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spatch=김수지기자·김혜원 인턴기자] "글자로 드라마를 읽는다?"
우선, 드라마 제목이 '비밀'이라는 것만 안다. 이 드라마의 특징을 파악할 수 있을까. 혹자는 비밀스러운 사건을 떠올릴 것이고, 또 다른 혹자는 비밀스러운 사랑을 생각할 수도 있다. 사건이라면 스릴러, 사랑이라면 멜로가 아닐까….
드라마의 특징은 대본과 연출을 통해 알 수 있다. 배우들의 대사, 감독의 연출 안에 스토리가 있다. 만약 보지 않고도 내용을 짐작할 수 있다면? 그리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캘리그라피, 드라마 타이틀 안에 힌트가 숨어 있기 때문이다.
캘리그라피. 그리스어로 'KALLOS'는 아름다움, 'GRAPHY'는 서법을 뜻한다. 사전적 의미로 손으로 그린 그림문자다. 캘리그라피가 가장 왕성하게 쓰이는 곳은 드라마다. 올해만 해도 총 40개의 드라마가 손글씨 제목를 택했다.
2013년, 안방극장에서 마주친 캘리그라피는 어떻게 탄생됐을까. 작업과정을 들었고, 트렌드를 물었다.
◆ "타이틀 안에 힌트 있다"
과거 드라마 캘리그라피는 메인 타이틀에 불과했다. 그저 예쁘게 표현하려 애썼다. 제목만 봐서는 내용을 짐작하기도 어려웠다. 반면 요즘 캘리그라피는 드라마의 특징을 담고 있다. 단순 손글씨를 넘어 드라마의 열쇠까지 디테일하게 담았다.
'메디컬 탑팀'을 만든 이상현 캘리그라퍼는 "90년대까지만 해도 획일화된 글씨체가 많았다"면서 "다양한 문화가 공존하면서 손글씨 타이틀이 주목받기 시작했다. 현재는 선으로 감정을 대변해주는 아날로그적 캘리그라피가 각광을 받고 있다"고 소개했다.
요즘은 캐릭터를 표현하는 도구로 진화했다. KBS-2TV '비밀'은 'ㅣ'과 'ㄹ' 끝을 가늘게 뺐고 원형으로 마무리했다. 주인공의 처절한 삶과 눈물을 보여주기 위한 장치다. MBC-TV '투윅스'는 'ㅌ', 'ㅜ', 'ㅡ'를 투박하게 그렸다. 도망자 느낌을 강조하기위해 거칠게 마무리 했다.
드라마 장르를 말하기도 한다. KBS-2TV '굿닥터'의 경우 손글씨로 드라마 감성을 살렸다. '굿'의 'ㅅ'에 파랑새, '닥'의 'ㄱ'은 미소, 'ㅏ'는 헌혈 심볼 등을 변형해 작성했다. 휴머니즘 드라마라는 점을 녹여내기 위한 선택이었다.
이미지 삽입으로 키워드를 담을 때도 있다. 먹방 드라마 tvN '식샤를 합시다'는 타이틀에 밥그릇과 숟가락 이미지를 넣었다. KBS-1TV '사랑은 노래를 타고'에서는 '사'의 'ㅅ'을 뮤지컬 배우 캐릭터, '은'의 'ㅇ'에는 하트 모양을 넣었다.
◆ "손글씨, 어떻게 표현할까?"
손글씨를 쓰는 재료도 진화중이다. 드라마의 특징을 담을 수 있다면 소재에 제한은 없다. 붓, 나뭇가지, 이쑤시개, 스펀지 등 갖가지 도구를 이용한다. 재료에 따라 드라마의 특징을 달리 표현할 수 있다는 것.
아직은 서예 붓을 가장 즐겨 사용한다. 먹과 물의 양, 손의 힘에 따라 다양한 느낌을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일례로 '비밀'은 물의 양을 높여 눈물이 고인 듯한 효과를 줬다. 반대로 '빠스켓볼'은 물기가 거의 없는 상태에서 붓을 문질렀다.
스펀지, 면봉, 나뭇가지, 대나무, 칫솔 등은 요즘 등장한 재료 중의 하나다. '메디컬 탑팀'의 경우 나뭇가지를 뾰족하게 깎아 나무칼로 만들어 글씨를 썼다. 거칠면서 차가운 느낌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손글씨를 담는 종이도 천차만별이다. 현대극은 주로 A4 용지를 사용한다. 번짐없이 깨끗하게 표현하는 것이 중요해서다. 반면 사극과 시대극은 화선지를 애용한다. 먹의 농도를 표현하거나 번짐 효과를 주는데 탁월하기 때문이다.
◆ "캘리그라피, 완성의 6단계"
하나의 캘리그라피를 완성하기까지 거치는 과정은 총 6단계다. '기획안 검토→대본 분석→시안제작→제작진과 절충→수정→결정' 등의 순서다. 최종 타이틀을 만들기까지 수 백번 써보고 바꾸기를 반복한다.
기획안 검토에서는 제작진과의 소통이 중요하다. 제작진이 캘리그라퍼에게 원하는 타이틀 방향을 제시하는 단계다. 실제로 '메디컬 탑팀' 측은 프로패셔널한 느낌을, '굿닥터' 제작진은 휴머니즘을, '비밀'에서는 슬픈 사랑 분위기를 요구했다.
제작진의 요구 사항은 대본을 읽으며 파악한다. 대본 1~2회 분량을 미리 받아 읽는 편이다. '투윅스'를 만든 이지희 캘리그라퍼는 "전체적인 내용을 파악한 뒤 캐릭터를 분석한다"며 "드라마 포스터, 티저 영상, 연관 이미지 등을 참고해 글씨체 틀을 잡는다"고 설명했다.
대본만으로는 시안을 잡기 어려울 때도 있다. 주로 시대극이 이에 해당한다. 글씨에서도 시대를 반영해야하기 때문. tvN '빠스켓볼'의 전은선 캘리그라퍼는 "1940년대 시대적 배경을 내기 위해 당시 글씨체를 연구했다"며 "약 5개월에 걸쳐 캘리그라피를 완성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 "제목으로 드라마를 읽는다"
캘리그라피, 드라마 이름을 알리는 도구를 넘어섯다. 장르, 캐릭터, 스토리 등의 정보를 알리는 간접 도우미인 셈이다. 드라마 이해도를 높이는데 기여하기도 한다. 드라마의 시작과 끝에서 긴장감을 유지시키는 역할도 한다.
'식샤를 합시다' 김문목 PD와 '비밀' 전혜린 PD는 "캘리그라피는 시청자들의 공감을 이끌어 낼 수 있는 중요한 수단"이라며 "그래픽 디자인보다 사람의 손글씨가 드라마 의미를 제대로 전달시켜주는 것 같다"고 효과를 알렸다.
캘리그라피의 열풍은 앞으로도 계속될 전망이다. 표현의 한계가 없어 맞춤형 제작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캘리그라피에 대한 관심은 뜨거워지고 있다. 또한 캘리그라피를 배우려는 일반인들이 증가하고 있는 추세다.
이지희 캘리그라퍼는 "최근 캘리그라피가 주목을 받으면서 공식협회도 생기고, 비공식 사단 협회도 생겨났다"며 "자신의 고유 서체가 생긴다는 매력 때문에 관심을 갖고 배우려고 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