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spatch=김지호기자] 분명, 대중성이 높은 영화는 아니다. 장르는 19금에, 내용은 섹스 코미디다. 한정된 세트장에서 네 명의 배우가 구강 액션을 펼친다는 점도 진입 장벽일 수 있다.
게다가 하정우란 이름이 주는 예측 가능한 지점들도 있다. 그는 큰 스케일과 화려함을 추구하기보다, 인간 심리를 관찰하고 블랙 코미디를 얹는다. 이 역시 취향을 크게 타는 부분이다.
"맞아요. 예매율 안 올라오는 것 보세요. (웃음)"
하정우 감독도, 웃픈 농담을 했다. 취재진이 청소년 관람불가 등급으로 인한 흥행 여부를 우려하자, 자폭 개그로 화답했다. 물론, 그 반응조차 하정우스럽다.
그는 이내 진지하게 "이 작품을 택한 나의 목적은 흥행이 아니었다. 흥행은 그냥, 모를 일이라 생각했다"며 "수많은 영화 역사에서 그걸 노리고 성공한 사례가 있느냐"고 반문했다.
"마틴 스콜세지의 다큐멘터리를 봤어요. 그의 작품을 보던 관객들이 불편하다며 뛰쳐나갔다고 합니다. 영화란 그런 것 같아요. 연출자의 목적이 무엇인지가 중요하죠. 저는 그저 이 작품이 마음에 들었고, 만들 자신이 있었어요."
하정우 감독이 '롤러코스터', '허삼관', '로비'에 이어 4번째 신작을 내놓았다. 영화 '윗집 사람들'이다. 지난 2일, 작품 개봉을 하루 앞두고 '디스패치'를 만났다.

◆ 그냥 섹스코미디가 아니다
'윗집 사람들'은 스페인 영화 '센티멘털'을 원작으로 한다. 주인공은 아랫집 부부 정아(공효진 분)와 현수(김동욱 분). 정아가 윗집 부부 수경(이하늬 분)과 김 선생(하정우 분)을 초대, 저녁 식사를 하며 벌어지는 소동을 그린다.
하정우는 이 작품을 택한 이유에 대해 "원작을 봤는데, 예상치 못한 울림이 있었다"고 회상했다. "정아와 현수는 바닥을 본 부부다. 마지막으로 이혼하려고 서로 안아보는데, 그게 굉장히 어색하다"고 설명했다.
"그런데, 그 포옹에서 이상한 터칭(Touching)이 오는 거죠. 현수는 정아의 흐느낌을 통해 뭔가를 느꼈을 거에요. 커플 뿐만 아니라 평소에도 부모와 자식, 친구들 사이에 이런 소통의 부재가 있잖아요. 그러다 무뎌진 감정들이 깨어나는 것. 그게 느껴졌어요."
그는 "정아 대사 중에 '우리의 끈을 연결해주는 건, 카톡밖에 없다. 우린 굉장히 현대적인 커플이다'는 대사가 있다"며 "요즘 사람들에게도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일 것 같았다. 원작을 저만의 결로 만들면 재밌겠다 싶었다"고 덧붙였다.
하정우가 각색하고, 연출하고, 출연까지 했다. 하정우는 "처음엔 연출 제안만 왔었다. 그런데 각색 과정에서, '내가 하면 재밌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비하인드를 전했다.
"투자사에서는 처음에 공효진·하정우 커플을 제안했었어요. 그런데 제가 '아뇨. 재미없을 것 같아요' 라고 했죠. 차라리 제가 윗층 남편을 하고, (김)동욱이가 1층 하는 게 나을 것 같다고요. (김 선생은) 그만큼 제가 잘 할 수 있는 캐릭터였어요."

◆ 원작, 이렇게 비틀었다
원작의 현수는 음대 교수다. 하정우는 이 캐릭터를 영화감독으로 만들었다. "영화감독은 제가 어렸을 때부터 봐 왔고, 지금도 저희 동네에 있는 사람들"이라며 "그들의 성장, 고민, 힘듦을 몸소 느낀다. 감정 설계를 잘 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고 밝혔다.
"흥미로운 건, 감독이란 직업 자체가 사회성을 필요로 하는 일인데요. 영화감독님들 실제로 다 사회성 없어요. (웃음) 그 간극을 왔다 갔다 하는 감정 기복과 심리 상태가 현수라는 역에 잘 맞는다 느꼈습니다."
정아의 직업, 시간강사도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이 집은 (감독의) 처가에서 마련해준 것일 테다. 인테리어도 장모님과 아내가 했을 것이고, 감독은 처가살이를 하는 것까지 생각했다"고 운을 뗐다.
"그렇다면, 정아에겐 어떤 서브텍스트가 있을까 상상했어요. 호기롭게 유학하고, 낭만적으로 영화감독과 결혼했지만 현실의 벽에 부딪치는 거죠. 자기 전공인 미술을 가르치며 살아가는 예술가 생각이 났어요. 그 마음도 제가 아는 분야 같았어요."
이하늬의 포지션은 중재자로 설정했다. "전문의들도 유튜브를 하지 않나. 현수와 정아를 연결하고 정리해주는 심리상담 전문의가 되면 말이 되겠다 했다"며 "이것은 원작에서도 비슷하다"고 알렸다.
원작의 김 선생은, (의외로) 소방관이다. "저도 그게 재밌고, 피지컬적으로도 어울린다 생각했다"며 "역으로 정반대의 직업을 찾았다. 공무원, 그 중에서도 교편을 잡은 인물이 이 짓거리를 하면 재밌을 거라 생각했다"고 웃었다.
덧붙여, 스와핑이란 위험한 소재의 자료 조사도 흥미롭다. "진짜 암암리에 엄청 큰 커뮤니티와 룰들이 있다. 그걸 조사하며 놀랐다"며 "건강검진을 2주 내 받아 제출하고, 돈이 절대 오가지 않는다. 엄청나게 많다"고 했다.

◆ 대본, 코미디언까지 동원했다
영화에는 노출, 베드신, 스킨십 등이 없다. 대신 영화 후반부, 윗집 부부의 황당한 제안들이 쇼킹하다. 이하늬가 특유의 우아한 얼굴로 폭탄 발사하는 대사들이 파격적이다. 한 마디로 정의하면, 19금 구강 액션이랄까?
감독 입장에선 대사 수위가 고민이었다. 하정우는 "19금과 15금 등급 사이 갈등이 컸다. 솔직히 나조차 망설여지더라"면서도 "그런데 (대사 수위를) 타협하면 안 될 것 같았다. 연출자 하정우의 의지가 컸다"고 털어놨다.
"'윗집 사람들'은 그냥 섹스 코미디 영화가 아니에요. 우리와 닮은, 평범한 아랫집 부부의 리액션을 보는 영화죠. (대사의) 자극이 셀수록 재밌는데, 그걸 거세한다면 영화가 밋밋해져 버리지 않을까요?"
코미디 장르이면서 대사극인 만큼, 얼마나 웃기느냐도 중요했다. 전문 희극인들을 동원한 이유다. 우선, 하정우와 절친한 '수다맨' 강성범이 대본 작업에 참여했다. 강성범은 하정우의 대학교 선배로, '롤러코스터' 부터 4연속 호흡을 맞췄다.
"(강)성범이 형이랑 아이디어 회의를 많이 해왔어요. '롤러코스터' 때는 형과 글 작업도 많이 했죠. 코미디언들이 말맛에 있어 천재적이잖아요? 평생 업으로 하는 사람들이니까요."
엄지윤, 곽범, 이창호 등 MZ 코미디언들도 수혈했다. "배우든 감독이든, 누구나 다 자기 검열과 의심을 한다. 나도 그렇다"며 "이번엔 처음으로 코미디언 분들께 연락해 협업을 하게 됐다"고 알렸다.

◆ 수정하고, 리딩하고, 수정하고, 리딩하고….
'윗집 사람들'의 대본 작업은, 크랭크업 때까지 이어졌다. "촬영 마칠 때까지 대사를 계속 수정하며 작업을 했다"며 "리딩도 진짜 많이 했다. 대사극의 경우, 글을 썼다 지웠다 하는 것보다도 실제 귀로 들어야 하는 게 크기 때문"이라 강조했다.
"오디션을 통해 따로 리딩배우도 뽑았어요. 현수, 정아, 수경, 김 선생 등 4명의 배우 담당을 미리 선발했죠. 그 배우들과 리딩하는 시간을 먼저 정했어요. 말이 잘 흘러가는지, 단어가 재밌는지, 잘 전달되는지 체크하고 수정했죠."
그는 "만일 하늬가 스케줄이 안 된다 하면, 메인 리딩에 리딩배우를 불렀다. 2명이 빠지게 된다면, 또 리딩배우들이 채우는 식"이라며 "듣고, 리딩하고, 수정하는 것. 이 모든 것이 다 시나리오 작업의 일환이었다"고 짚었다.
"수없는 리딩을 통해 시나리오를 생동감 있게 만들려고 많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런 시간이 많아질수록, 배우의 연기가 현장에서 훨씬 자유로워지죠. 정말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덕분에, '윗집 사람들'의 현장은 애드리브가 많지 않았다. 하정우는 "우리가 짜놓은 걸 100% 소화하는 것을 좋아한다"면서도 "약속한 대로 진행하는 게 컸다"고 말했다.
"디렉션까지 미리 시나리오에 심어놓았습니다. 대본이란 설명서만 따라가면, 자연스럽게 되는 부분들이 많죠. 리딩 덕분에 얻어지는 긍정적 효과들입니다. 아! 공효진만 예외에요. 효진이는 연기 스타일이 야생동물 수준이거든요. 너무 사랑스럽고 사실적이죠."

◆ 공효진, 김동욱, 이하늬, 그리고 하정우
연기 잘 하는 배우들이 107분 동안 구강 액션을 펼친다. 전혀 지루하지 않게, 이 역동적이지만 소소한 디너 타임을 완성한다. 하정우는 공효진, 김동욱, 이하늬 등 세 배우에 대해 감탄 또 감탄했다.
"효진이가 특히 이 영화의 낯선 부분들을 상쇄해줬습니다. 엄청나게 잘해줬어요. 기대 이상으로요. 감정을 어떻게 운용하는지를 본능적으로 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김동욱에 대해서도 "숨겨진 프로 중의 프로, 고수 중의 고수"라며 "너무 훌륭하다. 김동욱이 (현수) 그 이상의 역할을 해줄 거란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리고, 엄청났다"고 호평했다.
이하늬 역시, 의심할 여지 없는 베테랑이다. 특이점이라면, 촬영 당시 임신 초기였다는 것. 하정우는 "하늬를 주어진 상황에서 어떻게 잘 챙겨줄 수 있을지가, 저 뿐 아니라 모든 제작팀의 고민이었다"고 비하인드를 풀었다.
그렇다면, 배우 겸 감독 하정우는 어땠을까? "그간 연출하며 출연한 작품 중 난도가 제일 높았다"며 혀를 내둘렀다. "야외 촬영이라도 있으면 중간 중간 셋팅 시간도 걸리고, 쉴 틈이 있다. 그런데 이건, 셋업이 너무 빨랐다"고 털어놨다.
"진행 속도가 너무 빨라서 힘들더라고요. 배우로서 숨찬 호흡이 가시기도 전에 (감독으로서) 결정을 내려야 했어요. 다음 연출작은 좀더 출연 비중이 낮은 걸 하고 싶어요. 1번 주연? 2번 주연? 다 못 할 것 같아요."

◆ 감독 하정우, 성장했다
'윗집 사람들'은 지난 3일 개봉했다. 아직 큰 화제는 모으지 못하지만, 후기 자체는 호평이다. 하정우 감독이 의도한 대로, 사람 사이의 관계를 되돌아볼 수 있는 영화라는 것. 웃음 타율도 높다.
하정우는 이번 영화를 만들며 1mm 성장했다고 겸손히 말한다.
"기술적인 부분들은 사실, 스태프들의 역량입니다. 어느 정도 영화의 문법을 안다면 이야기할 부분은 아닌 것 같아요. 저의 성장이라면, 캐릭터를 통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어떤 감정을 표현할까. 이런 철학과 생각이 깊어졌다는 게 아닐까요?"
그는 "전작들을 보면 말하고픈 게 너무 많았다는 생각이 든다. 많은 캐릭터들을 등장시키고 배치하다보니, 덜 전달되고 엉키는 부분도 있었다"며 "상대적으로 이번 작품은 욕심을 덜어냈다. 버리고, 힘을 뺐다"고 회상했다.
"저는 아이러니를 좋아합니다. 이 작품에선 그토록 차가웠고 굳어졌던 관계가, 낯선 사람들의 이상한 제안을 통해 한 순간에 달라져요. 인간은 그토록 예상치 못한 상황들을 살아가며 마주하는 것 같아요. 이런 게 너무 흥미롭고 재밌습니다."
하정우는 아직, 흥행의 맛을 보지 못했다. 간절할까? 그 질문에, 그는 담담히 말했다. 전하고픈 이야기를 최선을 다해 만들어냈다. 그 다음은, 신의 영역이라는 것.
"저는 지금 평온합니다. 왜 평온할까 생각했더니, 내가 할 만큼 다 했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블라인드 시사부터 많은 관객들을 미리 만났고, 감사했습니다. 흥행을 원하지만, 하늘의 뜻이란 생각이 듭니다. 허락해주시면 좋고, 때가 아니라면 기다려야죠."

<사진제공=바이포엠 스튜디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