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spatch=정태윤기자] 영화 '실낙원'을 완성한 8할은 김현주였다. 김현주는 대본을 자신의 시선으로 이해했고, 연상호 감독은 이를 지켜봤다.
김현주는 "감독님이 '내가 쓴 글을 김현주가 어떻게 해석하는지 감상하고 싶었다'고 하시더라. 그 말이 딱 맞았다. 그 어떤 요구 사항도 없었다"고 말했다.
김현주가 연기한 '류소영'은 일반적인 모성애로 표현하기엔 오묘한 지점이 있다. 그래서 영화의 비틀린 시선이 더 선명하게 와닿는다.
전형적이지 않아 호불호 반응이 있을 수도 있다. 김현주는 "장금이가 '홍시 맛이 나서 홍시라 했다'는 대사처럼 저도 느껴지는 대로 연기했다"고 털어놨다.
'디스패치'가 최근 김현주를 만났다. 그가 완성한 비틀린 엄마 '류소영'을 들었다.
# 연상호 | 믿어주는 감독
'실낙원'은 연상호 감독의 저예산 프로젝트다. 예산과 상관없이 새로운 이야기라 선택했다. 김현주는 "해본 적 없는 캐릭터니까 어렵지 않게 (출연을) 결정했다"고 밝혔다.
이어 "새로운 도전을 해보면 또 부족한 게 보이지 않나. 배우는 그걸 채워나가면서 발전하면서 성장하는 거라 생각한다. 그리고 새로운 걸 하면 재미있다"고 말했다.
14회차, 약 한 달 만에 촬영을 끝냈다. 김현주는 "짧았기에 밀도 있는 집중력으로 했다"며 "덕분에 캐릭터의 날것 같은 느낌이 살아난 것 같다"고 말했다.
이어 "스태프들도 적었다. 그래서인지 각자 '내가 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하는 게 있었다. 각자의 몫을 해내야 진행을 할 수 있었다. 각자 몰두해서 하는 시너지가 컸다"고 떠올렸다.
연상호 감독과 넷플릭스 '지옥', '정이', '선산'에 이어 다시 한번 만났다. 연 감독의 페르소나가 된 게 아니냐는 질문에 "우연하게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 더 같이 한 것 뿐"이라고 선을 그었다.
그러면서도 "배우에게 믿어주는 감독님이 있다는 것 자체로도 큰 힘이 된다"며 "기회가 없으면 갖고 있는 걸 표출할 수 없지 않나. 제 자신도 의구심을 가진 부분에 대해 도전 의식을 주시고, 자신감도 가질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하다"고 덧붙였다.
# 실낙원 | 이미 가짜의 삶
'실낙원'은 심리 스릴러다. 9년 전 캠핑스쿨 버스 실종 사건으로 아들을 잃은 엄마 류소영에게 죽은 줄로만 알았던 아들 류선우(배현성 분)가 기적처럼 살아 돌아오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다.
쉽지 않은 연기였다. 김현주는 "류소영의 심리에 관심이 컸다. 심리 변화를 밀도 있게 끌고 가야 했다"며 "제가 주로 그런 이야기에 끌리는 것 같다"고 설명했다.
류소영은 아들을 잃고, AI 프로그램 '낙원의 아이들'로 안경을 통해 선우와 만난다. 그러다 악하게 변한 자신의 진짜 아들을 9년 만에 마주하게 된다.
AI 속 아들과 낯선 얼굴로 마주한 아들 사이에서 흔들리는 감정은 일반적인 입장에선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다. 김현주는 류소영이 아들을 잃은 후 죽음과 같은 삶을 살았다고 해석했다.
그는 "소영은 이미 9년 동안 어린아이의 얼굴에 멈춰 있는 선우에게 익숙해 있지 않나. 이미 AI와 같은 가짜의 삶을 살고 있었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 류소영 | 비워야 채운다
김현주는 류소영에게 몰입하기 위해 전사를 디테일하게 설정했다. 그는 "선우의 아빠가 부재한다는 설정이 있지 않나. 류소영은 중독 수준으로 아이한테 집착했고, 안전하고 완벽한 삶처럼 보이려 했다"고 밝혔다.
김현주는 장면마다 류소영이 진짜의 삶을 살고 있지 않은 느낌을 주려 했다. 아침을 맞는 공허한 눈, 출근하는 차 안에서도 AI 세상 속에 사는 선우를 확인하는 모습 등.
그는 "사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하기 힘든 행동들이다. AI 아들에게 비정상적인 중독성을 보인다 생각했다"며 "그래서 진짜 아들이 돌아왔을 때 혼란을 느끼는 얼굴에 설득력을 주려 했다"고 설명했다.
모성애 연기에 대해선 "조심스러운 부분이 있다. 흉내 낼 수 없는 부분이라고 생각했다"며 "이번 영화는 모성애보단, 인간의 상실감에 대해 (해석을) 시작해 봤다"고 말했다.
"아빠는 아이를 직접 낳지 않아도 부성애라는 게 생기잖아요. 시간의 연속성이 쌓여 부성애가 생기는 게 아닐까 싶었습니다. (소영은) 9년의 시간이 없어진 거잖아요. 그래서 모성애 보다는 오히려 상실에 대한 감정에 대해 깊이 생각해봤습니다."
그래서일까. 김현주가 완성한 류소영은 전형적이지 않지만, 그래서 더 아프다. 엄마이기 전에, 무언가를 잃어버린 한 사람의 얼굴이기 때문이다.
김현주는 "인물을 이해하는 게 가장 중요한 것 같다. 그런 것들이 바탕이 되면, 책에 있는 감정들이 자연스럽게 나오게 된다"며 "제가 겪어보지 못한 감정을 표현하는 일이 재미있다"고 털어놨다.
# 김현주 | 지금처럼, 계속
김현주는 하이틴 스타 출신이다. 벌써 연기 경력 30년 차. 꾸준히 작품을 한 건 아니다. 지난 2005년 SBS-TV '토지'를 마친 시기. 미련 없이 활동을 중단하고 쉼을 선택했다.
그는 "너무 꽉 차 있었다. 터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슬럼프가 오고 연기가 재미없었다"며 "쉬면서 그걸 다 비워내니, 다시 채우고 싶은 마음이 저절로 생기더라"고 털어놨다.
"그때 알게 됐죠. 저는 쓴 만큼 비워야 채울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요. 지금은 건강하게 비우고 채우는 방법을 아는 것 같아요. 아무리 어두운 역할을 해도 이제는 차에 다 내려두고 집에는 가볍게 올라가요. 지금은 어느 정도 안정화가 되어 있는 상태죠."
연기의 짐을 개인적인 시간까지 끌고 오지 않는다. 그가 긴 시간 활동하며 터득한 생존 방법이었다. 연기에 대한 반응도 거의 찾아보지 않는다. 자신만의 기준이 흔들리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
그렇다면 연기에 대한 확신은 어디에서 찾을까. 그는 "감정에 정답은 없고, 한 캐릭터도 어떤 배우가 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며 "확신을 갖긴 어렵지만, 제가 성실히, 진정성 있게 했다는 걸 스스로 알기에 믿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방영 중인 tvN '100일의 거짓말'의 반응은 조금씩 보기 시작했다. "주변에서 말씀을 많이 해주셔서 많은 관심을 체감하고 있다. 유소란이 너무 멋있는 캐릭터라서 배우로서도 사랑받아 너무 좋다"고 전했다.
"칭찬은 즐겁게 듣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걸로 제 인생이 달라지진 않아요. 지금처럼 한 작품 한 작품 소중히 여기고, 진실성 있게 연기하고, 비워내고, 채워내며. 지금처럼 똑같이 계속 연기할 겁니다."
<사진제공=CJ EN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