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spatch=김미겸기자] 고려 왕궁. 한밤 중이지만 심상치 않은 분위기가 감돌았다. 우왕(박진우 분)이 술에 취해 사냥을 가겠다고 난동을 부린 것. 충신들과 왕대비는 위험하다며 만류를 하고 나섰다.
우왕 : (눈을 희번덕거리며) 또 과인을 가르치려 드는 병이 도졌구나.
충신 : 어찌 소인이 전하를 가르치겠사옵니까. 죽기를 각오하고 성군이 되시라 말씀드리는 것이옵니다.
우왕 : (활을 빼어들고 겨누며) 죽기를 각오했다? 그렇다면 과인의 손에 죽어도 여한이 없으렸다?
이 순간, 카리스마 끝판왕 이인임(박영규 분)이 등장했다. 그만 하라며 조용히 우왕의 광기를 만류했다. 우왕은 발악을 했고, 스르르 무릎을 꿇었다. 몸을 덜덜 떨며 울먹였다.
우왕 : 자꾸, 자꾸 화가 납니다. 눈에 보이는 걸 모두 죽이고 싶습니다.
KBS-1TV '정도전'(강병택 PD, 정현민 작가). 신(神)들의 전쟁터다. 박영규, 유동근, 서인석 등 베테랑 중견 연기자들이 흠잡을 데 없이 노련한 연기를 펼친다. 타이틀 롤인 조재현 역시 명불허전이다. 탁월한 강약조절로 조재현 표 정도전을 완성했다.
그리고 또 하나, 신들의 전쟁에서 살아남은 인물이 있다. 그의 활약은 대반전이다. 고작(?) 30세의 나이로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다. '우왕'의 광기, 그의 연약함, 심지어 카리스마와 컴플렉스까지 자유자재로 넘나들고 있다.
연기신들과 싸움, 그 속에서도 밀림이 없는 꼬마(?) 신. '우왕' 박진우의 이야기다.
◆ "신들의 전쟁?…걱정이 앞섰다"
'정도전'에서 우왕은 핵심 캐릭터다. 권문세족과 신진사대부 사이에서 균형을 맞춰야 한다. 게다가 광기에 젖은 인물이다. 왕권에 대한 집착, 그리고 두려움을 갖고 있다. 공민왕의 살해과정도 알고 있기에, 겉으로는 패악을 떨어야 했다.
박진우에게는 파격적인 도전이다. 그도 그럴 것이 박진우는 그동안 훈남 캐릭터 전문이었다. '논스톱5'에서는 꽃미남 대학생, '어린 신부'에서는 인기 야구 선수로 분했다. '바람의 화원'의 실력파 화원, '메디컬 탑팀'의 까칠한 환자 등이 변신의 범위였다.
그런 그가 '정도전'에 발을 내딪었다. 연기 신들의 위엄(?)도 부담스러웠다. 박진우의 나이는 올해로 만 30세. 사극 전문 배우가 모인 '정도전'에서 최연소의 나이다. 유동근, 박영규, 서인석, 조재현의 기세에 눌릴 수 밖에 없었다.
처음은 우려로 시작했다. 소속사 '벨엑터스' 관계자는 "박영규, 서인석, 유동근과 가장 많이 맞붙는다. 대선배의 카리스마에 눌리지 않을까 걱정했다"면서 "연기신들의 잔치에 박진우가 찬물을 끼얹지 않을까 걱정이 됐다"고 털어놓았다.
◆ "박진우의 반전…내가 우왕이다"
우려는 기우였다. 물론 드라마 초반, 적응기는 필요했다. 신들과 맞붙기엔 그 내공이 부족했다. 하지만 중반을 거치면서 독보적인 우왕 캐릭터를 구축했다. 술에 취한 광기를, 두려움에 떠는 연약함을 선보였다. 우왕의 이중적인 면모를 제대로 드러냈다는 평가다.
연기 신들과의 대결에서도 중심을 잃지 않았다. 이인임 역의 박영규, 최영 역의 서인석과는 '케미' 마저 돋보였다. 이인임의 눈치를 보고, 또 그에게 휘둘리고, 최영을 호통하고, 그러다 의지하는 모습 등이 우왕, 그 자체였다.
유동근의 묵직한 카리스마 앞에서도 기죽지 않았다. 28회 이성계와의 맞대결. 기습에 실패한 뒤에에도 미친 듯이 웃었다. 두 팔을 활짝 벌리고, 눈빛을 형형하게 빛냈다. 비참한 최후를 맞은 우왕의 심리를 그대로 전했다.
'정도전' 관계자는 "유동근과 서인석 등 대선배들이 '우왕 물 올랐다', '어린 나이에 대단하다'고 칭찬할 정도"라면서 "선배들 사이에서 기죽지 않고 연기한다. 무게추가 한 쪽으로 기울지 않기에 드라마가 더욱 명분을 얻고 있다"고 귀띔했다.
◆ "오로지 우왕 생각…아직도 살아있다"
혼란의 고려가 있기에 새로운 조선이 있다. '우왕'이 정도전의 중심은 아니지만, 적어도 지금의 전개는 그를 둘러싸고 있다. 그래서 '우왕'의 역할이 중요하다. 신들의 배틀이 당위성을 갖는 것도, '미친' 우왕이 있기 때문이다.
박진우는 스스로 캐릭터를 구축했다. 강할 때 강하고, 약할 때 약한…, 그 완급조절을 위해 노력했다. 소속사 관계자는 "선배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는 게 목표였다"면서 "발성, 표정, 동작 등을 세세히 연구했고, 다행히 '민폐왕'을 벗어날 수 있었다"고 말했다.
박진우의 110% 활약에 하차 시점도 미뤄졌다. 원래 박진우는 31회를 통해 하차할 계획이었다. 이성계를 향한 기습에 실패, 유배지에서 사라질 예정이었다. 하지만 임팩트 있는 연기 덕분에 '생명'이 연장됐다는 후문이다.
'정도전'의 한 관계자는 "이미 죽어야 되지 않았을까. 그런데 지금도 살아 있다"면서 "박진우의 대본 분량이 늘어난 건 사실이다. 남은 건 그의 죽음인데, 아마도 극적일 것이다. 우왕의 최후를 지켜보는 것도 색다른 관전 포인트"라고 전했다.
<사진=KBS-1TV 캡처, 벨엑터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