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spatch=정태윤기자] "절벽 위에서 연기를 하라고 하면, 어떤 배우라도 실감나게 잘할 겁니다..."

박지환은,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런데'를 붙였다.

"그런데... 사실 일상의 별거 아닌 순간을 연기하는 게 진짜 어려운 겁니다. 흔히, '몰입했다'는 말을 쓰죠. 그건 수준 낮은 이야기예요. 이 선배님들은 캐릭터가 곧 그 자신이었습니다."

박지환이 말하는 선배님은, 김혜자, 고두심, 이정은...그리고 이병헌, 신민아, 김우빈, 한지민 등도 빼놓지 않고 열거했다.

"김혜자 선생님이 무심히 '커피가 달다'라고 할 때, 고두심 선생님이 양말을 발목 위까지 끌어올릴 때, 이정은 선배님이 등에 남은 시퍼런 부항 자국을 드러냈을 때... 그 모든 게 다 예술이었습니다."

박지환은 '우리들의 블루스' 현장을 갤러리에 비유했다. 노희경 기획하고, 김혜자, 고두심, 이병헌, 신민아 등이 그리고, 김규태가 큐레이팅한 아트 갤러리.

그는 "제주도에 고흐, 고갱, 세잔 등의 미술 작품을 모아 놓은 것 같았다"면서 "그들의 작품(연기) 앞에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며 재차 감탄사만 연발했다.

분명, '23년 차' 배우 박지환을 만났다. 하지만 그는, 인터뷰 내내 선배들의 연기만 극찬했다. 그리고 보태는 말.

"도대체 얼마나 어떻게 해야 저렇게 연기를 잘 할 수 있는 걸까요? 저는 아직 한참 부족합니다."

그래도, '디스패치'가 지금 듣고 싶은 건... 그의 연기 이야기다. '우리들의 블루스'를 떠나보내는 소감까지.

◆ “이 아빠의 인생은 고되다”

'이수파'의 두목 장이수. '깡패출신' 아빠 정인권. 박지환은 깡패와 깡패(출신)를 연이어 연기했다. 게다가 정인권의 모습에선 장이수의 모습도 (묘하게) 보인다.

알고 보니, 노희경 작가의 주문이 있었다. 정인권의 얼굴에 장이수의 모습을 80% 녹여달라고 요청한 것.

"노희경 작가님이 '장이수의 매력을 가져오면 좋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인물(정인권)도 험할텐데, 당신의 따뜻함으로 잘 부탁합니다'라는 의미란 걸 알게 됐죠."

박지환은 첫 회부터 강렬한 인상을 드러냈다. 욱! 하면, "개나리 고사리 개구리 뒷다리 같은 새끼야"라며 분노를 터트렸다. 그러나 인권은, 뒤로 갈수록 인간미를 드러냈다. "아빠가 평생 창피했다"는 아들의 말에 무너졌고, 오열했다.

"처음에는 아들에게 막하는 인권을 이해하기 힘들었죠. 그럴 때마다 노 작가님은 더 거칠게 하라고 주문하셨어요. '저게 아빠야'라는 감정이 느껴질 정도로 막 하라고 말씀하셨어요."

박지환은 정인권, 아니 그의 삶을 다시 돌아봤다. 조직에서 나와 생계를 위해 순댓국을 파는, 게다가 홀로 아들을 키우는 삶. 부모가 된다는 게 쉽지 않다는 걸 알기에, 그는 (10대에 아기를 낳겠다는) 아들을 몰아세운 게 아닐까.

"(인권이) 거칠수록 (삶은) 엉망진창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인권의 마지막 신이 더 가치있게 느껴집니다. 깨진 그릇이지만, 그래도 그릇이니까 밥 두 숟가락은 담았다. 다 깨진 행복이지만, 그래도 웃어, 좋아."

◆ “ 이 드라마의 현장은 갤러리”

김혜자는 고흐다. 고두심은 고갱, 이병헌은 세잔이었다.

"우리들의 갤러리였습니다. 최고의 명화를 감상하는 느낌이었죠. '우블' 현장은 세계 최고의 명작을 감상하는 즐거운 일터였습니다."

그렇다고, 특별한 대사가 나오는 것도, 대단한 감정이 터지는 것도 아니다. 잠깐, 박지환의 '경외심'을 좀 더 들어보자.

"도대체 얼마나 경험을 해야 한 신을 한 숨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요? 진짜 사소한 장면인데도... 넋 놓고 바라보게 됩니다. 저는 아직 한참 멀었어요. 한참 부족하죠."

박지환에게 '예시'를 부탁했다. (시청자가 아닌, 배우가 보는 배우의 연기란 무엇인가.) 그는 이병헌을 예로 들었다.

"이병헌 선배가 국밥을 먹는 신이었습니다. 사실 인스턴트 국밥이 얼마나 맛있겠어요. 그런데 허더더 뜨거워하며 맛있게 먹더라고요. 털레털레 걷는 걸음, 구겨진 바지... 그걸 완전히 받아들인 태도가 너무 멋졌습니다."

그에게 '우블' 현장은 갤러리였고, 도서관이었으며, 놀이터였고, 학교였다.

"불같은 감정도 서두르지 않고 드러내세요. 여유가 느껴집니다. 단순히 (인물에) 빠져드는 수준이 아니에요. 그냥, 인물 그 자체입니다. 정말 엄청난 공부가 됐어요."

박지환은 선배들의 모든 연기를 감상했다. 그래서 '우블' 현장은, 갤러리였다. 모든 연기를 되새겼다. 그래서 도서관이었다. 그 모든 것이 즐거웠다. 그래서 놀이터였다.

"선배들의 연기를 보면요. 마치 오랫동안 캐릭터를 알고 지낸 사람 같아요. 너무 재료가 좋아서 무엇을 버무리든 상관없는 음식이랄까? 그분들이 저의 부족함을 채워주실 것이라는 설렘으로 현장에 출근했습니다."

◆ "이 배우의 꿈은 낯선 배우"

‘남자', ‘두목’, ‘주차요원’, ‘호프집 한국인들’, ‘웨이터’, ‘취객’, ‘노숙자’ 등….

박지환이 지난 23년 동안 맡아 온 배역의 이름이다. 그러다 지난 2017년, ‘범죄도시’의 장이수로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그리고 올해, 장이수로 또다시 히트를 쳤다. 이번에는 거의 (숨겨진) 주연급이었다.

그는 ‘우리들의 블루스’로 또 깡패(?)라는 편견을 깼다. 우리 주변에 있을 법한, 표현에 서툰 싱글파파로 시청자의 눈물샘을 자극했다.

박지환에게 "인기를 실감하냐"는 뻔한 질문을 던졌다.

"흔해 빠진 이야기지만, 식당에 가면 반찬을 더 챙겨 주시죠. '아들한테 잘하라'며 혼도 내시고요. 드라마가 우리의 일상과 붙어 있다는 걸 체감하고 있습니다."

단, 박지환은 끝까지 겸손을 풀지 않았다. 이 모든 성과가 자신의 덕은 아니라고 강조했다. "마동석과 손석구의 등에 업히고, 고두심과 이병헌 발에 묶여 여기까지 왔다"며 겸손을 드러냈다.

"저는 다 지어진 집에 어느 날 방문한 사람일 뿐이에요. '내가 이 대들보를 세웠다'는 건 말도 안 되고요. 저는 그냥 기억의 남는 손님일 뿐이죠."

박지환은 계속해서 낯선 배우를 꿈꾼다. "사람들이 저를 계속 몰랐으면 좋겠다. 아는 줄 알았는데,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면서 끊임없이 배신하고 싶다"고 소망했다.

"김혜자, 고두심 쌤 보면서 정말 마음먹었습니다. 유행과 상관없이 오래오래, 박지환 본인으로서 연기하고 싶습니다."

박지환은 다음 달 대작으로 돌아온다. '명량' 김한민 감독의 차기작 '한산: 용의 출연'에 등장한다. 이순신을 도와 거북선을 제작한 '나대용' 장군을 맡았다.

그는 "관객들의 기대와는 다른 리듬을 가진 인물이다. 그동안 잔걸음으로 걷는 모습을 보여드렸다면, 이번엔 터벅터벅 걷는 느낌이다. 정말 훌륭하신 분을 연기하게 돼 영광이다"고 기대를 당부했다.

<사진제공=저스트엔터테인먼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