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spatch | 부산=유하늘기자] "과연 내가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할 자격이 있는가?" (이창동 감독)
영화 '가능한 사랑'은 제83회 베니스국제영화제 당시 경쟁 부문 은사자상(심사위원대상)을 수상했다. 월드 프리미어 상영이 끝난 뒤에는 약 7분간 기립박수가 이어졌다.
이창동 감독이 '버닝' 이후 8년 만에 내놓은 신작이다. 그러나 작품은 한때 세상 밖으로 나오지 못할 뻔했다. 이 감독은 스스로에게 던진 질문 앞에서 멈추고, 제작을 접기도 했다.
이정미 작가의 제안이 새로운 실마리가 됐다. 다큐멘터리 감독의 이야기를 새롭게 더하는 방식이었다. 타인의 고통을 바라보는 영화감독 자신의 문제로 시선을 돌렸다.
"그제야 타인의 고통이 아닌, 나의 이야기가 될 수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스스로에게 정직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요. 긴 시간이 지나, 다시 시작하게 됐습니다." (이 감독)
'가능한 사랑' 측이 7일 부산 해운대구 영화의전당 야외무대에서 오픈토크를 진행했다. 이창동 감독과 배우 전도연, 설경구, 조인성, 조여정 등이 참석했다.
현장 열기는 역대급이었다. 야외무대 객석에는 이른 시간부터 모인 관객들로 가득 찼다. 배우들이 무대에 오르자, 곳곳에서 환호와 박수가 터져 나왔다.
'가능한 사랑'은 해고 노동자 부부와 다큐멘터리 감독 부부의 이야기다. 두 부부는 다큐멘터리 제작을 계기로 만난다. 서로 다른 삶과 그 안에 감춰진 상처와 욕망을 마주한다.
영화의 시작은 1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대기업 구조조정과 해고 노동자들의 파업, 진압 과정을 지켜보며 처음 이야기를 떠올렸다.
이 감독은 "해고 자체보다 그 과정에서 '국민이 우리 편이 아니다'라는 좌절이 컸다. 노동자의 권리보다 시장의 수익성이 중요해진 시대였다"며 "해고된 사람과 남은 사람을 '죽은 자'와 '산 자'로 나눌 만큼 깊은 골이 생겼다"고 회상했다.
설경구가 해고 노동자 호석을 연기했다. 총파업과 강제 진압 현장에서 겪었던 일들로 오랜 후유증을 겪고 있다. 다큐멘터리 감독 예지(조여정 분)를 만나 자신의 상처를 다시 마주한다.
설경구는 호석을 이해하기 위해 그의 몸부터 생각했다. 대사만큼이나 노동자의 몸에 쌓인 시간을 보여주는 데 집중했다.
그는 "감독님이 '호석은 어떤 사람 같냐'고 물으셨을 때 '저 같습니다'라고 답했다"며 "보편적인 남성성을 상징하는 인물이라고 생각했다. '나라면 어떨까'에서 출발했다"고 설명했다.
전도연은 호석의 아내 미옥을 맡았다. 마스크 공장에서 일하며 총파업이 가족에게 남긴 상처를 견뎌왔다. 불안 속에서도 자신의 삶과 가족을 지키려 한다.
전도연은 "미옥은 저와 닮은 부분도 있다. 사실 누구나 크든 작든 불안을 안고 살아간다"며 "가장 공감한 부분은 그 불안이 가족과 남편을 지키려는 사랑에서 비롯된다는 점이었다"고 말했다.
조여정은 다큐멘터리 감독 예지로 분했다. 해고 노동자의 삶을 카메라에 담는다. 호석·미옥 부부와 가까워지는 과정에서 자신이 타인을 바라보는 방식과 마주한다.
조여정은 "캐릭터 자체가 어렵고 부담스러웠다"며 "처음 대본을 읽었을 때, 다큐멘터리 감독으로서 그림자처럼 존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미옥과 호석의 눈만 보고 가려고 했다"고 말했다.
조인성은 예지의 남편 상우로 등장한다. 부유한 환경에서 자랐지만,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예지와 결혼했다. 아내를 따라 호석·미옥 부부와 어울리기 시작한다.
조인성은 "부유한 가정에서 자란 사람이 결혼을 위해 자신이 가진 것을 잃을 수도 있다는 선택을 했다. 그 자체로 권력과 맞서 싸운 인물이라고 생각했다"고 짚었다.
'가능한 사랑'을 관통하는 핵심은 '시선'이다. 이 감독은 "카메라는 시선이다. 카메라를 든다는 건, 누군가를 본다는 의미"라며 "본다는 것 자체가 힘을 갖는다. 보는 사람과 보여지는 사람 사이에 관계가 만들어진다"고 설명했다.
영화 속 두 부부의 관계도 그 시선 위에서 움직인다. 이 감독은 "우리는 인생에서 수많은 관계를 맺는다. 결국 누가 누구를 바라보는 관계일 수 있다"며 "그 관계에서 생기는 힘과 태도를 함께 생각해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배우들은 보고, 보여지는 관계를 생생하게 그려냈다. 이창동 감독은 네 배우의 만남을 '필연적인 앙상블'이라고 표현했다. 전도연과 설경구는 작품을 처음 구상할 때부터 염두에 둔 배우였다.
조여정과 조인성에게도 이유가 있었다. 이 감독은 "예지는 자의식이 강하면서도 '어떻게 해야 이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을까' 고민하는 감독이다. 조여정만큼 적합한 배우가 없었다"고 말했다.
이어 "조인성은 보이지 않는 힘과 존재감을 가진 배우다. 부드러워 보이지만 결코 부드럽지만은 않은 상우를 표현할 배우는 조인성밖에 없다고 생각했다"고 덧붙였다.
마지막으로, 이 감독은 작품의 무게를 다시 한번 강조했다.
그는 "'가능한 사랑'이 재미를 앞세운 영화는 아니다. 오늘 오픈토크가 마치 재미있는 영화를 만들고 나서 나누는 이야기처럼 느껴질까 봐 걱정되기도 한다"며 "함께해 주셔서 감사하다. 영화를 감상하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됐길 바란다"고 말했다.
설경구는 "2시간 44분(러닝타임)이 순식간에 지나간다. 한 순간도 지루하지 않다"고 자신했다. 전도연은 "영화의 뒷이야기를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여러분과 나눌 수 있어 기뻤다. 넷플릭스에서도 소장용으로 많이 봐달라"고 당부했다.
마지막은 조인성이 장식했다. 그는 이 감독을 향해 "제가 출연하든, 하지 않든 감독님이 또 다른 작품으로 관객들과 만났으면 좋겠다"며 "우리는 이창동 감독님의 영화를 볼 권리가 있다"고 힘주어 말했다. 객석에서는 뜨거운 박수가 쏟아졌다.
한편 제31회 부산국제영화제는 오는 15일까지 부산 영화의전당 일대에서 열린다.
<사진=송효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