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spatchㅣ칸(프랑스)=정태윤기자] "안도 사쿠라가 아니면 안 됐어요."
정주리 감독은 사회적 메시지를 인물에 집중해 풀어내는데 탁월한 연출가다. 지금까지 발표한 장편 3편 모두 칸 영화제에 초청됐다. '도희야', '다음 소희' 그리고 '도라'까지.
그동안은 한 사람이 어떻게 혼자가 되고 죽을 수밖에 없었는지에 집중했다면, 이번엔 인물이 가지고 있는 알 수 없는 공허함을 가장 극대화하고 싶었다.
첫번째 캐스팅은 도라가 아닌 나미였다. 나미는 한국 남해안 마을에 살아가는 일본 여성이다. 도라가 자꾸 시선을 두게 되는 인물이기도 하다.
정주리 감독은 "작품마다 전혀 다른 얼굴을 꺼내면서도 안도 사쿠라로 귀결되는 배우이지 않나. 다채로움 속에서도 뚜렷한 모습이 나미 같았다"고 말했다.
'디스패치'가 프랑스 칸 팔레데 페스티벌 인근에서 정주리 감독과 안도 사쿠라를 만났다.

◆ 프로이트 도라
'도라'는 몸과 마음의 끔찍한 병으로 고통받는 소녀 도라(김도연 분)가 서울을 떠나 한여름 바닷가 별장에 머물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다. 처음으로 사랑을 알게 되며 모든 것이 서서히 흔들리게 된다.
정주리 감독은 프로이트의 사례 연구 저작 중 하나인 '도라의 히스테리 분석'을 모티프로 했다. 프로이트는 예민한 한 소녀가 주변인들과 겪는 복잡한 심리적 요소를 분석하는 데 집중한다.
그러나 이 치료는 실패로 돌아가고, 도라는 은폐와 기만을 일삼는 히스테리 환자로 기록하게 된다.
정 감독은 이 사례를 뒤집었다. 스스로 치유하고 일어날 수 있는 인간으로 바꾸었다. 고통 속에서 빛을 잃어가는 존재가 온전히 회복해 도약하는 하나의 사례가 되길 바랐다.
정 감독은 "어렸을 때는 프로이트의 시각에서 흥미롭게 봤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모든 게 전복돼 보이더라. '도라의 목소리가 여기에 있나' 싶었다"고 말했다.
"그의 입장도 들어봐야 하는 게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면서 이야기를 새로 써 봤습니다. 다시 보니 도라는 욕망하는 자가 아니라 욕망의 대상이었어요. 그래서 도라를 욕망의 주체가 되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정주리)

◆ 안도 사쿠라, 첫 한국 작품
안도사쿠라는일본동세대배우중가장압도적인 수상 경력을 가진 연기파 배우다. '도라'를 통해 처음으로 한국 영화의 주연을 맡았다.
그는 '나미' 역을 맡았다. 나미는 5년 전 유방암 수술을 받은 후 모든 것을 정리하고 어머니의 고향인 한국의 남해안 마을로 왔다. 도라로 인해 예기치 못한 감정의 소용돌이에 빠지게 된다.
처음엔 출연을 고사했었다. 그는 "언어가 영화를 받아들이는데 굉장히 큰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한다. 구사할 수 없는 언어를 쓰면 몰입에 방해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정주리 감독의 편지에 마음이 움직였다. "한국어를 하지 못해도 된다. 일본어나 영어도 괜찮다고 해주셨다. 대사를 저에게 맞춰 주신다고 하셔서 결심하게 됐다"고 전했다.
실제로 정 감독은 안도에 맞춰 대사를 다 수정했다. 그는 "한국어를 전혀 못하는 상태에서 대사들을 소화한다는 것이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어려운 문제더라"고 털어놨다.
"한국에 5년 동안 살고 있는 사람의 언어를 찾기로 했죠. 오직 나미만 구사할 수 있는 언어로요. 예를 들면 '관계없어' 같은. 또 말하지 않을 때 전달되는 것이 많다는 걸 깨달으면서 작업했습니다." (정주리)
안도도 동의했다. "일본어로 했을 때 오히려 연기가 말에 묶이는 느낌이 들 때도 있다. '감사합니다'라고 말해도 고맙다는 감정이 느껴질 때가 있고, 부정적인 감정이 들 때도 있지 않나. 말이 전부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부연했다.

◆ "버티지 말고 놔 버리면 떠오른다"
안도 사쿠라는 극 중 일본어와 한글을 섞어가며 연기한다. 서툰 한국어지만, 그가 뱉는 단어 하나하나엔 힘이 있었다. 영화 속에서 가장 큰 울림을 준 대사 역시 그의 입에서 나왔다.
그는 "'버티지 말고 놔버리면, 떠오른다'는 정확히 기억하고 있다. 모든 단어 하나하나 의미를 알고 대사를 했다. 그 대사는 자연스럽게 물드는 것처럼 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나미는 이 대사를 했을 때처럼 바다에 떠올라 있는 생명체처럼 남아 있는 느낌으로 뱉었습니다. 대본 안에서 볼 수 있는 그림 안에 들어가고 싶었어요." (안도 사쿠라)
정 감독 역시 그 한순간을 위해 달렸다. 그는 "가장 중요한 대사였다. 어떻게 하면 그 말을 향해서 나미가 나아갈 수 있을지 고민했다"며 "이 말이 나미를 가장 잘 드러낼 수 있는 말이 될 수 있도록 노력했다"고 강조했다.
도라를 둘러싼 모든 어른들은 양면성을 가졌다. 사람이 단순히 착하지도, 마냥 악하지도 않은 인물들. 나미도 마찬가지였다. 안도 사쿠라는 그 이물적인 면을 억지로 만들어내려 하지 않았다. 자연에 맡겼다.
"답을 정해놓고 연기하면 그 자체에 머물게 됩니다. 저는 각 사람과 만들어내는 순간에 집중했어요. 중요한 부분에 집중해 연기하다보면, 나미의 이물적인 면도 자연스럽게 따라올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안도 사쿠라)

◆ 도라, 김도연
'아이오아이' 출신 김도연이 첫 영화 주연으로 나섰다. 그가 맡은 도라는, 어려서부터 신경쇠약에 시달린 예민한 아이다. 바닷가 마을에서 여러 인물과 관계를 맺으며 처음으로 감정적인 소통을 경험한다.
스스로의 욕망에 눈을 뜨고 타인에게 원하는 것이 생기며, 이를 쟁취하는 과정을 그려냈다. 정 감독은 "안도 사쿠라의 캐스팅을 먼저 확정하고, 그 다음에 도라 오디션을 진행했다"고 설명했다.
"두 배우의 조합을 고려해야 했어요. 긴 오디션 끝에 발탁됐죠. 도라와 나미는 모습 자체의 대비도 있으면서도, 두 사람이 함께 대화하는 걸 생각했을 때 목소리의 조합이 너무 좋다고 느꼈습니다." (정주리)
안도 사쿠라는 김도연에 대해 "도라가 도연이라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서로 기대어 버티는 부분이 있었다"며 "서로 다른 언어를 하지만, 그걸 넘어서는 무언가가 있었다. 더 특별한 팀 같은 느낌이었다"고 떠올렸다.
두 사람은 수위 높은 장면도 소화해야 했다. 안도는 "도연에게 다짐한 게 있다. 우리 영화는 평생 남아 있을 거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마음에 남는 것이 있다면, 나는 도연 편에 있을 거라고 약속했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나도 지키고 도연도 지키고, 작품도 지켜야겠다는 마음이었습니다. 그리고 아이가 있는 사람으로서, 지금 이 시대에 맞는 방식으로 바꾸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안도 사쿠라)
정 감독 역시 "여성 감독이 정사신을 다루는데, 제대로 해내지 못한다면 다음은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여성 촬영 감독과 어떻게 상의할지 구상하고 준비했다. 정말 어려웠다"고 털어놨다.

◆ 관객의 도라
'도라'는 프랑스 여성 촬영 감독인 이리나 룹찬스키, 시각효과는 한국과 프랑스에서, 사운드 작업은 한국과 룩셈부르크, 색 보정은 프랑스에서 진행됐다.
국경을 넘는 협업으로 완성했다.제79회 칸영화제 감독주간 공식 초청작으로도 됐다.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실험적이고 진보적인 작품으로 뽑혔다.
이번 칸 테아트르 크루아제트에서 전 세계 관객들에게 첫 선을 보이기도 했다. '도라'는 그에게 어떤 작품으로 남게될까. 정 감독은 "영화가 완성된지 열흘이 됐다. 아직은 잘 모르겠다"며 말문을 열었다.
"돌아보면 늘 외로운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제는 외로움과 멀어져볼까? 하는 마음도 있고요. 이제는 한템포 쉬면서 좀 더 넓게 생각해 보려 합니다." (정주리)
안도 사쿠라 역시 이번 작품을 통해 여러 나라 작품에 참여하고 싶다는 포부를 전했다. 그는 "여러 나라 사람의 손을 모아 영화를 만든다는 것 자체에 감동했다. 저의 향상심을 고조시켜 줬다"고 전했다.
"영화가 서로 다른 문화 배경을 가진 사람들의 마음에 도달할 수 있는 고귀한 매체라는 걸 새삼 다시 느꼈어요. 한국뿐 아니라 다른 나라 영화에 더 많이 참여하고 싶다는 욕심을 가지게 됐습니다." (안도 사쿠라)
<사진출처=디스패치DB, 레드피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