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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움은, 배우의 숙제" 이정은, '엄마'의 질문 (경주기행)

[Dispatch=정태윤기자] "두려움 속에서 꾸역꾸역 갔죠." (이하 이정은)

배우 이정은에게 영화 '경주기행'(감독 김미조)은 처음부터 쉬운 작품이 아니었다. 딸을 잃은 엄마가 범인을 직접 처단하기 위해 나서는 이야기.

그 끝에는 용서가 아닌 복수가 놓여 있다. 배우로서도, 한 사람으로서도 쉽게 다가가기 어려운 감정이었다.

좋은 시나리오라는 확신과 동시에, 극단까지 가야 하는 인물을 제대로 이해하고 표현할 수 있을까. 고민이 컸다.

"내가 할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이 컸습니다. 그럼에도 안 가본 일이니까 가봐야 된다고 생각했어요. 다른 면을 보여줘야 하는 게 배우의 숙제니까요."

디스패치가 최근 이정은을 만났다. 평범한 엄마가 복수에 잠식되기까지. 그가 두려움 속에서 한걸음씩 내디딘 과정을 들었다.

◆ 천천히 쌓아올린 감정

'경주기행'은 막내딸을 잃은 가족이 8년 만에 가해자를 찾아 복수에 나서는 이야기를 그린다. 네 모녀는 여행을 가장해 딸을 잃은 경주로 향한다.

이정은이 네 딸의 엄마 '옥실'을 연기했다. 옥실은 딸을 잃은 뒤 8년 동안 멈춰버린 사람이다. 가족을 지키기 위해 감정을 억누르고 살아왔지만, 그 과정에서 오히려 가족의 삶까지 멈췄다.

옥실은 집에서 옷을 수선하며 경제권을 쥐고 있는 사람이다. 그래서 이정은은 옥실을 쉽게 무너뜨리지 않았다. 가족의 울타리를 유지해야 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는 "옥실이 가족의 붕괴를 책임지고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남편보다 감정을 절제하고, 딸들의 작은 일탈에도 예민하게 반응하는 인물로 접근했다"고 설명했다.

옥실의 행동을 단순한 모성애로 설명하지 않았다. 불안에서 출발했다. "내가 없을 때 아이가 죽고, 남편도 그렇게 됐다. 그러니 이 가족이 얼마나 폐쇄적으로 똘똘 뭉쳤겠냐"고 말했다.

"경찰이 '이 가족은 생활 반경이 없다'고 한 말도 힌트가 됐습니다. 옥실의 입장에선 가족을 한번도 분리해본 적 없으니까 복수도 같이 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겠죠."

후반부의 광기

초반의 옥실은 닳고 지친 얼굴이었다면, 후반부의 옥실은 달랐다. 차 트렁크에 매달리고, 범인 백상현(변요한 분)을 묶은 채 산으로 끌고 올라간다.

이정은은 "무술 감독님이 많이 도와주셨다. 화려한 액션보다 아줌마의 액션이었다. 머리채를 잡고 싸우는 식으로 온몸을 썼다"고 설명했다.

백상현과 단둘이 마주하는 장면은 딸들의 촬영을 마치고 마지막에 찍었다. 이정은은 "새벽부터 산에 올라서 격한 몸싸움도 해야 했기에 체력적으로도 쉽지 않았다"고 털어놨다.

옥실은 그 장면 끝에서 범인을 내려친다. 하지만 이정은은 이 결말을 사적 제재의 카타르시스로 해석하지 않는다.

"이 영화는 단언코 사적 제재를 권장하거나 미덕으로 말하는 영화가 아니에요. 그 엄마도 벌을 받고, 죽은 사람은 절대 다시 만날 수 없잖아요. 그걸 해결됐다고 볼 수도 없는 거죠."

'경주기행'의 핵심은 복수를 좇는 과정에서 가족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상실을 마주하는 데 있다. 이정은은 "여정 속에 숨겨놓은 층위들이 드러나는 게 이 영화의 장점"이라고 강조했다.

경주의 엄마가 되는 법

이정은은 실제로 미혼이다. 딸을 키워본 경험도 없다. 그런 그가 가장 오래 고민한 관계 중 하나가 막내딸 경주(황현정 분)였다.

이정은은 "황현정 배우가 리딩 날 '자기는 이렇게 자랐다'며 어린 시절 사진을 쭉 뽑아서 건네주더라. 전사를 알아서 관계에 도움이 될 수 있게 신경 써준 게 너무 고마웠다"고 말했다.

직접 황현정의 집도 찾아갔다. 그곳에서 실제 모녀의 모습을 지켜봤다. 그는 "어머니가 저랑 비슷하게 생기셨더라. 현정이가 엄마와 어떻게 지내는지 보면서 힌트를 많이 얻었다"고 전했다.

이어 "애교를 많이 부리는 딸이더라. 현정이의 그 모습에 맞춰서 경주를 대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온도가 옥실과 경주의 참고점이 됐다"고 설명했다.

영화의 마지막은 이별로 이어진다. 8년 동안 붙잡고 있던 딸을 (마음에서) 떠나보내는 순간. 이정은은 "실제 모녀의 모습을 보면서 배운 것들 덕분에 경주와의 장면이 오히려 어렵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거기에 도달했는지는…."

이정은은 '경주기행'을 4번 봤다. 후시 녹음 전 음악도 완성되지 않은 상태에서 한 번, 하와이 영화제에서 한 번, 그리고 언론시사에서 2번.

그는 "김미조 감독의 첫 상업 영화인데 완성된 걸 보고 너무 놀랐다. 후반 작업에 공을 들인 만큼 성과가 보이더라"고 말했다.

그런데 4번을 보고도 마음이 완전히 놓이지 않은 장면이 있다. 옥실이 백상현과 마주하고 "내가 너를 용서하게 될까봐 무서웠다"고 말하는 장면.

이정은은 "감독이 말하고자 했던 순간과 일치할까. 관객이 공감할 수 있을까. 내가 잘 도달했나. 아직도 의구심이 있다. 영화의 개봉과 상관 없이 조금 더 생각해봐야 하는 상태"라고 털어놨다.

"거기에 도달하려고 노력한 것도 좋은 경험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간극을 어떻게 메꿔갈지 보게 되니까요. 다 성장의 과정이라고 생각해요."

엄마라는 얼굴

이정은은 유독 엄마 역할을 자주 맡았다. 때로는 가족을 위해 희생하고, 때로는 자식에게 잔소리를 쏟아내고, 때로는 자식과 티격태격하는 유쾌한 엄마였다.

이번에는 그 얼굴을 가장 극단까지 밀어붙였다. 가족을 지키려던 마음이 어느 순간 집착이 되고, 사랑은 복수심으로 변한 모습을 밀도 높게 그려냈다.

이정은이 엄마를 연기하며 관심을 두는 것은 '엄마답게 보이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한 세대의 엄마가 가진 생각과 사랑의 방식이 다음 세대로 어떻게 이어지는지를 들여다본다.

"우리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넘어가지 않는 숙제를 잘 해결해보자는 측면에서 접근합니다. '옛날 엄마는 이런 생각을 했구나. 나는 이 시대 어떤 어른으로, 어떤 생각으로 살아가야 할까. 고민하게 되고요."

그래서 그에게 엄마는, 경험으로만 완성되는 역할이 아니다. 관찰하고, 질문하고, 이해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사람에 가깝다.

이정은이 '경주기행'을 통해 끝까지 들여다본 것도 그 지점이었다. 복수를 해야만 행복해질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마다 상처를 견디고 다시 살아가는 방식이 다르다는 것.

"영화라는 매체가 사회적 인식을 바꾸는 역할도 크지만, 소재거리로 끝날 수도 있잖아요. '경주기행'은 거기에 그치지 않고, 공감의 눈으로 볼 수 있는 영화가 됐으면 좋겠어요. 진심이 닿으면 전달 될 거라고 믿습니다."

<사진제공=롯데엔터테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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