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spatch=박혜진기자] '답습하지 않는 것.'
박해일이 스스로에게 내린 과제다. 그가 영화 '암살자(들)'로 4년 만에 스크린에 복귀했다. 허진호 감독과는 '덕혜옹주' 이후 10년 만의 재회다.
반가움도 잠시, 그는 곧장 고민에 빠졌다. 그도 그럴 게, 허 감독과는 이미 한번 모든 걸 던졌던 사이. 또 새로운 무언가를 꺼내야만 했다.
"반가움과 동시에 부담이 있었어요. 무언가를 긁어내서 새로움을 보여주고 싶었고, 보여줘야 하는 책임감이 생겼죠."(박해일)
그는, 그 답을 '속도'에서 찾았다. 박해일은 그동안 감정을 터뜨리는 대신 안으로 삼키는 연기를 선보여왔다. 그게 박해일의 강점이기도 했다.
이번엔 영부인 저격 사건의 증거를 좇아 뛰고, 검열 앞에 나서고, 질문을 멈추지 않는다. 타격감과 속도감 있는 연기를 펼쳤다. 절제가 무기였다면, 이번엔 속도가 무기였다.
◆ "왜 이 역할을 못 해봤지?"
'암살자(들)'은 1974년 8월 15일, 제29회 광복절 경축식에서 일어난 영부인 저격 사건의 의혹과 배후를 추적하는 이야기다. 6발의 총성, 사라진 2발의 행방을 쫓는다.
허진호 감독은 시나리오 각색 단계부터 박해일을 기자 역으로 염두에 뒀다. 박해일 역시 "시나리오를 읽어보니 '아, 이 작품을 하려고 4년을 기다렸나?'라는 기분이 들 정도로 호기심이 갔다"고 밝혔다.
그가 작품에 매료된 이유는, 캐릭터의 직업이다. "26년 동안 작품을 할 때마다 꼭 거치는 게 기자분들"이라며 ""'긴 호흡으로 이 직종을 겪어봐야 했는데, 왜 이 역할을 못 해봤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역할은 무조건 잘 해보고 싶었다"고 전했다.
박해일은 70년대 신문사 사회부 부장 재환을 맡았다. 모두가 사건을 결론지으려 할 때, 사건의 이면을 파고드는 인물이다. 예리하고 집요한 취재로 진실의 실체에 다가간다.
70년대 언론을 관객에게 얼마나 설득력 있게 전달하느냐가 과제였다. 박해일은 시대를 따로 구분 짓지 않았다. 그때의 기자든 지금의 기자든, 직업이 가진 가장 보편적인 부분에 집중하기로 했다.
"시대적 공기를 온몸으로 느끼려고 했어요. 제게는 작품이 내비게이션이었죠. 재환은 (언론사라는) 공간으로 시작해서, 그 공간에서 폭발하는 역할이잖아요. 그래서 신문사 공간에서 가장 자연스럽기 위해 노력했어요."
◆ 속도감과 타격감
박해일이 기억하는 허진호 감독의 영화는 천천히 흐른다. '8월의 크리스마스'부터 '덕혜옹주'까지. 인물의 정서를 오래 들여다보는 쪽이라는 것.
"한 감독님과 두 작품을 한다는 건 반가운 일이긴 하지만, 그만큼 제가 가진 모든 걸 (이미) 다 던졌는데 또 무언가를 긁어내서 새로움을 보여줘야 되는 책임감이 동시에 생겼어요."
10년 전과는 다른 리듬이 필요했다. 박해일은 "답습하지 않는 것이 숙제였다"고 말했다. 그가 찾은 해답은, 속도감이었다.
"감독님의 리듬감이 진화하고 계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럼 이번에는 좀 더 속도감을 가져가는 연기를 보여드리자고 생각했죠. 감독님도 그 속도감을 같이 느껴주셨어요."
그렇게 캐릭터의 한 부분씩을 설계해 나갔다. 교조적인 톤은 경계했다. 대신 팀과의 수평을 중요시했다. "책상 하나에 모여 각자 취재한 걸 얘기하면서 퍼즐을 맞춰 나가는 작업이 흥미로웠다. 수평적으로 가야겠다는 게 중요했다"고 설명했다.
동료들과 하나의 톱니바퀴처럼 굴러가야 했다."영화는 한 사건이 터지면서 이야기가 쭉 달려 나가는 구조다. 팀원들과 속도감과 타격감을 내며 맞물려 찍고 싶었다"고 부연했다.
◆ 날 것의 온도
영화의 절정은 자유언론실천선언 장면이다. 재환이 지금까지 억눌러왔던 분노와 신념을 터뜨리는 순간. 억압의 실태 앞에서도 언론의 자유를 외쳤다. 얼굴이 밟히고, 피가 터져도 진실을 놓지 않았다.
육체적으로도, 심적으로 엄청난 에너지가 필요했다. "시나리오를 받았을 때부터 '이 장면은 전사들을 차곡차곡 쌓아 놓다가 배우로서 설득력 있게 전달해 줘야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만큼, 톤 조절에 실패하면 부담으로 다가올 수도 있는 장면. "잘못하다가는 관객분들한테 부담을 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감독님과 톤 조절을 해 나갔다"고 설명했다.
현장 온도는 상상 이상이었다. "수십 명의 언론인이 연대하는 장면이다. 연설문을 외칠 때, 유리문을 상대들이 치고 들어오는 상황이었다. 보조출연자, 단역 배우들까지 똑같은 온도로 준비해 주고 계셨다"고 떠올렸다.
모두가 하나가 된 듯한 힘을 받았다. "재환이 선언문을 읽을 수 있도록 모두가 단결되어있다는 힘이 느껴졌다. 그 배려로 (연기에) 도움을 많이 받았다"고 공을 돌렸다.
"지금까지 못 보던 상황의 온도였죠. 상황을 그대로 느끼면서 읽어보기로 했어요. 자세히 보시면 제가 말도 씹고, 한두 단어를 흘려 말해요. 정신없는 상황의 흐름대로 맡겨본 거죠. 감독님께서 '날 것'이 표현됐다고 말씀해 주셨어요."
◆ 연대의 힘
'암살자(들)'에는 수많은 배우가 등장한다. 정우성, 오달수, 박정민, 배성우, 엄지원, 엄태웅, 심은경, 박해준, 박지환, 오정세, 김대명, 신현빈, 류혜영, 박성훈 등이 힘을 보탰다.
박해일은 이 수많은 인물과의 관계성을 고려했다. 관계마다 완급 조절을 달리했다. 취재팀 만섭(김대명 분)과 윤희(류혜영 분)와의 호흡은 그가 공들인 지점이다.
"작은 테이크 하나까지, 잘 해내고 싶었어요. 선후배 기자들부터, 검열 담당자까지, 다양한 직종이 만들어내는 장면을 잘 보여드리고 싶은 욕망이 생겼죠. 하나의 기사가 나오기까지 모두가 유기적으로 맞물려야 하는 관계였어요."
형사 철구(유해진 분), 막내 기자 영일(이민호 분)과의 시너지도 이 영화의 관전 요소다. 영화는 사건의 파편들을 파헤치는 형사와 기자의 시선으로 전개되기 때문.
박해일은 "유해진 선배님은 지금 한국 영화에서 가장 활약이 두드러지신다. 직속 후배로서 앞서가시는 선배님들의 뒷모습과 발자취를 계속 보고 싶다"고 바랐다.
이민호에 대해서는 "남성적이면서 소년의 느낌도 동시에 있었다. 민호 씨가 본인의 최대치를 다 던져서 좋은 결과물의 연기를 했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고 칭찬했다.
특히 정우성(한상일 역)과의 만남은 오래 고대했다. "영화의 아이콘이라는 생각을 해왔다. 그분의 연기를 보면서 살아오기도 했다. 중요한 장면이기도 했고, 반가운 마음으로 밤새 찍었다"고 웃었다.
◆ 물음표를 던지는 영화
'암살자(들)'은 사건의 배후를 단정 짓지 않는다. 박해일은 "(진실에 대한) 질문을 오히려 관객분들께 물음표로 전해드리고 싶다"고 말했다.
"그날을 생중계로 목격하셨던 분들, 이 사건을 모르셨던 분들 등 다양하겠죠. 이 사건을 알아보시는 계기가 될 수도 있겠고요. 스릴러 장르로서 만족하셔도 되고요. 그게 이 영화를 만든 본질인 것 같습니다."
박해일은 "저희 영화는 정말 다양한 배우들이 나오는 게 어필 포인트"라며 "전 세대가 즐길 수 있고, 추적 스릴러 장르의 호흡과 리듬에 함께 참여해서 영화를 따라가 보시는 것도 재밌으실 것"이라고 자신했다.
차기작에도 속도를 낼 계획이다. 박해일은 이준익 감독의 신작 '반딧불이' 촬영을 앞두고 있다. 독재 치하의 1974년과 한국 전쟁이 발발한 직후인 1950년을 오가며 사건을 쫓는 이야기다.
박해일은 "한 작품에 죄다 끌어 쓰는 편이라 다음 작품까지 준비해야하는 시간이 필요한 배우였다"며 "이젠 생각이 바뀌었다. 더 기운 내서 여러 작품에 다가가 보려 한다"고 말했다.
"제가 좀 느린 편인데요. 이제 조금 달려볼까 합니다. 주어진 영화를 제대로, 연달아서 쉬지 않고 해보자는 목표를 맞춰가고 있어요. 속도를 내보겠습니다.(웃음)"
<사진출처=(주)하이브미디어코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