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spatch=정태윤기자] AI와 가장 멀리 있을 것 같은 감독이, 휴머노이드를 소재로 한 영화로 돌아왔다. 그는 신작 '상자 속의 양' 각본을 챗GPT에게 내밀어봤다.
"챗GPT는 굉장히 정석적인 답을 말해줬지만, 저에게는 재미없는 충고로 다가왔습니다. 때론 실패도, 일그러진 부분도 있는 것이 영화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고레에다 감독은 정답 대신 다른 것을 택했다. 틀릴 수도 있고, 돌아갈 수도 있고, 때로는 비틀린 선택들. AI가 쓰지 못하는 이야기를 휴머노이드를 통해 풀어냈다.
'디스패치'가 최근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을 만났다. '상자 속의 양'에 품은 질문들을 들었다.

◆ "죽은 사람이 돌아온다면"
'상자 속의 양'은 사고로 아이를 잃은 부부의 이야기다. 집에 죽은 아이를 닮은 휴머노이드가 들어온다. 죽은 아이와 똑같이 생긴 휴머노이드와 가족이 되는 과정을 그린다.
고레에다 감독이 직접 집필한 오리지널 각본으로는 '어느 가족' 이후 8년 만이다. 죽은 사람을 생성형 AI로 재현하는 서비스가 확산되고 있다는 기사를 보고 스토리를 떠올렸다.
여기에 그의 사적인 경험도 더해졌다. 그는 "개인적인 일이지만, 아버지가 어느 날 갑자기 돌아가셨다"며 "제 눈 앞에 다시 나타난다면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그게 계속 생각나더라"고 말했다.
"(과학이 아무리 발달한다고 해도) 내가 좋자고 죽은 사람을 살려낼 순 없죠. 하지만 '지금 내 곁에 있었으면' 하는 감정은 누구에게나 있잖아요. 그 보편적인 감정에서 출발해 이야기를 풀어내려 했습니다."

◆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건"
그가 영화를 만들며 한 2번째 질문은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게 무엇일까"였다. 그 물음은 "인간이 마지막으로 지니게 된 인간다움은 무엇일까"로 이어졌다.
"과정을 즐기는 것이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또 하나는 상상력입니다. 영화 속에서 올리브 나무를 보며 아이를 겹쳐 떠올리듯 말이죠. 그런 이야기를 영화로 풀어내고 싶었습니다."
그는 질문의 답을 챗GPT를 통해 확인했다. "평소에 생성형 AI는 전혀 안 쓴다. 그런데 프로듀서가 '이런 영화를 만드는데 안 써보는 건 이상하지 않냐'며 해보라고 하더라"고 전했다.
고레에다 감독은 챗GPT에게 각본을 전달해 피드백을 받았다. AI는 "엄마의 인물상을 더 깊게 파고들면 아이의 고뇌가 살아날 것"이라는 정석적인 대답을 내놨다.
그는 정답같은 답변에서 오히려 허전함을 느꼈다.
"그렇게 쓰면 옳은 각본은 되겠지만, 모두 각본이 같아질 것 같았습니다. 영화 속의 관계도 실패하고 일그러지기도 해야 되는데, 그런 부분은 없더군요. 앞으로도 인간들의 힘을 결집시켜서 영화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죠. 챗GPT와의 인연은 끝내려 합니다. 하하"

◆ 7살 휴머노이드
그가 휴머노이드 이야기를 꺼낸다는 건 의외의 선택이었다. 그러나 그 중심에 아이를 놓는다는 건, 고레에다다웠다. 그는 연기 경험이 많지 않은 아이들에게서 매번 놀라운 장면을 이끌어내 왔다.
휴머노이드 '카케루' 역의 쿠와키 리무도 마찬가지였다. 카케루는 인간과 닮았지만 완전하지 않은 존재다. 너무 인간적이어도, 너무 기계적이어도 안 되는 인물이다.
고레에다 감독은 2016년생인 쿠와키 리무를 어떻게 디렉팅 했을까. 그는 "아이는 기다려주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절대 재촉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집중력이 있을 땐 정말 좋은 연기를 보여줘요. 하지만 찍고 있는데 갑자기 자버릴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땐 카케루처럼 '리무는 충전 중'이라고 이야기를 했죠. 아이를 기다릴 수 있는 환경이 가장 중요해요."
연기도 배우에게 맡겼다. 쿠와키 리무는 "감독님은 휴머노이드에 대해 설명해주시곤, 그냥 '너답게 해'라고 말씀해주셨다. 그냥 해보자는 마음으로 연기했는데, 그 과정에서 캐릭터를 이해하게 된 것 같다"고 털어놨다.

◆ 보이지 않는 것
영화의 마지막, 카케루는 부모의 곁을 떠난다. 남겨진 건 부부뿐이다. 고레에다 감독은 "눈앞에 있지만, 없어'가 영화의 전반부 감각이다. 후반부는 '눈앞에 없지만 있어'로 뒤집힌다"고 설명했다.
휴머노이드들은 숲속에 자신들만의 새로운 집을 만든다. 고레에다는 그 장면 안에 하나의 미래를 담았다. 숲과, 인간, 그리고 휴머노이드. 이질적인 것들이 공생하며 모여있는 공간이었다.
"부부는 그곳에 머물지 않고 떠나게 돼요. 삶의 방식이 다르기 때문이죠. 아이가 성장하면서 부모를 뛰어넘어 더 큰 존재가 되는 것처럼, AI가 인간을 넘어섰을 때를 겹쳐서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오토네(아야세 하루카 분)와 켄스케(다이고 분) 부부의 앞날은 어떻게 보면 쓸쓸하다. 그들이 들어갈 수 없는 숲이 점점 커지는 세계. 그 나무는 아름다운 동시에 위협이다.
그럼에도 영화는 절망으로 끝나지 않는다. 카케루가 사라진 그 자리에서 부부는 그를 상상한다. 카케루를 생각하며 심은 올리브 나무를 보면서.
고레에다 감독은 "누군가가 제 영화에는 죽은 사람의 시선과 아이의 시선이 함께 나온다는 이야기를 해줬는데, 저도 공감한다. 그런데 이번 영화의 다른 점은 죽은 사람이 즉 아이라는 점"이라고 말했다.
"죽은 자와 아이가 하나돼 가족 안에 들어가고, 그 가족이 재생하는 이야기를 그렸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작품이 SF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저 죽은 사람이 돌아오는 이야기라고 생각했습니다. 부모가 돌아온 아이에게, 여전히 실수하고 넘어지는 과정을 한페이지 한페이지 넘기듯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한편 '상자 속의 양'은 제79회 칸 국제영화제에 초청돼 전 세계 관객들에게 첫선을 보였다. 국내에선 오는 10일 개봉한다. 러닝타임은 126분.
<사진제공=미디어캐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