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spatch=김지호기자] '사랑의 불시착'에는 역사 왜곡 논란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게, '사랑불'의 세계는 완전한 허구다. 적어도, 실존 인물을 떠올릴 만한 설정이 없었다. 

그래서 박지은 작가는, 자신의 장기(멜로)를 유감없이 펼쳤다. 현빈과 손예진을 마음껏 사랑하게 만들 수 있었다. '사랑불'은 남북 판타지 로맨스의 성공 사례로 남았다.

'오월의 청춘'은 5·18을 시대적 배경으로 삼은 드라마다. 이강 작가는 1980년대 봄, 청춘 남녀의 슬픈 사랑을 아름답고 처연하게 묘사했다. 

이 작가는 "역사에 없는 말은 단 한 줄도 적지 말자"는 각오로 대본에 임했다. 현실을 떠올리게 하면서도, 모두가 그 아픔을 공감하게 유도했다. 

유현미 작가는 어떨까. 그는 JTBC '설강화 : 스노우 드롭'(이하 '설강화')을 12년 동안 준비했다. 2008년 탈북자 수기를 읽고 모티브를 땄고, 이화여대 재학 경험담을 녹여냈다. 

실제로 드라마는 많은 것을 담고 있다. 1987년 대선 정국, 북한과 여당의 야합, 간첩 조작, 안기부, 동심회(하나회), 코드1(전두환), 대학가 풍경, 시위를 하는 학생들…

그러면서도, 계속해서 '가상'을 강조했다. 조현탁PD는 "군부정권과 대선정국이라는 상황 외 모든 인물과 설정 기관은 가상"이라며 억울해했다. 

이어 "민주화 운동을 폄훼하고 안기부와 간첩을 미화하는 드라마가 아니다. 남북 대치 회오리 속에 희생되는 청춘 남녀들의 멜로 드라마"라고 해명했다.

하지만 뚜껑을 열어보니, 단순히 '가상'이라고만 치부할 수 없었다. 등장 인물들이 실제 역사 속 인물들, 그것도 국가권력의 피해자들을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남자 주인공 임수호(정해인 분). 그의 본명은 림태산으로, 남파 간첩이다. 천재적인 음악가였던 아버지가 반동분자로 몰린 가정사가 있다.

이후 수호는 공작원이 돼 동독에서 암약하다 지령을 받고 한국으로 건너왔다. 야당 대선주자의 경제 브레인인 한이섭 교수를 포섭해 월북하려 한다. 

(1967년 동백림/동베를린 사건. 당시 중앙정보부는 독일과 프랑스의 유학생 및 교민들 194명이 간첩이라는 주장을 펼쳤다. 단순 접촉 사건을 확대·과장, 박정희 정권 강화에 이용했다.

故 윤이상은 천재 작곡가로, 당시 간첩 지목을 당했다. 독일에서 정보원들에게 납치당해 무기징역형을 선고받았다. 그는 2년 옥살이 후 석방됐지만, 죽을 때까지 고향에 오지 못했다.)

여자 주인공 은영로(지수 분). 원래 이름은 '은영초'였으나 시청자 항의로 변경됐다. 수호를 데모 학생으로 오해하고, 호수여대 기숙사에 숨겨주며 사랑을 키워나간다. 

수호가 안기부를 피해 도망칠 때, 바로 옆에선 여정민(김미수 분)의 시위가 한창이었다. 민주화 운동을 상징하는 '솔아 솔아 푸른 솔아'라는 노래가 삽입됐다. 

정민은 영로의 룸메이트로, 호수여대 사학과 재학생이다. 그는 민주화 운동에 앞장서는 것으로 묘사되지만, 역시 간첩(수호)를 운동권 학생이라 판단하고 돕는다. 

('영초언니' 천영초는 민주화 운동가다. 1970년대 중반, 여성 해방·독재 타도·노동 해방을 주제로 독서모임을 결성했다. 남영동 대공분실에 끌려가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천영초의 남편 故 정문화도 박정희 독재 정권에 맞선 민주화 운동가다. 민청학련 사건으로 간첩 혐의를 받아 모진 고문을 겪었다.

호수여대의 모티브는 이화여대. 이대생들도 독재 타도와 호헌 철폐를 외쳤다. 특히 1987년 6월 항쟁에도 나서, 직선제 개헌을 이끌었다.)

'설강화'의 메시지는 또 어떨까. 집단은 나쁘지만, 그 속에는 착한 개인이 있다는 논리로 구성됐다. 남파 간첩에게도, 안기부 요원에게도, 저마다 사연이 있다는 식이다. 

수호는 한국인을 납치하려는 간첩이지만, 선량하고 매력적이다. 영로의 오빠가 데모를 한다는 말을 듣고 "멋있다"고 할 정도로 민주주의에 호의적이기도 하다.  

이강무(장승조 분)는 간첩에게 동료를 잃고 복수심에 불타는 남자다. 오로지 간첩만을 쫓는다. 그의 전 연인 장한나(정유진 분) 역시 일 잘하는, 매력적인 걸크러쉬 캐릭터다. 

안기부장 은창수(허준호 분)는 동심회의 핵심 멤버다. 대쪽같은 성품을 지녔다. 시를 좋아하고 유순하고 섬세하다. 12.12에 동조하지 않았음에도 코드1의 신뢰를 받는다.

‘설강화’는 드라마의 본질을 강조한다. 가상의 세계라는 것. ‘허구’를 ‘창작’했다고 항변한다. 하지만 그들이 창조한 허구가 (누군가에게) 상처라면, 이는 폭력이다.  

1987년 1월 14일,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사망한 대학생이 있다. 故 박종철 열사다. 그는 "탁 하고 치니 억 하고 죽었다"는 경찰 발표의 대상이자, 고문의 희생자다.

사단법인 '민주열사 박종철기념사업회'에서도 '설강화'에 깊은 우려를 드러냈다. "민주화 운동을 간첩과 연계시키는 건, 당시 피해자들에 대한 또 다른 가해"라고 지적했다. 

"군부 독재 시절 많은 피해자들이 간첩 조작 사건으로 폭력과 고문을 당했다. 드라마 속 진짜 간첩을 쫓는 안기부, 간첩을 운동권인 줄 알고 숨겨주는 여대생 자체가 그들의 주장에 합리성과 당위성을 부여하는 것이다." (박종철기념사업회) 

대중의 역사 왜곡 우려에 항상 따라오는 반박이 있다. 드라마는 드라마로 봐달라는 것. 조현탁PD 역시 "지나친 검열이 창작자를 위축시킨다"고 호소했다. 

하지만, (허구를 다룬다면) 그 허구의 표현에 집중해야 했다. 현실을 떠올리게 만드는 설정들을 교묘하게 짬뽕해두고, "가상이니 괜찮다"고 항변하는 건 아이러니다.

유현미 작가와 조현탁PD의 대처도 안일했다. 방송 전 시놉시스 유출로 예견된 참사였지만, (여주인공 이름 외엔) 달라진 점이 눈에 띄지 않는다.

뚝심있게 북한 간첩과 남한 여대생의 로맨스를 그렸고, 그 매개체로 민주화 운동을 이용했다. 이 위험하고 부적절한 조합은 결국, 역사 왜곡이자 또 다른 가해로 남게 됐다.

<사진출처=JTB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