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spatch=정태윤기자] '탄금'(呑金). 죽을 때까지 금덩이를 삼켜야 하는 고대 청나라의 형벌이다. 금을 삼키게 함으로써 스스로 부를 종식시키게 한 것.
넷플릭스 '탄금'(극본 김진아, 연출 김홍선)은 신분과 권력, 욕망과 복수에 짓눌린 인간의 비극을 은유적으로 담고 있다. 금은 즉, 각자가 쫓는 이상향이다.
배우 이재욱에게 '금'은 무엇이었을까.
이재욱은 "결핍인 것 같다. 사람을 만나고 일하는 걸 너무 좋아한다. 혼자 있으면 흥행한 작품들을 질투만 하고 있더라. 시리즈 제목처럼 독이 될 수도 있다"고 털어놨다.
"쉴 때 모든 드라마를 다 보거든요. 나라면 어떻게 연기할까 늘 생각합니다. 그러다 보면 '왜 저 대본은 나한테 안 왔지' 질투가 나더라고요. 그래서 쉬지 않고 일하게 되는 것 같아요. (웃음)"
'탄금'도 질투의 힘으로 완성했다. 이재욱이 아닌 '홍랑'은 생각나지 않게, 누군가는 샘낼 정도의 연기를 보여주고 싶었다. 그의 말을 더 들어보자.
◆ 다시 시대극
'탄금'은 미스터리 멜로 사극이다. 실종됐던 조선 최대 상단의 아들 홍랑(이재욱 분)이 기억을 잃은 채 12년 만에 돌아온다. 이복누이 재이(조보아 분)만이 그의 실체를 의심하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다.
이재욱은 사실, 대본을 받고 고사했었다. 이미 tvN '환혼', '환혼: 빛과 그림자'에서 연달아 사극을 소화했기 때문. 그의 마음을 되돌린 건 김진아 작가의 자필 편지였다.
그는 "작가님이 5~6페이지 분량의 편지를 써주셨다. 홍랑의 캐릭터를 설명해 주시면서 제 연기에 대한 디테일한 감상을 적어주셨다. 해외에서 그 편지를 읽고 엉엉 울었다"고 떠올렸다.
"나를 이렇게까지 세밀하게 봐주는 작가님이 계신다는 것에 감사했습니다. 다시 책을 펼쳤죠. 상상할 수 없는 고문을 받고 살아온 홍랑의 아픔을 표현하고 싶다는 욕망으로 합류하게 됐습니다."
그렇다면 '환혼'의 장욱과 '탄금'의 홍랑은 어떻게 다를까. 그는 "장욱은 성장하는 캐릭터였다. 반면 홍랑은 이미 성장한 후 시작되는 이야기다. 캐릭터의 성질에 대한 고민과 헷갈림 없이 밀고 나갔다"고 설명했다.
"홍랑이 가진 날카로움을 살리려 했습니다. 적은 대사만으로도 시청자들을 설득해야 했어요. 절제된 모습을 보여주려 했습니다. 그 시선 끝에는 늘 재이가 있다는 디테일을 살렸고요."
◆ 쥐똥이, 휘수, 홍랑
이재욱은 '탄금'에서 여러 이름을 연기한다. 씨종으로 태어나 액받이로 산 '쥐똥이', 민상단의 잃어버린 아들 '홍랑', 그리고 찢을 휘·목숨 수라는 잔혹한 작호를 지닌 자객 '휘수'.
태생부터 아픔이 서려 있다. 이재욱은 "피폐물은 거의 처음이다. 부정적인 감정을 계속해서 쏟다 보니 쉴 때는 거의 넋이 나가 있었다. 정말 새로운 도전이었다"고 말했다.
"나는 언제 이런 아픔이 있었지를 계속 되뇌면서 캐릭터를 들여다봤습니다. 그런데 결국 홍랑을 10%도 이해하지 못한 것 같아요. 그런 아픔을 겪어본 적 없으니까요."
대신 현장에 몸을 맡겼다. "현장이 주는 무게가 공간을 짓누를 정도로 무거웠다. 그것만으로도 몰입에 도움이 됐다. 공기의 흐름을 읽으며 집중하려 했다"고 전했다.
홍랑의 아픔을 가장 입체적으로 드러난 순간은 10회. 홍랑은 어린 시절, 인간 부적이 되어 강제로 등에 문신을 새기게 된다. 성인이 된 후 그 잔인한 작태의 주인공, 한평대군(김재욱 분)을 마주한다.
한평대군은 홍랑의 몸을 묶은 채 등의 문신을 확인한다. 홍랑은 수치와 분노가 섞인 울분을 토해낸다. 그는 "김재욱 선배의 얼굴이 아직도 생생하다. 징그럽고 잔인했다. 덕분에 순간적인 감정이 터져 나왔다"고 설명했다.
"처음에는 나를 물건 취급하는 한평대군을 보며 헛웃음이 나왔고, 뒤에서 재이가 몰래 보고 있다는 생각에 수치심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울분에 도달했고요. 감정이 순차적으로 빠르게 지나갔고, 그대로 표현했죠."
◆ 역대급 액션
액션은 '탄금'에서 가장 중요한 시퀀스다. 이재욱은 거의 매회 장검 액션을 휘둘렀다. 말을 타고 활을 쏘는 장면도 직접 소화했다. 손을 놓고 탈 수 있는 경지에 올랐을 정도.
한 신만 3박 4일을 촬영한 적도 있다. 4회 마지막 은행나무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액션신이 바로 그것.
그는 "그냥 가면 머리를 박을 정도로 어두웠지만, 장관이었다. 원하는 그림을 완벽하게 그려내고 싶다는 욕심으로 촬영했다"고 말했다.
이번 액션을 '스타일리쉬한 액션'이라고 정의했다. 그만큼 위험한 장면도 많았다. 대본을 보는 것 이상으로 사전 준비도 철저하게 했다. 촬영 몇 달 전부터 트레이닝하며 액션을 연마했다.
이재욱은 "90% 이상 직접 소화했다. 특히 산에서 찍는 액션신들이 정말 고됐다. 부담이 될 정도로 스태프분들도 고생하셨다. 그래서 더 집중해서 잘 하려 했다"고 강조했다.
"액션할 때는 밥을 잘 못 먹어요. 후반부에는 체지방률이 5%까지 내려가기도 했습니다. 그 상태를 즐기려 했어요. 홍랑의 아프고 고단한 느낌을 전달하기에 좋았죠."
◆ 이재욱이 다했다
사실, 스토리 자체에는 아쉬운 부분이 많다. 미스터리 멜로 사극이라는 복합 장르로 초반엔 기묘한 분위기를 형성했다. 그러나 후반을 향할수록 방향을 잃고 애매하게 부표했다.
특히 미스터리를 담당한 설인은 제 역할을 하지 못한 채 소멸됐고, 홍랑이 재이에게 사랑에 빠지는 순간도 급작스럽다. 11회를 끌고 가는 유일한 힘은, 이재욱이었다.
탄탄한 발성으로 절제된 감정을 읊고, 도포 자락을 휘날리며 흉내 낼 수 없는 액션을 완성했다. 왜 그가 이른 나이부터 주연을 꿰찼는지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이재욱은 "저는 아쉬웠다. 이 친구(홍랑)의 대변인으로서 어렵게 설킨 감정을 보여줘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며 "한편으로는 '그 아쉬움을 다음엔 이렇게 보완하자'는 원동력을 얻기도 했다"고 털어놨다.
'탄금'이 하고 싶었던 이야기에 대해선 "모두가 운명을 거슬러서 벌어진 이야기다. 그것을 관통하는 게 사랑이었다. 운명을 거스를 수밖에 없는 사랑을 표현하고 싶었다"고 덧붙였다.
◆ 질투는 나의 힘
그가 첫 주연을 맡은 나이는, 겨우 21살. 벌써 6개 작품의 주연으로 활약했다. 그래도 아직 27살이다. 차기작 역시 연달아 예약돼 있다.
그는 자신의 강점에 대해 "현장에서 보고 느끼는 감정을 그대로 표현하는 걸 좋아한다. 대사가 나오는 대로 해버린다. 그런 모습을 입체적으로 봐주시는 것 같다"고 전했다.
"저는 저에 대한 믿음이 있어요. 대사를 툭 치면 튀어나올 정도로 하니까. 현장에서 더 날것으로 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현장의 부담감을 즐기려 합니다. 작품이라는 숲 안에 하나의 나무가 됐으면 하는 마음으로 임하고 있습니다."
쉬는 날에도 연기 생각뿐이다. 그는 "공개되는 시리즈는 전부 다 보고 있다. 히트 친 작품들에 대해 질투하기도 한다. 최근에는 '약한영웅'을 봤다. 내가 저 캐릭터였다면 어떻게 했을까. 생각하며 스스로 자극받는 시간을 많이 갖는다"고 말했다.
질투의 힘이 그를 쉬지 않고 연기하게 했다.
"쉬지 않고 작품을 하는 이유도 질투 때문인 것 같아요. (웃음) 다른 작품들 보면서 질투만 하고 있으니까, 빨리 일을 해야겠다는 마음으로 움직이는 것 같습니다. 군 입대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생각하고 있어요. 최대한 많은 작품을 남겨 놓고 가고 싶어요. 올해도 열심히 달려볼 생각입니다."
<사진제공=로그스튜디오·넷플릭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