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spatch=정태윤기자] (※ 이 글에는 영화 '더 드라마'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첫눈에 반한다. 우연을 가장해 다시 만난다. 사랑에 빠진다. 결혼을 준비한다. 로맨스 영화에서 수없이 봐온 장면들이다.
'더 드라마'(감독 크리스토퍼 보글리)도 처음에는 그 익숙한 문법을 그대로 따라가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이상하다. 예상했던 방향으로 흘러가는가 싶으면, 갑자기 허를 찌른다. 상황을 이해하고 나면 웃기고, 웃으려는 순간에는 또 다른 황당함이 튀어나온다.
'더 드라마'의 진짜 재미는 타이밍에 있다. 영화가 보여주는 건 사실 아주 원초적인 웃음이다. 사랑에 빠지고, 의심하고, 비밀을 들키고, 싸운다.
그런데 영화는 그 원초적인 감정을 촌스럽게 소비하지 않는다. 오히려 끝까지 진지한 얼굴로 밀어붙인다. 그래서 웃음이 더 커진다.
찰리(로버트 패틴슨 분)가 카페에서 엠마(젠데이아 분)를 보고 첫 눈에 반하는 장면만 해도 그렇다. 찰리는 엠마에게 말을 걸기 위해 그가 읽고 있던 책을 핑계 삼는다.
보통의 로맨스라면, 거짓말도 사랑의 양분이 된다. 책을 부랴부랴 읽어오고, 공통의 관심사를 만들고, 그 작은 거짓말은 둘을 가까워지게 한다.
하지만 '더 드라마'는 그 당연한 다음 수를 두지 않는다. 찰리는 책을 읽지 않고, 거짓말은 그냥 거짓말로 남는다.
이 영화는 계속 이런 식이다. 로맨스의 클리셰를 버리지 않는다. 대신 마지막 한 끗을 틀어버린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점점 과감해진다.
엠마에게는 과거 총기 난사를 계획했던 비밀이 있다. 찰리는 그 사실을 알고 난 뒤 그를 이전과 같은 눈으로 바라볼 수 없게 된다.
영화는 그 무거움을 정색하고 풀지 않는다. 결혼식 샘플 사진을 찍는 순간 플래시가 터지고, 다정히 껴안은 두 사람 모습 위로 총기를 든 엠마의 이미지가 겹친다.
가장 로맨틱해야 할 순간에 가장 끔찍한 상상을 끼워넣는다. 이게 '더 드라마' 식 블랙코미디다. 웃기려고 농담을 던지는 게 아니다. 상황 자체가 너무 황당해서 웃음이 나온다.
영화는 여기서 한 번 더 뒤통수를 때린다. 찰리가 엠마의 위험성을 걱정하는 사이, 정작 결정적인 사고를 치는 건 찰리다.
그 순간 관객은 잠깐 멈춘다. 총기 난사를 계획했던 예비 신부의 사상을 의심하던 남자가 황당한 사고를 친다. 이제 누가 누구를 나무랄 처지가 아니다.
결혼식은 사랑의 결실이 아니라, 각자의 비밀을 들킬까 전전긍긍하는 시간이 된다. 엠마는 자신의 과거를 알고 있는 친구 때문에, 찰리는 자신의 충격적인 실수 때문에 불안하다.
모두가 행복해야 할 결혼식에서 정작 신랑과 신부는 서로 다른 이유로 식은땀을 흘린다.
여기서 '더 드라마'의 블랙코미디가 빛난다. 배우들은 진지하다. 상황도 진지하다. 감정도 진짜다. 그래서 더 웃기다.
로버트 패틴슨은 찰리의 찌질함에 방점을 찍는다. 첫눈에 반한 여자 앞에서 횡설수설하는 순간부터, 엠마의 과거를 알고 혼자 의심을 키워가는 과정까지.
과장된 코미디로 만들지 않는다. 어딘가 모자라고 불안하고, 때로는 구차하기까지 한 남자를 진지하게 연기한다.
젠데이아가 술에 취해 비밀을 털어놓는 장면도 인상적이다. 말의 속도와 호흡, 초점이 흐려지는 눈빛까지.
취한 사람을 연기한다기보다 정말 취해버린 사람처럼 보인다. 그래서 웃음과 동시에 묘한 긴장감이 생긴다.
어쩌면 시트콤 '프렌즈'에서 느꼈던 원초적인 웃음과 비슷하다. 당장이라도 장면 뒤에 방청객의 웃음소리가 깔릴 것 같다.
인물들은 자신에게 벌어진 일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배우들도 끝까지 정색한다. 그래서 웃음이 촌스럽거나 노골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영화의 마지막도 같은 방식으로 기억에 남는다. 결혼식은 결국 파국으로 끝난다.
찰리는 직장 동료의 남자친구에게 얻어맞아 얼굴이 엉망이 되고, 평소 가던 햄버거집에 혼자 앉아 햄버거를 먹는다.
행복해야 할 결혼식 날 밤, 아무것도 남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그때 웨딩드레스에 오렌지색 패딩을 걸친 엠마가 들어온다.
엠마는 찰리에게 처음 만난 사람처럼 손을 내민다. 이미 서로의 비밀을 알아버렸고, 결혼식까지 엉망이 됐다.
그런데도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자는 듯 손을 내민다. 가장 돌이킬 수 없는 순간에, 가장 로맨스 영화다운 선택을 했다.
이 역시 '더 드라마'답다.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익숙한 로맨스의 장면을 가져와 마지막 한 끗을 비틀었다.
이 영화가 정확히 무엇을 말하려는지는 선명하지 않다. 사랑에 대한 이야기인지, 관계에 대한 이야기인지, 서로의 과거를 받아들이는 일에 대한 이야기인지. 명확하게 규정하기도 어렵다.
그런데 이상하게 장면들이 오래 남는다. 첫눈에 반한 남자의 횡설수설, 총을 든 엠마와 함께 찍는 웨딩 사진, 각자의 비밀 때문에 망가져가는 결혼식, 얻어맞은 얼굴로 먹는 햄버거, 그리고 다시 내미는 손.
한참 뒤에도 장면을 떠올리면 피식 웃게 된다. 그것만으로도 꽤 근사한 로맨스 아닐까.
'더 드라마'는 다음 달 9일 극장에서 개봉한다.
"엉망진창이 the 로맨틱하다 ★★★☆"
<사진제공=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워터홀컴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