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spatch | 부산=정태윤기자] 만수(이병헌 분)는 제지 전문가다. 하루아침에 해고되며 재취업을 위해 노력한다. 만수에게 다른 길은 없다. 오직 제지 산업만을 고집한다.
영화에서 대부분의 사람은 종이를 만드는 일을 대단하게 여기지 않는다. 그러나 그 일은 만수의 인생 전부다. 그 모습은 영화를 고집하는 예술인들과 겹쳐 보인다.
박찬욱 감독은 "영화를 만드는 건 어찌 보면, 삶에 큰 도움을 주는 일도 아니고, 그저 2시간짜리 오락거리일 수 있다. 그러나 저는 그 일에 인생을 통째로 걸고 있다"고 털어놨다.
"제지 업계를 전혀 모르면서도 만수를 알 것 같더군요. 지금 한국 영화계가 어렵고, 다른 나라보다 회복이 더딥니다. 이 상태가 지속되진 않을 거라 생각합니다. 이 영화가 늪에서 빠져나오는 데 작은 역할을 할 수 있길 바랄 뿐입니다." (박찬욱)
영화 '어쩔수가없다'가 제30회 부산국제영화제'(BIFF) 개막식으로 선정됐다. 17일 부산 해운대구 우동 영화의 전당에서 시사회 및 기자간담회를 열었다.
박찬욱 감독, 이병헌, 손예진, 박희순, 이성민, 염혜란 등이 자리했다. 박 감독은 "부국제 개막작 선정은 처음이다. 오랫동안 준비한 작품을 우리나라에서 선보이게 되어 감개무량하다"고 인사했다.
'어쩔수가없다'는 미국 소설 '도끼'(액스)를 원작으로 한다. 만수가 덜컥 해고된 후 아내와 두 자식을 지키기 위해, 어렵게 장만한 집을 지켜내기 위해 재취업을 향한 자신만의 전쟁을 준비하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다.
이병헌이 주인공 만수를 연기한다. 박찬욱 감독과는 '공동경비구역 JSA', '쓰리, 몬스터' 이후 3번째 만남이다. 이병헌은 "박 감독님과 오랜만의 작업이라 신나고 설렜다. 이번 캐릭터는 굉장히 평범한 인물"이라고 소개했다.
영화는 만수가 석 달 안에 재취업하겠다고 다짐하지만, 1년 넘게 면접장을 전전한다. 그러다 그는 "나를 위한 자리가 없다면, 내가 만들어서라도 취업에 성공하겠다"고 다짐한다.
그는 "평범한 사람이 큰 상황에 부딪히고 그 상황을 이겨내기 위해 극단적인 결정을 내리고, 그 결정을 실행하며 변해가는 과정을 어떻게 설득력 있게 전달할지가 숙제였다"고 전했다.
만수는 취업을 위해 후보군을 제거해 나간다. 그 과정에서 제지 업계 베테랑 구범모(이성민 분)와 그의 아내 이아라(염혜란 분), 고시조(차승원 분), 제지 회사 반장 최선출(박희순 분) 등을 만난다.
처음엔 이상한 계획이 집착하는 만수의 모습이 마치 코미디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상황은 점점 진지한 분위기로 진행되고, 날카로운 풍자로 치닫는다.
박찬욱 감독은 "가족을 지키고, 내가 사랑하는 직업에 종사하고 싶다는 순수한 마음이 도덕적 타락으로 이어지는 걸 이야기하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이어 "원작이 나온 게 1990년대다. 그때 만들지 않으면 시들해지는 소재가 있는데, '도끼'는 시간이 지나도 내 이야기로 받아들일 수 있는 작품이었다"고 밝혔다.
배우들도 만수의 이야기에 공감했다. 이병헌은 "사라져가는 종이의 쓰임새처럼 극장이라는 곳에도 어려움이 있다. 이를 이겨내고 타계하고 다시 관객들에게 사랑받는 장소가 될 수 있을까 생각해 봤다"고 말했다.
손예진(이미리 역) 역시 "7년 만의 영화다. 얼마나 영화 작업을 할 수 있을까 하는 불안함이 있다"며 "앞으로가 더 중요하다. 박 감독님 같은 분들이 작품을 더 많이 만들어주셔야 한다는 생각이 간절해졌다"고 강조했다.
현장은 함께 만들어갔다. 이성민은 "감독님이 배우들의 생각을 존중해주셨다. 대본과 다르게 해도 독려해주시고, 확장할 여지를 열어주셨다"고 떠올렸다.
박희순은 "한 테이크 한 테이크 요구한 게 완성되면 또 다른 걸 원하시고, 또 다시 발전시키면서 만들어가는 과정이 있었다. 왜 감독님과 같이 하면 좋은 연기가 나오는지 알겠더라"고 치켜세웠다.
반면 이병헌은 고충을 털어놨다. "추가되는 상황이 많았다. 예를 들어 면접 보는 신에서 긴 대사를 치기 바쁜데, 쏟아지는 햇빛을 의식하면서 동시에 치통도 느끼면서, 달리는 떨렸다가 멈췄다가…. 이 모든 것들을 한꺼번에 하면서 해야 하는 상황이 힘들었다"고 토로했다.
'어쩔수가없다'는 앞서 제82회 베니스국제영화제 경쟁 부문 프리미어 상영과 제50회 토론토국제영화제 갈라 프레젠테이션 섹션 프리미어로 공개됐다.
외신들이 극찬을 받았다. 베니스에선 당시 미국 비평 사이트 로튼토마트 평점지수 100점 만점을 받기도 했다. 국내 작품을 대표해 내년 열린 오스카상 국제장편부문 출품작에 선정되기도 했다.
박희순은 "영화를 총 2번 봤다. 처음 봤을 땐 웃기고 재밌었다. 2번째는 웃었던 장면에서 눈물이 나더라. 희한한 감정이었다. 웃고 울 수 있다는 것이 이 영화의 큰 매력이라고 생각한다"고 전했다.
마지막으로 박찬욱 감독은 "만수라는 사람의 한계, 어리석음들이 잘 표현되기를 바란다"며 "이해하고 공감해주시면서 끝까지 혀를 끌끌 차면서 봐주셨으면 좋겠다"고 바랐다.
한편 '어쩔수가없다'는 오는 24일 국내 개봉한다.
<사진=정영우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