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spatch=김미겸기자·김효은 인턴기자] 인천에 사는 30대 직장인 윤이나 씨. 매주 금요일이면 '불금' 대신 tvN '응답하라 1994'(이하 '응사')를 외치는 열혈 시청자다. 그녀가 '응사'에 빠진 이유는 쓰레기도, 칠봉이도 아니다. 1994년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디테일에 빠졌다.
"소품 보는 재미가 쏠쏠해요. 어떻게 그 시대에 맞는 소품을 깨알같이 구해내는지 정말 신기할 따름이죠. 캔뚜껑부터 신문, 과자까지. 세세한 것까지 신경을 쓴 것 같아서 방송을 볼때마다 놀란다니까요."
윤이나 씨를 흠뻑 취하게 한 사람은 서명혜 미술감독이다. 올해 17년차 베테랑으로 영화 '접속', '미술관 옆 동물원', '찜', '여자, 정혜', '사랑니', '비스티 보이즈' 등에 참여했다. 지난 해 tvN '이웃집 꽃미남'의 미술감독을 담당한 인연으로 '응사'까지 맡게 됐다.
'디스패치'가 최근 서 감독의 작업실을 직접 방문했다. 상암 CJ 센터 인근에 위치한 한 오피스텔. 가정집 같지만 알고보면 보물창고같은 곳이다. 서 감독을 포함한 6명의 팀원이 '응사'에 나오는 소품들을 직접 제작하고 있는 공간이다.
서명혜 감독은 '응사' 소품을 어떻게 완성했을까? 서 감독이 말하는 미술팀 10계명을 들어봤다.
① 모든 것에 신경써라
'응답하라 1997'에서 '응사'로 오는 과정에서 달라진 점은, 소품팀이 미술팀으로 확대됐다는 것이다. '응칠' 때는 소품만 책임지면 됐지만 '응사'에서는 소품은 기본 인테리어와 리모델링까지 관리한다.
서명혜 미술감독은 "미술팀은 드라마에 등장하는 모든 공간을 관리한다고 보면 된다"며 "예를 들어 신촌하숙 거실에는 어떤 벽지를 바르고, 쓰레기 방에는 의료서적 대신 만화책을 놓는 것 등 모든 것을 체크해야 한다"고 밝혔다.
② 인터넷 서핑을 생활화하라
'응사'의 인기요인 중 하나의 소품의 디테일이다. 시계를 1994년으로 돌려 놓은 것처럼 그때 그 당시 물건들을 그대로 가져왔다. 해당 소품들에 대한 정보는 주로 인터넷에서 찾는 편이다. 블로거들의 포스팅을 찾아 다니며 보물을 만날 때도 있다.
서 미술감독은 "책이나 신문보다 인터넷이 시간 단축이 돼 좋다"면서 "자료에 대한 정보를 찾지 못했을 때는 기억을 더듬기도 한다. 신원호 PD와 동갑이라 서로 대화를 하면 어느새 퍼즐 조각이 맞춰지곤 한다"고 전했다.
③ 팬들을 섭외해라
연예인에 대한 자료가 필요할 때는 믿고 부탁하는 창구가 있다. 바로 해당 연예인의 팬들이다. '응사'에서 나정은 농구선수 이상민의 광팬이고, 윤진이는 '서태지와 아이들'의 열혈팬이다. 두 사람 방을 채우고 있는 브로마이드와 테이프는 팬들이 보내준 물건이다.
"서태지와 아이들 테이프, 브로마이드 등은 제작진이 초기에 미리 구해 놓았어요. 팬들이 가지고 있는 것을 받은거죠 . 이상민 영상집은 제가 직접 팬에게 건내받았어요. 당시 신문 스크랩까지 꼼꼼하게 해놔서 매우 유용한 자료로 쓰이고 있어요."
④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마라
'응사' 미술팀에서 절대 필요한 것은 집념(?)이다. 서 감독의 말에 따르면, 90년대 소품을 구하기는 하늘에서 별 따기다. 가정집에서 해당 물건을 쓰기에는 너무 낡았고, 또 골동품 가게에서 취급하기에는 너무 이르기 때문이란다.
그렇다고 포기란 있을 수 없다. 찾을 때까지 무한 검색이다. 대표적인 예가 리모컨 선풍기. 서명혜 미술감독은 "선풍기를 찾으면 리모컨이 없거나 고장난 경우가 허다했다"며 "일반 선풍기로 대체하려는 순간 한 블로거가 올린 사진을 발견했다. 그때의 쾌감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⑤ 구하지 못하면 만들어라
발품을 팔고 폭풍 검색을 해도 끝내 원하는 소품을 찾지 못할 경우, 남은 방법은 딱 하나다. 직접 만드는 수 밖에 없다. 실제로 '응사'에는 미술팀이 수작업으로 만든 소품이 50% 정도다. 음료수병, 과자봉지, 담배, 약상자 등이 이에 해당한다.
"주로 음료 종류와 과자류를 많이 만들어요. 철저한 자료 조사를 통해 당시 디자인을 확인하고 그래픽 작업을 거쳐 새로운 디자인을 만들어내죠. 이후 출력하고 테이핑까지 100% 수작업으로 이뤄지고 있어요."
⑥ 이가 없으면 잇몸을 사용하라
구하지도, 만들지도 못하는 최악의 상황도 생기기 마련이다. 그때는 최대한 비슷한 느낌으로 대체한다. 주로 빌딩 건물이 이에 해당한다. 드라마 특성상 야외 촬영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현대적인 느낌을 지우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1회에 등장한 신촌 그레이스 백화점의 경우 컴퓨터 그래픽(CG)로 재탄생됐다. "큰 건물이나 간판 같은 경우는 제작하는 데 무리가 있다"며 "특히 백화점 같은 경우 CG처리로 작업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내에서는 최대한 재현해내려고 노력하는 편이다"고 설명했다.
⑦ 포스터는 최고의 타임머신이다
'응사' 미술팀에서 마법의 소품을 꼽는다면 단연 포스터다. 포스터 하나면 현재에서 과거로 손쉽게 갈 수 있기 때문이다. 요즘 시점인 번지수를 가리기도 하고 빈티지한 느낌도 줄 수 있으니 1석 2조다.
"포스터는 100% 제작이에요. 과거 신문이나 광고 등을 보면서 만들어내죠. 포스터가 특히 많은 도움이 돼요. 거리만 해도 최근 번지수나 새길주소 표지가 많이 붙어있는데 그걸 가리기 위해 주로 사용해요. 저희에겐 꼭 필요한 것 중 하나죠"
⑧ 모르면 공부하라
미술팀은 단순히 손재주가 좋다고 되는 것은 아니었다. 손재주는 기본 눈썰미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끊임없이 배우는 자세도 필요하다. 그런 면에서 서명혜 감독은 손에 꼽히는 실력자 중 한 명이다. 끊임없는 분석과 노력으로 디테일을 책임지고 있다.
"처음 빼빼로 과자 봉투를 만들 때였어요. 분명 디자인대로 만들었는데 뭔가 어색한거에요. 알고보니 폰트 때문이었어요. 20년 전만해도 지금처럼 폰트가 다양하지 않았거든요. 한데 지금 컴퓨터엔 그때 폰트가 없지 뭐에요. 결국 캘리그라피를 배워서 직접 그려냈죠."
⑨ 보이지 않는 곳도 신경써라
시청자들은 미처 발견하지 못하는 순간까지 책임지는게 미술팀이다. 비록 TV에는 0.1초정도 스쳐지다가더라도 하루 종일 공들일 때가 있다. 가장 대표적인 장면이 7화에서 삼천포가 신문을 구입하는 고속버스터미널 가판대였다.
서명혜 미술감독은 "손에 들고있는 것 뿐만 아니라 눈에 보이는 모든 소품들 모두를 공들여서 만들었다"며 "가판대에 있는 잡지부터 신문까지 하나하나 정말 애써서 제작했다. 한데 방송에서는 잘 티가 안나 조금은 안타깝더라"고 귀띔했다.
⑩ 모두 다 한 자식이다
직접 발품을 팔기도 했고 수작업으로 제작하기도 했다. 또 새로운 분야를 공부해서 만들기도 했다. 그 중에서 가장 애착이 가는 소품이 있느냐고 묻자 고개를 내저었다. 모든 소품이 제 자식과도 같다는 것.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없듯 모든 소품이 똑같다고 전했다.
"솔직히 다 비슷비슷한 것 같아요. 모두 심혈을 기울여 작업하거든요. 이 소품이 더 예쁘고, 이 소품이 더 밉고 하진 않아요. 오히려 너무 고생해서 만든 경우에는 '빨리 하고 치워버려야지' 하는 느낌이 들 때는 있죠. 그래도 하나같이 내 자식들이에요."
<사진=송효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