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spatch=정태윤기자] (※ 이 글에는 영화 '경주기행'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영화 '경주기행'(감독 김미조)은 제목부터 2개의 얼굴을 하고 있다. '경주'는 죽은 막내딸의 이름이자, 그 죽음이 시작된 장소의 이름이다.
'기행' 역시 여행(紀行)이자, 기이한 행위(奇行)의 의미를 지닌다. 이 영화는 시작부터 끝까지 서로 다른 2개의 의미를 접붙이며 나아간다.
영화의 첫 장면도 마찬가지. 봉고차 안 네 모녀는 막내를 죽인 살인범을 처리할 방법을 논의한다. 그러다 차 안에 날아든 날벌레 한 마리에 자지러진다.
살인을 모의하지만, 고작 벌레 한 마리에 놀란다. 이 낙차는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일이 정말 쉬운 일일까'라는 질문으로 이어진다.
네 모녀는 알리바이를 만들기 위해 CCTV가 있는 관광지마다 들러 일회용 카메라로 사진을 남긴다. 사진에는 살의와 화목이 함께 담긴다.
이 사진들은 알리바이인 동시에, 가족의 기능을 잃은 지 오래된 이들이 처음으로 함께 떠난 진짜 여행의 기록이기도 하다.
납치된 범인은 영화 중반까지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다. 머리에 비닐을 뒤집어쓴 채 콩콩콩 뛰며 도망치는 모습은 우스꽝스럽기까지 하다.
관객은 잠깐 흔들린다. 혹시 범인이 진심으로 반성하고 있는 건 아닐까. 그러나 그의 얼굴이 드러나는 순간, 장르가 통째로 뒤집힌다.
살인범 백상현(변요한 분)은 순식간에 극악무도한 얼굴을 꺼낸다. 반성의 가능성과 그 가능성의 박탈. 영화는 그 두 가지를 나란히 쥐여준 다음, 빼앗는다.
엄마 옥실(이정은 분)의 얼굴도 양면이다. 초반의 얼굴은 초췌하고 닳아 있으면서도, 불쑥불쑥 용암처럼 치솟는 분노를 숨기지 못한다.
영화 '올드보이'의 오대수를 떠올리게 하는 행색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수선집을 운영하던 평범한 중년 여성의 얼굴과, 사람을 죽이기로 결심한 얼굴 사이.
영화는 이 거리를 건너뛰지 않는다. 후반부 그 얼굴에 광기가 들어서는 순간이, 이 영화의 진짜 클라이맥스다.
세 딸이 엄마의 복수극에 동참하는 이유도 하나가 아니다. 복수를 완성하려는 마음과 그래야 엄마가 살 것 같아서 따라나선 마음이 공존한다.
엄마는 지난 8년, 막내를 잃은 슬픔 때문에 남은 딸들을 제대로 건사하지 못했다. 이 여행은 딸들에게도 양날을 가진 여정이다. 증오의 끝을 확인하려는 마음과, 엄마를 다시 붙잡으려는 마음.
옥실은 끝내 백상현과 단둘이 마주한다. 살려달라 외치는 그 앞에서 미리 써온 쪽지를 꺼낸다. 그 안에는 그간 수없이 되물었을 질문이 담겨있다. 왜 내 딸을 죽였는지, 딸이 마지막에 남긴 말은 뭐였는지.
그러나 결국 아무것도 묻지 못한다. 대신 "널 용서하게 될까봐 너무 무서웠다"고 말한다. 옥실에게 용서는 안식이 아니라 딸에 대한 사랑을 저버리는 일이었다.
옥실은 범인을 죽인 뒤 시신을 밧줄로 묶어 큰 소나무 꼭대기까지 끌어올린다. 그 줄의 끝을 자신의 허리에 감고 온 힘을 다해 매단다.
은밀했던 복수를 가장 높고 눈에 띄는 곳으로 밀어올린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던 지난한 고통을, 마침내 눈에 보이는 자리로 끌어올리려는 몸짓이기도 하다.
영화의 마지막은, 그날로 돌아간다. 경주가 수학여행을 떠나던 날 아침. 엄마는 그때 하지 못했던 말들을 뒤늦게 건넨다. 경주는 "다녀오겠다"는 말과 함께 유유히 동네를 빠져나간다.
이 장면은 복수의 완성이면서 동시에 이별의 완성이다. 엄마가 끊어낸 것은 한 사람의 목숨만이 아니다. 8년 동안 자신을 붙잡고 있던 고통이다. 그제야 엄마는 딸을 떠나보낼 수 있었다.
결국 '경주기행'이라는 제목은 예고편이었던 셈이다. 이름과 장소, 여행과 기행, 용서와 배신, 복수와 이별.
영화는 화해할 수 없어 보이는 두 마음을 억지로 이어붙이며 전개한다. 그러고는 그 봉합선을 매끈하게 지우지 않는다.
용서로 끝나는 신파도, 통쾌한 복수극의 카타르시스도 아닌, 그 사이 어딘가에서 끝까지 눈을 돌리지 않는다.
영화에서 가장 오래 남는 것은 자전거를 타고 멀어지는 경주의 뒷모습이다. 엄마가 8년 동안 붙잡고 있던 딸이, 그제야 자신의 힘으로 멀어져 간다.
그 순간 엄마의 기행은 여행이 된다. 복수를 위해 시작한 여정은 끝내 딸을 떠나보내기 위한 애도의 시간이 된다. 하지만 복수가 끝났다고 잃어버린 시간이 돌아오는 것은 아니다.
복수는 끝났지만, 그날 이후의 삶까지 되돌릴 수는 없다. 그것이 '경주기행'이 관객들에게 남긴 풀리지 않는 여독일 것이다.
영화는 26일 개봉한다. 러닝타임은 111분.
"죽여야 사는 엄마" (경주기행 ★★★☆)
<사진제공=롯데엔터테인먼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