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spatch=정태윤기자] 넷플릭스 '애마'는 비유하자면 뜨거운 아이스아메리카노 같은 이야기다. 성인 영화를 소재로 하지만, 여성 서사를 전면에 내세운다.
성인영화는 본래 여성의 인권과는 거리가 먼 장르였다. 여성을 소비의 대상으로, 때로는 착취의 대상으로 삼아왔기 때문이다. '애마'는 이 역설적인 지점을 정면으로 파고든다.
작품의 배경은 1980년대. 정책적으로 성인 영화가 장려되던 시대다. 동시에 표현의 자유는 철저히 통제되던 때이기도 했다. 이 시대적 모순 속에서 여배우들은 성인영화 출연을 강요받았다.
'애마'는 그들의 목소리를 다시 불러낸다. 이해영 감독은 실제 '애마부인'의 주연 안소영 배우의 다큐멘터리를 보고 시리즈의 구체적인 메시지를 완성했다.
"'정말 외롭고 치열한 싸움이었겠구나, 매번 링 위에서 스파링하는 기분이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를 향한 존경과 응원의 마음으로 엔딩 대사를 완성했어요."
이해영 감독은 왜 '애마'를 완성해야만 했을까. 그의 말을 더 들어보자.
◆ 같은 욕망, 다른 해석
이해영 감독이 '애마'를 처음 떠올린 건, 영화 '천하장사 마돈나'(2006년) 직후였다. '애마부인'이라는 전설적인 영화를 섹스 심볼에 대한 감수성으로 풀어내면 어떨까 하는 막연한 생각에서 출발했다.
그에게 1980년대는 학창시절이었다. 프로야구가 출범하고, 영화계는 해마다 흥행작을 쏟아냈으며, 미군 방송을 통해 화려한 뮤직비디오가 터져나오던 시기였다.
그중 가장 중요한 키워드는 섹스 심볼이었다. 모든 매체가 앞다투어 섹시한 남녀 리스트를 발표했다. 남자 대표는 가수 브루스 스프링스틴. '본 인 더 USA'를 부르며 미국의 성조기처럼 추앙받았다.
여자 대표로는 마돈나가 있었다. 하지만 그의 이미지는 음탕하고, 깨끗하지 않고, 헤픈 이미지로 소비됐다. 이해영 감독은 이 대비에 주목했다.
"남자 섹스 심볼은 전성기를 누렸지만, 마돈나는 목소리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투쟁했습니다. '같은 욕망을 대변하는 존재인데 왜 해석이 달랐을까'. 그 이야기를 해보고 싶었어요."
◆ 이하늬, '애마'의 시작
이해영 감독은 이하늬를 염두에 두고 시놉시스를 썼다. 이하늬가 거절하면 엎을 생각이었다. 대체할 사람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 그도 그럴 것이, '희란'은 복합적인 인물이다.
희란은 노출 연기를 통해 당대 톱스타로 자리매김했다. 국제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까지 수상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배경에는 여성을 소비하는 성인영화가 있었다.
그는 "더 이상 노출 연기를 하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착취 구조 속에서 스타가 됐으면서도, 동시에 그 구조에 저항하는 주체로 나선 것.
이해영은 "희란은 속세에 찌든 물질적인 인물이면서도, 정의감은 있는데, 너무 정의로워도 안 되는 헷갈리는 인물이다. 이하늬가 알아서 해주길 바랐다"며 웃었다.
"저희 작품에서 한땀 한땀 드레스를 만들던 디자이너 '폴고'처럼 아하늬에게 잘 맞게끔, 재미있게 할 수 있게끔 대사를 썼습니다. 이하늬의 A부터 Z까지 사용해 보자는 마음이었죠."
희란과 주애(방효린 분)의 관계는 표면적으로 톱스타와 신인의 자리 싸움처럼 보인다. 왕좌에서 내려온 여배우와 새롭게 떠오르는 신인. 그러나 희란의 속내는 훨씬 깊다.
단순한 질투가 아닌, 자신이 지나온 길을 주애가 반복하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서 나오는 경계다. 이하늬는 그런 희란을 강단 있고 품위 있게, 때로는 서글프게 완성해냈다.
"현장에서 '이 사람이 나를 의지하고 있구나'라는 느낌은 많이 받지만, '나를 온전히 믿고 있구나' 라는 신뢰는 흔치 않습니다. 이하늬는 그런 믿음을 줬어요. 제가 뭘 시켜도 어떻게든 구현해 줄 거라는 확신이 있었죠."
◆ "낮선 얼굴의 발굴, 베테랑의 발견"
강렬한 메시지를 조화롭게 구현한 건 배우들이었다. 단단히 뼈대를 세운 이하늬를 중심으로 낯선 배우들이 굵직한 인상을 남겼다. 먼저 주애를 발굴하기까지 오디션에서 무려 2,500명을 만났다.
이해영은 "신인 배우부터 연기 지망생까지 다 봤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제 마음을 움직이는 배우가 없었다. 마지막에 인우(조현철 분) 앞에 나타난 주애처럼 방효린을 만났다"고 떠올렸다.
방효린은 신인임에도 단번에 존재감을 드러냈다. 당돌한 태도로 주인공에 등극했지만, 현실에 상처받고 좌절했다가 다시 단단하게 성장하는 과정을 섬세하게 표현했다.
이해영은 "방효린은 본능적으로 가지고 있는 감정을 역할에 투영해 자기의 것으로 표현한다"며 "유전자적으로 타고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고 칭찬했다.
반면 이소이는 집요한 학구열로 배역을 따냈다. 신성영화사 대표 구중호(진선규 분)를 이용해 배우가 되고자 하는 '황미나'를 맡았다. 물불 가리지 않는 불같은 성미로 신스틸러 역할을 톡톡히 했다.
이해영 감독은 "이소이는 처음 구상한 미나의 이미지와는 달랐다. 그런데 철저한 분석과 공부로 연기력으로 납득시킨, 똑똑한 배우였다"고 설명했다.
진선규와 조현철은 베테랑의 연기를 펼쳤다. 이해영은 "진선규는 현장에서 디렉션을 줄 필요가 없었다. 연기를 구경하는 재미가 있었다. 계속해서 만족을 시켜줬다"고 말했다.
조현철은 의외로 애드리브를 가장 많이 한 배우였다. "인우가 구중호와 시나리오 검열로 다툴 때 '각하, 대가리가 외설이십니다'라는 대사는 조현철 아이디어였다"고 털어놨다.
"겉보기엔 꼼꼼히 계산해서 연기할 것 같지만, 동물적으로 연기하는 배우였어요. 상대의 연기를 느끼고 리액션하는 과정이 정말 놀라웠습니다."
◆ 주류의 시선에서 벗어난 사람들
이해영 감독은 그간 소수자, 비주류의 인물을 꾸준히 조명해 왔다. 초기작 '천하장사 마돈나'가 대표적이다. 당시 한국 산업 영화로는 드물게 성소수자 서사를 전면에 내세웠다.
'경성학교: 사라진 소녀들'(2015년)에선 일제강점기 소녀들의 억압된 욕망을 그리며 여성의 주체성을 강조했다. '애마'로 다시 한번 주류의 시선에서 벗어난 주인공을 다뤘다.
그는 "어릴 때부터 주류에 속하지 못한 마이너라는 생각을 늘 해왔다. 그에 대한 저항감이 있었던 것 같다. 그것이 지금의 저를 이루고 있는 것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고 털어놨다.
'애마'는 그의 첫 시리즈 연출작이기도 하다. 영화는 밀도를 높이고 정교하게 째임새 있는 이야기를 만들기 위한 여정이었다면, 시리즈는 이야기를 펼치는 재미를 느끼게 해줬다.
그는 "영화는 암산으로 각 신의 조각이 맞춰졌다. 그런데 시리즈는 계산이 안 되더라"며 "처음 시나리오 쓰는 신인 작가처럼 벽에 표를 그려가면서 작업했다"고 전했다.
가장 공을 들인 장면은 마지막 6부다. 희란이 대종상 무대에서 구중호의 성상납 강요와 영화계의 추악한 현실을 폭로한 뒤, 주애와 함께 말을 타고 광화문대로를 질주하는 장면이다.
"1980년대 권위적이고 남성의 상징 같은 곳을 여성 둘이 말을 타고 역주행합니다. 그 장면이 '애마'의 시그니처라고 생각했어요. 남성의 욕망을 자극하던 '애마부인' 속 승마 이미지를 전복하는 순간이죠."
그는 마지막으로 "'(작품의 메시지에) 뜨겁게 반응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완전히 동의하지 못한 분들도 계셨다. 그런 분들도 포용할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도 있다. 다음 작품은 여러가지를 열어놓고 더 좋은 이야기로 돌아오고 싶다"고 바랐다.
<사진제공=넷플릭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