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spatch=이명주기자] “삶은 고통이었지만, 축제였습니다.”
어렵사리 한 걸음, 또 한 걸음 내디뎠다. 내려앉은 척추를 곧추세웠다. 썩어가는 발끝에 힘을 주고 앞으로, 다시 앞으로 나아갔다.
평생 고통 속에 몸부림쳤지만 좌절하지 않았다. 자신의 상처를 캔버스에 옮겼다. 삶을 향한 강인한 의지로 화폭을 수놓았다.
‘고통의 여왕’ 프리다 칼로가 뮤지컬로 다시 찾아왔다. 올해 무대는 공연 예술의 메카 대학로다. ‘디스패치’가 김히어라, 아이키, 이지연, 박시인 페어 첫 공연을 관람했다.
◆ 2년 만에 돌아온, 고통의 여왕
뮤지컬 ‘프리다’는 멕시코 화가 프리다 칼로 일생을 다룬 작품이다. 지난 2022년 초연 이후 2023년 재연, 올해 3번째 시즌 막을 열었다.
관객들의 뜨거운 열기 속에 시작됐다. 평일 낮 회차임에도 1층과 2층 좌석 대부분을 채웠다. 공연 내내 곳곳에서 박수와 함성이 터져 나왔다.
해당 뮤지컬은 토크쇼 형식을 빌렸다. 프리다가 ‘더 라스트 나이트 쇼’(The Last Night Show)에 출연, 자신의 삶을 반추하는 과정을 따라간다.
말 그대로, 다사다난한 여정이다. 그의 47년은 시련의 연속이었다. 6살 무렵, 척추성 소아마비 진단을 받고 9개월 동안 병상을 지켰다.
의사를 꿈꾸는 10대로 자랐으나 끔찍한 사고가 들이닥쳤다. 프리다가 탄 버스와 전동차가 충돌한 것. 이로 인해 척추와 오른쪽 다리, 자궁 등이 크게 다쳤다.
◆ 인생은, 힘들어서 빛나는 것
끔찍한 고통 앞에 죽음의 유혹이 찾아왔다. ‘아픔은 이제 그만. 고통은 그만 안녕’이라고 속삭였다. ‘버텨봤자 좋을 게 없다’며 잘못된 선택을 꼬드겼다.
그럼에도 꿋꿋하게 이겨냈다. “인생은 힘들어서 빛나는 것”이라는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유일하게 움직일 수 있는 오른 손으로 그림을 그렸다.
또 다른 어둠 역시 있었다. 화가 디에고 리베라와의 만남은 육체적 고통보다 더한 정신적 아픔을 줬다. 수많은 여성과의 추문, 급기야 여동생과 불륜으로 프리다를 극한에 몰았다.
3번의 유산도 씻을 수 없는 상처였다.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임신 유지가 어려워진 것. 아이를 간절히 원했던 만큼 좌절감이 컸다.
프리다는 예술의 힘으로 이 모든 괴로움을 이겨냈다. 고통스럽지만 떠날 수 없는 현실을 캔버스 위에 그려냈다. 그렇게, 회화 작품 143점을 남겼다.
◆ 배우 4인이 펼치는 창작극
프리다는 여타 뮤지컬과 다른 개성이 있다. 여자 배우 4명이 처음부터 끝까지 극을 이끌어간다. 앙상블 없이 한 명이 여러 배역을 맡는 식이다.
그만큼 배우들의 역량이 중요하다. 김히어라가 재연에 이어 다시 한번 프리다 역을 소화했다. 김소향, 김지우, 정유지와 쿼드러플 캐스팅됐다.
작은 체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에너지가 대단했다. 처연함과 대담함을 자유자재로 넘나들었다. 각 넘버 클라이맥스에 폭발하는 고음은 온몸에 전율을 일으켰다.
“멋진 인생 따윈 없어도 돼. 화려한 조명도 필요 없어. 하지만 조그만 숨이 남아 있다면”(‘코르셋’ 中)
‘코르셋’ 넘버를 열창하는 장면은 ‘프리다’의 백미 중 하나였다. 하얀색 드레스 대신 코르셋으로 무장했다. “그럴수록 웃겠다”며 코웃음 쳤다. 프리다의 강인한 정신력을 무대 위로 펼쳐 보였다.
◆ 그럼에도, 비바 라 비다
다른 캐스트들도 환상의 하모니를 보여줬다. 아이키가 레플레하 역을, 이지연이 데스티노 역, 박시인이 메모리아 역으로 등장했다.
특히 아이키는 뮤지컬 데뷔작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인상적인 활약을 펼쳤다. 댄서 재능만 있는 게 아니었다. 쇼 연출가와 디에고 리베라를 넘나들며 수준급 가창력을 뽐냈다.
배우들 열연 뿐 아니다. 무대 연출 또한 탁월했다. 무대 한쪽에 코르셋을 연상케 하는 거울이 설치됐다. 거울은 프리다가 스스로를 관찰하며 고통을 극복할 수 있도록 도와준 물건이다.
그가 남긴 그림들을 거울에 비췄다. <프리다와 디에고 리베라>(1931)부터 <비바 라 비다>(1954)까지 프리다의 예술적 투혼을 투영했다.
무엇보다 진한 여운을 주는 작품이다. 고통 속에서도 삶의 의지를 불태운 프리다가 지금, 힘든 당신에게 큰 위로가 될지 모른다.
“내 마지막은 내 핏빛을 닮은 수박에 남길게요. 비바 라 비다.(인생이여, 영원하라)”
<사진=EMK뮤지컬컴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