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spatch=유하늘기자] 억압과 금기의 시대, 조선. 한 여인이 은밀한 내기를 제안한다. 정절을 지키며 살아가는 과부를 유혹하는 것. 세상 모든 사랑을 맛본 바람둥이는 기꺼이 불장난에 뛰어든다.
영화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2003)가 23년 만에 돌아왔다. 120분의 영화를 8부작 시리즈로 확장했다. 인물들의 과거와 관계를 더하고, 판소리와 민화 등 새로운 색깔을 입혔다.
분명 더 많은 이야기를 담았다. 그러나 더 풍성해지진 않았다. 인물을 설명하는 데 공 들이는 동안, 정작 '스캔들'의 핵심인 내기와 유혹의 힘이 약해졌다.
원작의 묘미는 팽팽한 긴장감에 있었다. 조원이 과연 정절녀를 무너뜨릴 수 있을까, 숙부인은 끝까지 마음을 지킬 수 있을까 끊임없이 궁금하게 만들었다. 결과를 향해 달려가는 과정에서, 관객도 두 사람의 게임에 끌려 들어갔다.
시리즈는 그 속도를 늦추고 인물을 들여다봤다. 그러나, 8부작으로 늘어난 이야기가 원작에 없던 새로운 재미까지 만들어내진 못했다.
정지우 감독은 '은교'와 '유열의 음악앨범' 등에서 현대인의 내면을 깊숙이 파고들었다. 이번에는 엄격한 유교 질서가 지배하던 조선으로 눈을 돌렸다. 억압 속에서 욕망이 비틀리는 과정을 그렸다.
원작과의 가장 큰 차이는 관계의 확장이다. 영화가 내기와 유혹을 중심으로 빠르게 달렸다면, 시리즈는 인물들이 그 게임에 뛰어들기까지의 과정부터 차근차근 쌓는다. 조씨부인(손예진 분)과 조원(지창욱 분), 희연(나나 분)의 과거와 관계에도 새로운 이야기를 덧붙였다.
조원의 변화가 대표적이다. 조씨부인과의 첫사랑에 상처받은 뒤 쾌락만 좇는 바람둥이가 되고, 희연을 만나 다시 마음을 내어준다. 이 과정에서 (원작에서 생략했던) 감정의 이유를 하나씩 설명한다.
문제는 그 설명이 지나치게 길다는 점이다. 영화에서는 조원이 첫사랑 조씨부인과 오랜만에 재회한 뒤, 그의 내기에 곧바로 뛰어든다. 시리즈는 조씨부인을 다시 만나기 위해 먼 길을 떠나는 과정부터 풀어낸다. 두 사람의 재회만으로도 상당한 시간을 쓴다.
이야기는 후반부로 갈수록 더 넓어진다. 세 사람의 감정뿐만 아니라 주변 인물들의 사연과 관계까지 비중 있게 다룬다. 인물은 많아지고 서사도 풍성해졌지만, 그만큼 중심은 흐려진다.
결국 가장 궁금해야 할 질문이 힘을 잃는다. 조원이 희연을 무너뜨릴 것인가, 아니면 희연이 끝까지 버틸 것인가. 원작을 팽팽하게 당겼던 내기와 유혹은 여러 서사 사이에 묻혀버린다.
물론 8부작으로 확장한 이상 새로운 이야기가 필요하다. 영화에서 미처 보여주지 못했던 인물의 과거를 풀어내고, 선택의 이유를 보충하는 것은 시리즈이기에 가능한 시도다.
그 서사가 현재의 선택을 설득력 있게 만든다면, 확장은 힘을 얻는다. 하지만 '스캔들'은 새롭게 더한 이야기와 원래 이야기 사이에서 균형을 잡지 못했다. 일부 서사는 이미 완성된 이야기를 늘리기 위해 덧붙인 것처럼 느껴진다.
특히 희연의 감정선이 아쉽다. 그는 조원의 접근을 경계하며, 좀처럼 마음을 허락하지 않던 인물이다. 그런데 그 단단한 경계가 어떤 계기로 무너졌는지 충분히 설명되지 않는다. 조원을 밀어내던 마음이 사랑으로 바뀌는 과정이 모호하다.
배우들은 익숙한 인물에 각자의 색을 입혔다. 손예진은 온화한 얼굴 뒤로 욕망을 감춘 조씨부인을 서늘하게 표현했다. 지창욱은 날렵하고 능청스러운 조원으로 자유분방한 바람둥이의 면모를 강조했다.
나나는 희연에 차갑고 강단 있는 분위기를 더했다. 다만 그 힘이 앞서는 만큼, 오랫동안 정절을 강요받으며 살아온 과부의 고단함은 상대적으로 옅다. 여기에 사랑에 빠지는 과정까지 충분히 설득되지 않으면서, 후반부 감정 변화의 힘도 약해졌다.
호흡의 문제는 7회부터 더욱 두드러진다. 앞선 회차에서 인물과 관계를 설명하는 데 오랜 시간을 썼던 이야기가 갑자기 속도를 높인다. 천천히 쌓아온 갈등이 한꺼번에 폭발하면서, 앞선 흐름과 자연스럽게 이어지지 않는다.
인물의 갈등과 선택, 관계 변화가 동시에 몰아친다. 그동안 느슨하게 이어지던 이야기를 남은 회차 안에 정리하려는 듯한 인상을 준다. 초중반에는 필요 이상으로 시간을 쓰고, 정작 감정의 결론을 보여줘야 할 순간에는 급하게 달린다.
특히 내기의 결말을 앞둔 조씨부인과 조원의 감정 변화가 혼란스럽다. 서로를 향한 욕망과 질투, 미련이 시시각각 뒤집힌다. 복잡한 감정을 보여주려는 의도로 읽히지만, 변화의 과정이 충분히 연결되지 않으면서 인물의 마음을 따라가기 어려워진다.
결국 초반의 느슨함과 후반의 급전개가 서로 맞물리지 못한다. 8부작이라는 긴 호흡을 선택했지만, 이야기의 완급 조절에는 실패했다. 인물의 감정을 깊이 들여다보기 위해 늘린 시간이 정작 후반부에서는 부족해 보인다.
'스캔들'의 기본 구조는 여전히 매력적이다. 조원은 희연을 유혹하기 위해 접근하지만, 정작 자신이 먼저 흔들린다. 조씨부인 역시 예상하지 못한 질투에 휩싸인다. 게임에 불과했던 관계에 진심이 끼어든다.
누가 먼저 흔들릴지 지켜보는 데서 긴장감이 생긴다. 문제는 시리즈가 그 감정에 도달하기까지 너무 먼 길을 돌아간다는 점이다. 여러 인물과 사건을 거치는 동안, 중심 갈등의 온도는 자주 식는다.
원작을 보지 않은 시청자라면 다르게 느낄 수 있다. 세 사람의 마음이 어디로 향할지, 관계가 어떻게 뒤집힐지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흥미로울 수 있다.
반면 원작을 기억하는 관객에게는 허들이 높다. 익숙한 이야기를 다시 꺼낸 만큼, 이를 뛰어넘을 새로운 재미가 필요했다.
시리즈는 그 답을 인물의 서사에서 찾았다. 하지만 8부작의 확장은 120분의 밀도를 넘어서지 못했다. 원작 특유의 긴장감은 실종됐고, 정주행의 인내는 실망으로 귀결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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