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spatch=김지호기자] "스타보다는, 배우가 되고 싶은 거니까…." (정일우)

2016년, 서른 살의 정일우가 담담히 말했다. "정말 낯설고 혼란스러울 때, 한 선배님께서 이런 말씀을 해주셨어요. '마지막에 이기는 사람은, 끝까지 버티는 사람'이라고요.

당시 정일우는 '디스패치'에 그 말을 신념으로 삼았다고 밝혔다. "인기 스타보다는 배우가 되기 위해, 한 걸음 한 걸음 나간다는 게 중요한 것"이라 각오를 다졌다.  

2021년, 정일우는 여전히 배우의 길을 걷고 있다. 천천히, 또 차분히….

시작은 레전드 코믹 시트콤 '거침없이 하이킥!'(2006년). 꽃미남 일진 고등학생 역으로 소녀들의 첫사랑이 됐다. 청춘 스타로 연기 인생 스타트를 끊었다.  

이후 정일우는, 반짝 인기에 안주하지 않았다. 장르를 가리지 않고 도전했다. 16년 간 차근차근 연기 내공을 쌓았다. 그렇게 베테랑 배우로 성장했다.

먼저 로맨틱 코미디. '아가씨를 부탁해'(2009년)에선 귀공자 변호사로 활약했고, '꽃미남 라면가게'(2011년)에선 까칠한 매력으로 여심을 저격했다. 

'신데렐라와 네 명의 기사'(2016년)에선 아픔을 감춘 스무 살 재벌 3세 캐릭터로, '야식남녀'(2020년)에선 요섹남으로 매력을 어필했다. 

판타지 로맨스도 소화했다. 이요원과 함께 한 '49일'(2011년)이 바로 그것. 현대판 저승사자 '스케쥴러' 역으로 애틋한 사랑을 표현했다. 

'사극불패' 별명도 얻었다. '해를 품은 달'(2012년)의 순정남, '야경꾼일지'(2013년)의 사연 많은 왕자 이린, '해치'(2019년)의 청년 영조…. 

해외에서도 연기를 펼쳤다. 중국 드라마 '여인화사몽'(2015년)으로 대륙 인기를 끌었다. 태국 드라마 '사랑과 거짓말'(2017년) 주연으로 나서기도 했다.

그 뿐일까. 영화와 연극까지 범위를 넓혀갔다. 故 홍기선 감독의 유작 '1급기밀'(2018년)에는 노 개런티로 특별 출연했다. 

연극 '엘리펀트 송'(2019년)으로는 작은 대학로 극장에 섰다. 정신병을 겪는 소년이 되어, 팽팽한 긴장감을 선사했다. 

작품만 좋다면, 방송사도 가리지 않는다. 그래서 도전할 수 있었던 것이 바로, MBN '보쌈-운명을 훔치다'(극본 김지수·박철, 연출 권석장).   

드라마 시청층이 적다는 건 문제가 되지 않았다. 여주인공(권유리)과 감독(권석장PD)이 사극 경험이 없다는 것도, 전혀 상관 없었다. 

중요한 건, 결국 작품이었으니까…. 

"정일우는 자기 지향점에 대한 갈증이 큰 배우였습니다. 조금이라도 더 나아가려 하는 욕심을 피력하더라고요. 그런 (연기) 욕심을 저와 작업하며 충족시킬 수 있을 거라고 하는데, 사실 제가 오히려 설득을 당했어요." (권석장PD)

실제로 정일우는 열정적이었다. '보쌈'이라는 낯선 소재를 어떻게 하면 친근하게 표현할 수 있을지 고민했다. 권석장PD와 머리를 맞대고 대화를 나눴다. 

"문헌을 찾아봤습니다. 보쌈에 대한 자료도 많지 않더라고요. 감독님과 정말 이야기를 많이 나눴죠. 어깨에 들쳐매는 방식이 가장 쉽겠다는 결론이 났어요." (정일우)

그가 맡은 바우는 밑바닥 인생을 사는 홀아비. 광해군(김태우 분)의 외동딸 수경 옹주(권유리 분)을 실수로 보쌈하며 인생이 달라진다. 

바우의 숨겨진 정체는 인목대비의 외가 김제남의 장손이라는 것. 어린 시절 이이첨(이재용 분)에게 집안이 멸문당해 복수심을 불태우며 성장한다. 

가슴에 울분을 간직한 동시에, 수경에게 점점 빠져들어야 했다. 수경과 때로는 코믹하고, 때로는 애절한 관계를 연출하는 것이 과제였다. 

"캐릭터가 워낙 어려워서 감독님을 계속 괴롭혔습니다. 이해하고 납득하기 위해 상의를 많이 했죠. 소중한 사람(수경)을 지켜야겠다는 마음의 변화가 나타나고요. 그 후 적극적으로 감정을 표현하며 성장해 갑니다." (정일우)

그가 흘린 구슬땀은, 곧 명장면이 됐다. 

<4회> 자진하려는 수경을 구한 뒤 대화하는 신. 수경이 "왜 그냥 죽게 두지 않았냐"고 따지자, 바우는 "발을 헛딛었다"고 툭 던진다. 그리고 나온 본심.  

"사는 데 이유가 뭐가 필요해? 그딴 거 나도 몰라! 그냥 살아!...나도 당신처럼, 이미 죽은 몸이거든" (바우)

<5~6회> 수경과 함께 코믹 케미를 뽐낸 장면. 바우는 이대엽(신현수 분)에게 먹일 산삼 자금을 마련하러 양반댁을 방문한다. 가짜 부인첩을 팔다 사기꾼 정체가 들통난다. 

"뭐 하느냐 말 안 타고?" (수경)

"난 이게 더 빨라!" (바우)

<6회> 어린 시절 만났던 원수 이이첨을 엿본 순간. 정일우의 연기 포텐이 터졌다. 얼굴이 분노로 달아올랐고, 눈이 충혈되며 시뻘겋게 젖어들었다. 

대엽과는 수경을 두고 얽힌 사이. 하지만 이이첨의 막내 아들이란 사실을 알고 충격에 빠진다. 대엽을 향해 원망스런 눈빛을 쏟아냈다.  

'네놈도 내 원수였구나.. 그 자의 아들이었어..!' (바우)

"정일우가 저를 바라보는 눈빛이 너무 강렬하고 좋았습니다. 거의 눈으로 저를 씹어 삼켰죠." (신현수)

그렇게 정일우는 '보쌈'의 주연으로서 단단히 중심축을 잡았다. 수경과는 코믹&애절을 넘나들었고, 대엽과는 운명적 갈등을 빚어냈다, 

어린 아들 차돌(고동하 분)과의 깨알 케미도 연출했고, 춘배(이준혁 분)와의 우애까지 표현했다. 자신의 운명을 맞닥뜨리고, 고뇌하는 과정도 그려냈다. 

그래서 '보쌈'은 현재 가장 인기 있는 드라마가 됐다. 지난 7회, 평균 7.7%(이하 닐슨코리아, 유료가구 기준) 시청률을 냈다. 순간 최고 기록은 9.0%까지 뛰어올랐다.  

입소문도 타고 있다. 정일우의 재발견이라는 것. 정일우의 느리지만 제대로 걷는 방식은, 결국 정답이었다. 

<사진출처=디스패치DB, MBC, MBN 캡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