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spatch=정태윤기자] 배우 이유미는 완전하지 않은 역할을 그려내는 데 특화된 배우다. 결핍이 있는 캐릭터의 빈칸을 진짜처럼 채운다. 밝은 연기를 해도, 묘하게 짠한 여운이 남는다.
넷플릭스 '당신이 죽였다'(극본 김효정, 연출 이정림)는 그런 이유미의 장점을 응축한 작품이다. 이유미는 남편의 폭력 속에서 지옥 같은 시간을 견디는 피해자 '희수'를 소화했다.
그는 캐릭터의 삶을 담기 위해 36kg까지 감량했다. 폭력에 시들어버린 얼굴을 완성하기 위해 색도 표정도 덜어냈다. 푸릇푸릇했던 과거, 무채색이 된 현재, 그리고 조금씩 색을 찾아가는 미래까지 표현했다.
"감독님께서 '희수는 연약하지만, 강한 느낌이 있는데, 그 점이 너와 비슷하다'고 하셨어요. 희수가 잃어버린 색깔을 찾아가며 얼마나 단단해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 "희수는 왜 도망치지 못했을까?"
희수는 한때 촉망받는 동화작가였다. 그러나 결혼 후, 남편 노진표(장승조 분)의 폭력에 시달린다. 벗어나기 위해 친구 은수(전소니 분)와 함께 남편을 죽이기로 결심한다.
희수는 모든 삶을 통제받는다. 옷차림, 식사 시간, 외출, 그리고 집 안에서의 움직임까지. 자칫하면 부러질듯한 가녀린 몸엔 늘 피멍이 가셨다.
폭력의 디테일이 적나라하게 드러날수록 물음표가 그려진다. 희수는 왜 도망치지 못했을까. 이유미 역시 대본을 처음 읽고 가장 먼저 떠올린 생각이었다.
그는 "희수를 처음 받았을 때 너무 조심스러웠다. 실제 피해자분들이 있으니까 내가 연기적으로 감히 표현할 수 있을까, 완벽히 이해했을까, 고민을 많이 했다"고 털어놨다.
그래서 희수의 입장에 최대한 가까이 다가가려 했다. 노진표와 과거에 행복했던 과거를 생각하며, '사랑으로 결혼한 두 사람이 왜 균열을 맞았을까'를 연구했다.
그는 "진표와의 결혼 사진을 진짜처럼 찍었다. 커플 사진도 하루 날 잡아서 깔깔대며 촬영했다"며 "희수도 결혼 사진을 찍으며 얼마나 행복했을까를 생각했다"고 말했다.
"처음엔 폭력이 한두 번이었겠죠. '다시는 안 그러겠다'는 말도 믿었을 거고요. 그런데 상황이 반복되면서 혼돈이 왔을 거예요. 도망치려고 했지만, 결국 노진표라는 감옥 안에서 무기력한 사람이 되었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 "36kg까지 감량했다"
희수는 노진표의 룰에 따라 움직인다. 밥을 먹을 때도 수저와 물컵의 각도까지 맞출 정도로, 모든 것이 진표가 정해놓은 규칙 안에서 이루어진다.
이유미는 "희수는 외적으로 회소하고 음식에 대한 미련이 없고, 그저 규칙대로 사는 인물이라 생각해서 체중을 감량했다"고 설명했다.
"42kg이었는데 촬영 즈음엔 36kg까지 만들었습니다. 메이크업도 푸석푸석하게 하고, 립밤도 바르지 않았어요. 최대한 무채색처럼 표현하려 했습니다."
그의 캐릭터 구축 포인트는 '빼기'였다. 살뿐 아니라 색깔도 덜어냈다. 그는 "희수는 외관적으로 보면 연약해 보이지만, 내적으로 들어가면 강한 사람"이라고 소개했다.
이어 "과거는 생기 넘치는 얼굴이었다면, 진표와의 결혼 생활은 무채색으로 완성했다. 그 후에는 그 색깔을 하나하나 찾아나가는 모습으로 그려나갔다"고 덧붙였다.

◆ 현장에서 느낀 그대로
폭력의 피해자를 연기하는 만큼 쉽지 않은 장면이 많았다. 특히 가장 힘들었던 신은, 진표의 머리를 스노우볼로 내리치는 장면이었다. 그토록 바라왔던 복수를 성공시킨 순간이었다.
이유미는 "사실 글로만 읽었을 때는 시원할 줄 알았다. 그런데 막상 해보니, 해방된 느낌이 하나도 나지 않더라. 해방이 아닌 절규만 남았다. 그때 에너지 방출이 가장 많았다"고 전했다.
"그때 정말 희수에게 이입한 순간이었던 것 같아요. '미안하다'고 한마디는 해주지…. 그 순간 진표를 향해 욕을 하지 말고 '사과하라'고 말이라고 해볼 걸 그랬어요."
이유미가 희수가 되는 방법은 최대한 공간을 느끼는 것이었다. 희수가 되어 정말 그 공간에 있다고 생각하며 표현하려 노력했다. 진표의 집을 희수의 감옥으로 받아들이려 했다.
그는 "대사보다는 표정이나 행동으로 보여줘야 하는 신이 많았다. 그 공간을 최대한 느끼려고 노력했다. 카메라 앞에서는 희수로 있으면서 진실되게 표현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현장에는 상담가가 상주해 있었다. 이유미는 "덕분에 안전하다는 느낌을 받아 더 마음껏 했다"며 "두려움 없는 상태에서 연기를 할 수 있다는 것이 큰 도움이 됐다"고 전했다.

◆ "희수의 단단함"
이유미와 장승조는 극단적인 상황 속에서 역대급 연기 시너지를 냈다. 장승조는 이런 얼굴이 있었나 싶을 정도의 악역을 소화했다. 이유미의 결핍은 더욱 극대화됐다.
이유미는 "선배님이 먼저 다가와주시고 아이디어 제안도 많이 해주셨다"며 "저는 선배님이 주시는 걸 열심히 받아먹기만 하면 됐다"고 치켜세웠다.
전소니는 극 중 은수처럼 든든한 동료였다. 그는 "전소니는 솔직하고 꾸밈없는데, 예쁘게 말한다. 대화를 하면 아늑함을 느낀다. 서로를 믿는다는 느낌을 받으며 촬영했다"고 말했다.
이유미는 희수와 함께 성장하는 걸 느꼈다. "은수가 자신의 색을 예전과 또 다른 식으로 채워나가고 있다는 느낌으로 성장했다고 생각한다"고 전했다.
"저도 똑같이 단단해 지는 걸 느꼈어요. 희수를 통해 다시 채울 수 있다는 걸 배웠습니다. 스스로 모든 걸 놓아버리는 순간이 와도, 다시 채워나갈 수 있을 것 같아요.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 생긴 것 같아요."

◆ 여전히 궁금한 배우를 꿈꾸다
이유미는 지난 2021년 '오징어 게임', '지금 우리 학교는'으로 흥행 연타를 기록했다. 이후 주연 배우로 자리잡아 쉬지 않고 활약 중이다.
밝은 역할도 어두운 연기도, 자신만의 섬세한 결로 완성한다. 그는 "글을 읽으면 캐릭터에 궁금증이 생기면서 너무 재미있다"며 "그때마다 저를 필요로 하는 캐릭터를 만나온 것 같다"고 말했다.
중학생 때 데뷔한 그는 매번 새로운 얼굴을 보여주고 있다. 그의 다음은 어떤 모습일까. 그는 "사실 매일매일 하고 싶은 역할이 바뀐다"며 고민했다.
"오늘 기준으로 말씀드릴게요. (웃음) 제 나이에 맞는, 일상적인 이 모습을 보여드릴 수 있는 캐릭터를 해보고 싶습니다. 그런 기회가 있으면 좋겠네요."
인생의 절반 이상을 연기에 쏟아왔다. 그럼에도 여전히 연기가 재밌다. "재밌는데 (주연 배우로 올라올 수록) 부담스럽기도 하다. 재미와 부담이 동등하게 있는 것 같다"고 털어놨다.
"그 부담감이 있어야 잘해내고 싶은 욕구와 원동력이 생기는 것 같아요. 아주 적절합니다. 좋은 원동력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 같아요. 그래야 더 나아질 수 있으니까요."
이유미는 마지막으로 "긴 시간을 포기하지 않고 걸어온 스스로가 뿌듯하다. 계속 궁금증을 유발하는 배우가 되고 싶다. 제 연기를 궁금해 하셨으면 좋겠다"고 바랐다.
<사진제공=넷플릭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