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spatch=김지호기자] ※ 이 글에는 영화 '호프'의 일부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우리는 희망(Hope)의 신화적 원형을 안다. 판도라가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항아리를 열자, 세상으로 모든 불행이 퍼진다. 그 안에 끈덕지게 남은 그 하나가 바로 희망이다.
희망은 원래 재앙과 절망이 강렬해질수록 존재감이 커진다. 다시 말해 불행이란 전제가 없다면, 희망도 존재할 수 없다. 불행과 희망의 찐득한 공존, 이는 나홍진 감독이 설계한 '호프'의 정직한 테마다.
전반부 1시간, 호포항에 정체 모를 재앙이 펼쳐진다. 범석(황정민 분)은 이 재앙에 무지하며, 두려움에 떤다. 그가 쏘는 총은 무력하며, 오히려 재앙(친구 살해)을 추가할 뿐이다. 범석은 주인공이라기엔 나약하며, 선악이 불분명하다.
관객이 슬슬 이 주인공에 의문을 품을 때쯤, 나홍진 감독은 재앙의 시발점을 공개한다. 별로 중요해 보이지 않는 인물, 양배(음문석 분)가 바로 판도라였다. 그의 소소한 오타쿠적 수집 행위가 문제였다는 것.
그에겐 귀엽게 생긴 아기 외계인이든 박제용 짐승이든 마당에 전시해둔 여자 마네킨이든, 하등 다를 게 없다. 다만, 이번 전리품은 좀 비싸서 아쉬울 따름이다.

또, 호포항 주민들과 외계인들의 박진감 넘치는 전투에 놀라긴 이르다. 이 전쟁에서 언뜻 위대한 승리를 거두는 것처럼 보이는 히어로 성기(조인성 분)가, 한 순간에 허무하게 사라졌기 때문이다.
심지어 나홍진 감독은 어마어마한 존재감을 선보인 성기의 퇴장을, 양배에게 맡겼다. 양배가 고양이를 피한다며 핸들을 살짝 틀어버리는 것만으로 성기를 없애 버렸다.
사실, 우리는 양배가 진짜 고양이를 봤는지 여부도 알 수 없다. 나홍진 감독이 의도적으로 감췄기 때문이다. 게다가, 나 감독은 한 번의 뒤통수를 더 친다. 마지막의 마지막, 성기가 아무렇지도 않게 부활한다.
엔딩도 완전한 파격이다. 외계인들의 언어가 번역돼 자막으로 뜨는 순간, 거대한 주객전도가 완성된다. 영화 초반의 기괴한 공포물이 크리처물이 됐다면, '아바타' 스러운 SF 영화의 프롤로그로 마무리된다.
인간들의 표현대로 "X같은 냄새가 나던" 외계인들은 알고보니 진짜 주인공들이었다. 그들은 절망과 희망을 반복하는 비극적 운명을 지닌 주체가 됐다. 이제 우리는 이 가련한 외계인들로 포커스를 옮겨야 하는데, 허무하게도 영화가 끝난다.
반대로 호포항 주민들은 야만적인 안타고니스트로 전락한다. 그렇다면 관객들은 150분 동안, 주인공이 아닌 조연(심하게는 엑스트라)들의 이야기에 열을 올렸던 걸까?

'호프'가 매력적인 이유는, 끊임없이 펼쳐지는 주객의 전도에 있다. 중요해 보이던 가치는 무의미해지고, 전혀 중요해 보이지 않았던 사소한 것들이 충격을 가져온다.
"지금 그게 중요해?"라는 영화 속 물음처럼, '호프'는 관객들이 붙들고 있는 모든 중요성들을 끊임없이 뒤흔든다. 재앙, 희망, 중요함, 무의미함이 반복되는 이 모든 과정이 그렇다. 나홍진 감독은 이것들을 그저 운명의 장난으로 퉁친다.
그러고 보면, 나홍진 감독은 '곡성'과 '랑종'(기획 및 제작)에서도 코즈믹 호러에 가까운 공포를 보여줬다. 압도적인 파워를 가진 정체모를 존재와 맞서는 인간을 다뤘다. '호프'에선 외계인이 절대적인 힘의 자리를 차지할 뿐이다.
다만 여기에서 나홍진 감독은 한 단계 더 나아간다. '랑종'의 인간들이 악령 앞에 무기력하게 굴복했다면, '호프'의 인간들은 대등하게 싸우며 외계인들을 죽이기까지 한다.
그렇다고 외계인들이 무력하게 당하냐 하면, 그렇지만도 않다. 이들 역시 인간처럼 당하다가, 추격하다가, 다시 절망하다, 희망을 갖는다. 운명을 바꿀 행동까지 예고한다. 인간과 동시에 '희망'이라는 주제를 공유하며 대립한다.

어쩌면, 나홍진 감독의 고뇌는 엔딩 속 범석의 대사에 있는지도 모른다.
성애 : 제 계획이 마음에 안 드세요?
범석 : 나도 잘 모르겠어. 머릿속이 도대체 정리가 안 돼. 그냥.. 마음이! 마음이 C8! 이상해서 그래.
범석의 허망함은 이 거대한 미끼를 물고 극장을 나오는 관객들이 겪는 경험 그 자체다. 실제로 156분의 뒤통수를 맞고 난 관객들은 기묘하고 이상한 마음으로 극장을 나와야 하니까.
마지막으로, '호프'의 희망과 절망은 관객들의 후기로 완성된다. 나홍진 감독의 파격 실험을 기꺼이 즐겼다면, '홒친자' 라인에 합류하면 된다. 그러나 개연성과 당위성에만 집중했다면, '극불호'로 별점 테러를 할 지 모른다.
그러나 호불호를 넘어, 모든 관객들이 스스로에게 묻는 질문은 공통될 터다. 머릿속이 정리되지 않은 채 마음이 이상해졌다면, "내가 도대체 뭘 본 거야?"를 외쳐야 하는 것. '호프'가 시쳇말로 까와 빠를 미치게 만든 이유다.

<사진출처=포지드필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