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spatch=김지호기자] 이병헌, 손예진, 박희순, 이성민, 염혜란.
이름만 들어도 신뢰가 가는 라인업이다. 게다가 '마에스트로' 박찬욱 감독의 신작이다. 뚜껑을 열어보니, 그 이름값을 톡톡히 증명했다. 해고라는 잔혹한 현실을 살벌하게 풍자, 139분을 꽉 채웠다.
베테랑 배우들의 연기 파티도 볼 거리다. 이병헌과 손예진은 말할 것도 없다. 여기에 박희순의 술주정 연기, 이성민의 절규, 염혜란이 흘리는 악어의 눈물 등도 다채롭게 볼 수 있다.
영화 '어쩔수가 없다'(감독 박찬욱) 기자간담회가 22일 오후 2시 서울 용산 CGV에서 열렸다. 박찬욱 감독, 이병헌, 손예진, 박희순, 이성민, 염혜란이 참석했다.
'어쩔수가 없다'는 블랙 코미디 스릴러 영화다. 회사로부터 돌연 해고 통보를 받은 가장 만수(이병헌 분)가 주인공. 그가 경쟁자들을 제거하고 취업에 성공하는 피비린내 나는 이야기를 그린다.
박찬욱 감독은 "영화 속 인물들은 서로 의존하고, 서로의 관계 속에서 존재한다. 이게 특징이라 생각하며 영화를 만들었다"고 기획 의도를 밝혔다.
그는 "만수는 아내 미리(손예진 분) 없이는 동기가 설명되지 않는다"며 "만수의 타깃인 세 남자 범모(이성민 분)와 시조(차승원 분), 선출(박희순 분)도 만수와 무언가를 공유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만수와 세 남자의 공통점은 제지 전문가라는 점이다. 모두 해고 당하고 새 직장을 구하고 있으나 구직에 실패했다는 상황도 같다. 시조와 만수는 딸을 사랑하며, 같은 차를 갖고 있다.
또, 만수는 범모와 알콜 의존도도 비슷하다. 범모 아내 아라(염혜란 분)는 미리를 떠올리게 하는 존재다. 만수에게 있어, 아라의 불륜은 남일 같지 않게 느껴진다.
박 감독은 "범모는 만수에게 좀 있다가 죽여야 하는 사람이다. 그런데도 아라의 불륜을 알리고 싶지 않아 한다"고 덧붙였다.
즉, 이 영화는 평범한 가장의 자기 파괴 행위를 보여준다. 박 감독은 "만수가 자신의 분신들을 하나 하나 제거해 나가는 이야기"라고 정의했다. 벌레가 나무 잎을 갉아먹는다는 영화 속 대사에 빗댔다.
박 감독은 3년 전, '헤어질 결심'으로 '헤결 폐인'들을 불러모았다. '어쩔수가 없다'에 대한 관객들의 기대감도 어느 때보다 높은 상황이다. 박 감독 역시 "부담되고, 겁이 난다"고 솔직히 말했다.
박찬욱은 스스로를 "전작과 다른 영화를 만들고자 하는 방향으로 노력하는 류의 감독"이라고 정의했다. 실제로, 영화는 '헤어질 결심'과 정반대 지점에 선다.
박 감독은 "헤어질 결심이 시적이라면, 이 영화는 산문에 가깝다. '헤결'이 시적이라면, 이건 꽉 채웠다. '헤결'이 여성성이 강하다면, 이건 남성성이 강하다"고 설명했다.
박찬욱은 "이 영화는, 갑작스런 실직을 다룬다. 성실한 노동자 입장에서 실직은 사형 선고나 다름 없다. 정체성이 부인되고, 삶이 송두리째 붕괴되는 경험일 것"이라 전했다.
그는 "이런 일은 한 가정을 파괴하는 일이기도 하다. (구식) 남자들의 경우, 남성성에 대한 부정으로 다가올 수도 있다. 말하자면, 사내 구실 못 한다는 자괴감에 빠지는 것"이라 강조했다.
'어쩔수가 없다'에는 박찬욱 감독 특유의 유머도 깨알같이 담겨 있다. 박 감독은 조용필의 '고추잠자리'가 삽입된 시퀀스를 가장 유머러스한 신으로 꼽았다. 만수, 아라, 범모의 몸싸움 장면이다.
박 감독은 "(음악 때문에)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아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게 된다. 어쩔 수 없이, 과장된 액션을 한다"며 "범모 부부가 편이 된 게 아니라 번갈아가면서 싸운다는 게 특이하다"고 자평했다.
출연진들이 펼치는 연기 맞대결도 관전 포인트다. 무엇보다, 이병헌은 이병헌이다. 어디선가 현실에 있을 법한 40대 가장으로 완벽 변신했다. 살인을 저지를 때마저 납득시킨다.
손예진의 풍부한 감정 표현도 인상 깊었다. 부부싸움을 하며 남편을 타박하는 신, 남편의 비밀을 알고 고뇌하는 장면, 영상통화 신 등에서 감탄이 터졌다.
이병헌은 손예진에 대해 "처음 연기를 같이 했는데, 많은 순간 놀라게 됐다. 자신이 표현해야 하고, 찾아야 할 감정들을 다 찾아가더라"고 칭찬했다.
손예진 역시 "선배님과 연기하며 정말 힘을 하나도 주지 않고 유연하게 연기한다는 점에 놀랐다"며 "어떻게 저렇게 온 몸에 힘을 다 뺀 상태로 연기할 수 있을까 감탄했다"고 회상했다.
극의 엔딩 부분, 염혜란의 가짜 눈물도 고개를 끄덕이게 한다. 염혜란은 "만수에겐 적(범모)의 아내다. 그런데 결국 예측할 수 없는 동조자가 된다. 의외의 해결사 같은 구조가 재미있었다"고 미소지었다.
한국 극장가가 침체기에 빠진 지 오래 됐다. '어쩔수가 없다'가 구원 투수가 될 수 있을까. 박찬욱 감독은 "한국 극장을 살려야 하는 책임을 짊어진 듯 막중한 부담이 느껴진다. 이런 적은 처음"이라 고백했다.
마지막으로 그는 "적어도, 관객 분들께서 보시고 나가실 때 '한국 영화 재미 있네. 다음에 한국 영화 또 봐야지' 하는 마음을 가지고 돌아가실 수 있을 정도만 된다면 너무 좋을 것 같다"고 겸손한 인사를 건넸다.
'어쩔수가 없다'는 오는 24일 개봉한다.
<사진=이호준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