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spatch=이아진기자] "예전에는 생각하지 못했던 표현을 이제 조금 알 것 같아요."
최민식이 연기 경력 38년 차에 이르러 알게 된 바이다. 예전에는 스쳐 지나갔던 감정이 다르게 보이고, 같은 영화를 봐도 미처 몰랐던 마음이 읽히기 시작했다. 사람의 복잡한 내면도 이제야 조금 알 것 같다고 했다.
그는 이를 '배우의 눈과 가슴이 숙성되는 과정'이라고 표현했다. 나이가 들며 세상을 보고, 사람을 겪고, 관계를 쌓아온 시간이 연기에 깊이를 더했다는 것. 그만큼 표현의 폭도 넓어졌고, 해보고 싶은 인물도 많아졌다.
영화 '인턴'은 그 욕심을 제대로 풀어낸 작품이다. 최민식은 그간 보여준 강렬한 얼굴에서 힘을 뺐다. 대신 자신이 살아온 방식과 보고 겪은 경험을 녹였다. 정감 가는 아저씨이자 인생 선배 김기호를 완성했다.
'디스패치'가 지난 6일 서울 종로구 한 카페에서 최민식을 만났다. '인턴'을 선택한 이유부터 김기호를 만들어낸 과정부터 배우로서의 목표까지 들었다.
◆ 다시 만난 '인턴'
'인턴'은 동명의 할리우드 영화를 리메이크한 작품이다. 37년 직장 생활을 마친 김기호(최민식 분)가 패션 회사 '우투투'에 실버 인턴으로 입사하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렸다.
최민식과 '인턴'의 인연은 한 차례 끊겼다가 다시 이어졌다. 워너브러더스 코리아가 사업을 정리하며 제작이 무산됐다. 이후 한국 사업을 재개하면서 다시 기획됐고, 김도영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다.
최민식은 "처음에는 나하고 인연이 아닌 작품인가 생각했다"며 "하다 보면 작품도 배역도 다 짝이 있는 것 같다. 하고 싶다고 되는 것도, 하기 싫다고 안 되는 것도 아닌 것 같다"고 당시의 심정을 돌아봤다.
막상 다시 기회가 왔을 때는 부담도 따랐다. 원작이 워낙 사랑받았던 만큼 비교를 피할 수 없었다. 하지만 원작이 있다는 사실보다, 이를 어떻게 새롭게 해석하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생각이 곧 뒤따랐다.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같은 명작도 다시 만들어져 세계적인 걸작으로 재탄생했잖아요. 부담은 분명 있지만, 한편으로는 겁낼 것까지는 없다고 생각하고 도전했죠. 대신 원작을 그대로 가는 것보다 한국의 정서에 맞게 바꿔서 우리만의 영화를 만들고자 한 거죠."
캐스팅 단계에서도 김 감독과 적극적으로 의견을 나눴다. 최민식은 "여러 후보 가운데 한소희가 가장 적극적으로 작품을 원했다"며 "현장에서도 '이 친구가 이 작품에 목숨을 걸었구나'라는 게 느껴졌다"고 말했다.
◆ '한국 아저씨' 김기호
한국적인 정서를 담겠다는 생각은 김기호를 만드는 데도 이어졌다. 로버트 드 니로가 연기한 원작의 벤 휘태커를 따라가기보다 자신이 살아오며 보고 겪은 중년 남성의 모습을 담으려 했다.
"한국 아저씨 특유의 사고방식 중 하나가 '정'이라고 생각했어요. 아무리 대표님이어도 자기 자식 또래면 딸처럼 느껴질 수 있잖아요. 선우(한소희 분)를 바라보는 기호의 시선에도 그런 마음을 담았습니다."
그 감정이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는 건 술집 장면이다. 선우가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자, 기호는 내 딸 같아서 하는 말이라며 애정 섞인 호통을 친다.
"원래는 '만약 대표님이 제 딸이었다면'이라고 점잖게 시작하는 대사였어요. 그런데 정말 딸처럼 느껴진다면 그렇게 말하지 않을 것 같은 거예요. 그래서 소희에게는 미리 이야기하지 않고 대사 순서를 바꿔서 단호한 말을 먼저 꺼냈죠. 다행히 소희가 바로 눈물을 터뜨리며 받아주더라고요. 제가 원했던 장면이 나왔다 싶었죠."
작은 부분도 원작과 달리했다. 한국 사무실에서 볼 수 있는 장면들로 구성했다. 예를 들어, 벤의 다정함을 상징하던 손수건 대신 티슈를 건넸다. 당이 떨어질 때를 대비해 간식을 챙겨두는 장면도 추가했다.
◆ 물처럼 흘러들었다
김기호는 나이를 앞세우지 않고 인턴 동기들과 가까워진다. 신조어를 익히고, 그들만의 인사법을 따라 하며 자연스럽게 스며든다. 최민식 역시 현장에서 후배들과 그렇게 섞이려고 했다. 그는 그 방식을 '물'에 비유했다.
"네모난 그릇에 들어가면 네모가 되고, 세모난 그릇이면 세모가 되려고 했어요. 마치 물처럼요. 이제는 선배들보다 후배들과 작업하는 경우가 훨씬 많아요. 이 친구들과 화합하지 않으면 작품이 안 나옵니다."
박주성(김요한 분)과의 현란한 하이파이브 인사법도 현장에서 배웠다. 처음에는 어색했지만 몇 번을 주고받다 보니 자연스럽게 손발이 맞았다. 최민식은 “어느 순간 죽이 척척 맞았다"며 "그런 소소한 과정이 재미있었다. 촬영장에서 같이 논다는 생각으로 임했다"고 회상했다.
신조어도 익혔다. 그는 "'감다뒤', '어쩔티비' 같은 말은 이번에 확실히 알게 됐다"며 "우리 때도 '뻐국이' 같은 말을 쓰면 어른들이 그게 뭐냐고 했다. 세대가 달라도 신조어가 생기는 건 똑같은 것 같다"고 말하며 웃었다.
처음에는 자신이 후배들에게 맞춰야 한다고 생각했다. 막상 촬영이 시작되자, 오히려 배운 점도 많았다. 젊은 배우들의 자연스러운 호흡과 편안한 현장 분위기가 인상적이었다.
"저는 오히려 우투투 식구들한테 유연함을 배웠어요. 저희 때는 NG 두 번 이상 내면 욕먹고 혼났거든요. 지금은 현장 분위기가 많이 달라졌죠. 예전 습관대로 '이번에는 NG 내지 말아야지' 하고 예민하게 들어가도, 요한이랑 하이파이브 한 번 하고 나면 금세 풀어지더라고요. 후배들 덕분에 저도 한결 편하게 연기할 수 있었어요."
◆ 죽을 때까지, 배우 최민식
최민식이 새로운 연기에 계속해서 도전하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38년을 연기했지만, 여전히 새로운 역할과 장르를 향한 갈증이 컸다.
그는 "내가 연기해 본 적 없던 새로운 세상에 들어갈 때 묘한 쾌감이 있다"며 "두려움보다는 설렘과 기대가 크다. 그럴 때 전투력이 솟아난다"고 했다.
그의 관심은 자신의 다음 역할에만 그치지 않았다. 한국 영화의 황금기를 함께 지나온 배우로서, 영화계에 앞으로도 다양한 시도가 이어지길 바랐다.
최민식은 "'오디세이'를 보면 신화를 가지고 그렇게 멋진 작품을 만들지 않냐"며 "우리 역사에도 훌륭한 이야기가 많다. 그런데 왜 그런 작품들을 잘 안 만들려고 하는지 아쉽다. 다양한 감독들이 자기 색깔로 시도할 수 있는 환경이 됐으면 좋겠다"고 털어놨다.
마지막으로 배우로서의 최종 목표를 물었다. 인터뷰 내내 호탕한 웃음으로 분위기를 이끌던 최민식의 눈빛이 사뭇 깊어졌다. 짧은 답변 속에도 연기와 작품을 대하는 애정이 고스란히 묻어났다.
"죽을 때까지 좋은 작품을 하는 거죠. 좋은 작품이라고 꼭 예술 영화만 말하는 건 아니에요. '인디아나 존스' 같은 오락 영화도 좋은 영화잖아요. 아무 생각 없이 즐길 수 있는 작품도 있고, 철학적인 화두를 던지는 작품도 있고요. 장르에 국한되지 않고 영화적으로 완성도 높은 작품을 계속하고 싶어요. 앞으로도 보여드릴 수 있는 얼굴이 아주 많습니다."
<사진제공=워너브러더스코리아(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