한 스포일러까지 들었다.

◆ 동경의 대상, 강신재

'아너'는 3명의 여성 변호사가 성매매 어플 커넥트를 파헤치는 이야기를 그렸다. 정은채는 "재미만으로 접근해서는 안 될 주제를 가진 작품이었다. 그래서 평소보다 대본 선택에 오랜 시간이 걸렸다"고 밝혔다.

하지만 대본을 읽을수록 끌림은 커져만 갔다. 정은채는 "강신재의 멋진 리더십과 뚝심을 배우고 싶었다. 이렇게 동경할 수 있는 캐릭터를 연기한다는 것 자체가 행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애정이 큰 만큼 연기에 대한 고민도 깊어졌다. 정은채는 "며칠 동안 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였다. 강신재를 단순히 강인한 여성의 틀에만 가두지 않고, 인간적이고 입체적인 캐릭터로 빚어내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그가 찾은 해답은 캐릭터의 서사에 장을 나누는 것이었다. 정은채는 극초반, 여성 피해자 전문 엘엔제이 로펌 대표의 단단한 면모를 강조했다. 이후 사건을 겪을수록 흔들리는 모습을 드러내며 감정의 균열을 표현했다.

"사실 저는 그리 강단이 있는 사람은 아니에요. 그래서 극초반에 강신재가 신념을 담은 멋진 대사들을 뱉을 때면 늘 잘할 수 있을까 떨렸어요. '이 대사를 하는 내가 얼마나 멋있을까?' 하는 기대감보다는 걱정이 앞서더라고요."

가장 기억에 남는 대사로는 강신재가 자신을 협박하는 권중현(이해영 분)에게 한 말. '바람이 불거든 흔들려 볼게요. 그래도 꽃은 피더라고요'를 꼽았다. "강신재라는 여성의 강인함을 가장 잘 나타낸 문장"이라고 했다.

◆ 고민의 연속

강신재는 커넥트를 쫓다가 엄마보다 의지했던 권중현이 이용자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정은채는 이를 기점으로 감정선에 변주를 줬다. 강한 배신감과 절망감을 표현하는 데 더 집중했다.

상황은 더 최악으로 치닫는다. 엄마 성태임(김미숙 분)부터 연인 백태주(연우진 분)까지 사방이 커넥트와 연관된 것으로 드러난다. 정은채는 같은 배신감도 대상에 따라 다른 결로 풀어내고자 했다.

"강신재와 얽히는 인물들이 많다 보니까 표현해야 할 감정들이 많았어요. 그래도 저는 계속 고민할 거리를 던져주는 캐릭터를 연기하는 게 재밌어요. 강신재도 어려웠던 만큼, 연기하기 매력적인 지점들이 많았던 것 같아요."

성태임과의 서사는 공감을 바탕으로 완성했다. "강신재는 엄마를 원망하지만, 한편으로는 자신도 엄마와 닮았다는 걸 인정하게 된다"며 "저 역시 딸이기에 느낄 수 있는 미묘한 모녀 관계를 표현하려고 했다"고 짚었다.

백태주와의 관계성은 한층 복잡했다. 두 사람은 뜨거운 연인에서 성범죄 어플 '커넥트'를 파헤치는 공조 관계로 변한다. 이후 백태주가 피해자를 미끼로 쓴 '커넥트'의 운영자임이 드러나고 강신재가 직접 추적하기에 이른다.

믿었던 연인이 성범죄자와 다를 바 없다는 진실을 마주한 순간. 엄청난 충격 속에서도 단죄의 열의를 폭발시켜야 했다. 정은채는 "집에서 머리를 쥐어뜯으며 어떻게 표현할지 고민했다"고 털어놨다.

"강신재라면 내 사람들을 지키고자 하는 마음이 클 거로 생각했어요. 지옥 끝까지 가더라도 그간 대변해 왔던 성범죄 피해자들, 친구들, 정의를 끝까지 사수하겠다는 각오인 거죠. 그래서 불구덩이 속에라도 뛰어들 것 같은 처절한 의지를 표현하려고 노력했어요."

◆ 그녀들의 촬영장

강신재라는 캐릭터를 빚어내는 과정은 치열했다. 그럼에도 정은채가 지치지 않고 촬영을 이어갈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이나영(윤라영 역)과 이청아(황형진 역) 덕분이었다.

이들은 극 중 어두운 비밀까지 공유하는 20년 지기 변호사로 등장한다. 같은 사건에 휘말리며 위기에 빠지지만, 그만큼 서로에게 의지하고 연대한다. 카메라 밖에서도 서로에게 든든한 버팀목이 됐다.

세 배우 모두 성격은 털털하지만 낯을 가려 친해지는 데 시간이 필요했다. 다소 조용했던 촬영장의 적막을 깬 것은 정은채였다. 그가 먼저 살갑게 다가가자 현장 분위기도 빠르게 달라졌다.

"제가 막내라 용기 내서 언니들에게 먼저 안부 인사를 건네고 일상을 공유했어요. 이렇게 적극적으로 상대 배우에게 다가간 적은 처음이었어요. 다행히 언니들이 귀여워해 주셔서 마음껏 애교를 부렸죠."

현장에는 늘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정은채는 "촬영 초반부에 강신재가 멋있는 대사로 엔딩을 장식할 때가 많았어요. 그럴 때마다 언니들이 '은채 또 멋있는 척한다'며 놀리곤 했다"고 회상했다.

"저희 모두 오글거리는 표현을 잘 못하는 성격이에요. 기자님들 앞에서는 애정을 표현하기 바빠 보여도, 막상 셋이 만나면 낯간지러운 이야기는 절대 못 해요. 그냥 실없는 농담만 나누며 웃죠. 그런 공통점 때문에 더 뜨거운 정이 생긴 것 같아요."

◆ 다음 변신을 향해

'아너'는 열린 결말로 막을 내린다. 변호사 3인방은 백태주의 정체를 폭로하는 데 성공하고, 백태주가 죽었다는 소식도 전해진다. 그러나 마지막에는 또 다른 '커넥트인' 피해자가 등장한다. 백태주가 여전히 살아 있는 듯한 상황도 암시된다.

권선징악형 드라마치고는 속 시원한 결말이 아니다. 정은채는 "'아너'는 선과 악이 어디에나 존재한다는 걸 보여주는 드라마라고 생각한다"며 "그런 흐름 속에서 작품과 잘 어울리는 엔딩이었다고 본다"고 했다.

"'아너'는 무모한 위로나 응원을 던지진 않아요. 대신 주인공들이 서로의 손을 잡고 나란히 묵묵히 걸어가는 이야기를 그리죠. 실패하고 무너져도 삶은 계속된다는 것, 그 점에서 희망과 위로가 전해졌으면 해요."

정은채가 매번 색깔이 전혀 다른 캐릭터들을 완벽하게 소화할 수 있는 비결은 뭘까. 그는 "작품에 해가 되지 않아야 한다는 책임감이 가장 큰 원동력인 것 같다"고 답했다.

이어 "해가 갈수록 연기는 혼자가 아니라 함께 만드는 일이라는 걸 더 느낀다. 그래서 요즘은 이전보다 상대 배우들에게 더 다가가며, 호흡을 섬세하게 맞추려고 노력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그의 변신은 '재벌X형사 2'에서도 계속된다. 강력계 형사 '주혜라'로 분해 강신재와는 결이 전혀 다른 캐릭터를 선보일 예정이다. "이번에는 형사 크루의 우두머리가 된다. 덩치 좋은 남자 배우들을 휘어잡으며 연기하는 중"이라고 귀띔했다. 

"'아너'로 좋은 호응을 받아 올 한해를 기분 좋게 시작했어요. 시청자들에게 받은 사랑을 동력 삼아, 차기작에도 열정을 쏟고 있습니다. 하반기에 보여드릴 배우 정은채의 새로운 모습도 많이 기대해주세요!"

<사진제공=프로젝트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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