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spatch=박혜진기자] 김정현은 천생 배우다. 그를 만난 자리에서 확신했다. 거기엔 ‘사랑의 불시착’의 능글맞은 구승준도, ‘시간’의 까칠한 천수호도 없었다.
대신, 진중한 김정현이 있었다. 그의 캐릭터들이 철저히 연기라는 걸 안 순간, 그가 연기에 대한 확신을 말하는 순간, 생각했다.
‘배우를 해야만 하는 사람이구나.’
그에게 배우가 된 이유를 물었다. 우문에 현답을 내놓았다. 연기하는 순간이 즐겁고, 연기 할 수 있어 행복하다는 것. 그리고 그럴 때 희망을 품게 된다는 것.
김정현은 tvN ‘사랑의 불시착’에서 존재감을 각인시켰다. 밉지만 밉지 않고, 밝지만 가슴 아픈 연기로 시청자들을 웃기고 울렸다.
대배우들 사이에서도 휘둘리지 않고 중심을 지켰다. 누구와 붙어도 위화감이 없었다. 각각의 서사와 케미를 만들어냈다.
김정현, 도대체 이 배우는 누구일까.
◆ ‘배우’의 꿈
사실 김정현은 대기만성형이다. 지난 2012년 단편 영화 ‘내가 같이 있어 줄게’로 스크린에 등장했다.
연기를 할 수 있는 곳이면 무대를 가리지 않았다. 연극, 뮤지컬, 영화, 드라마 등. 장르를 따지지 않았다.
“연극 ‘연기 속에서’를 보고 배우를 꿈꾸게 됐습니다. 정말 많이 울었죠. 그때, 저한테 퀘스천 마크가 떠올랐습니다. 연기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됐죠.”
배우의 출발도 연극이었다. 지난 2013년 ‘테레즈 라캥’으로 연극 무대에 처음 올랐다. 잠깐, 김정현의 뇌리를 스친 '물음표'는 무엇일까?
"연기는 사람들에게 감정을 선물하고, 선물 받을 수 있는 귀한 일이란 걸 깨달았습니다. 새로운 경험을 공유할 수 있다는 게 매력적이었어요."
그렇게, 본격적으로 배우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 누구에게나 굴곡은 있다
2015년 영화 ‘초인’으로 본격 데뷔, 평단의 인정을 받았다. 작품마다 승승장구했다. ‘질투의 화신’, ‘역적’, ’학교 2017’ 등으로 필모를 쌓았다.
하지만 굴곡도 있었다. 수면장애와 섭식장애 등으로 ‘시간’에서 중도 하차한 것. 그를 향한 질타가 쏟아졌다.
“스스로를 방치했던 것 같아요. 자신을 속이고, 배신하고, 채찍질했던 시간이었죠. 저를 사랑하지 못했습니다. 자존감은 떨어졌고, 불안감은 커졌습니다.”
무너지긴 싫었다. 모든 걸 내려놓고, 다시 처음으로 돌아갔다. “1년 5개월 동안 몸과 마음을 회복했다. 배우로서 정신력에 근육을 많이 붙였다”고 말했다.
그를 다시 일으킨 것은, 결국 연기였다. “연기하고 싶다는 마음을 (항상) 품고 있었다. 작품에 대한 갈망이 많았다”고 털어놨다.
쉬는 동안 연기가 더 소중해졌다는 것. “지금, 이 순간을 집중하고 즐기자는 마음이 많이 생겼다. 주변도 돌아볼 수 있는 마음의 상태가 됐다”고 말했다.
◆ 사랑의 불시착
그 간절한 마음을, ‘사랑의 불시착’에 담았다. 주연이든, 조연이든 상관없었다. 김정현에겐 같은 무게였다. 그저 연기할 수 있는 것이 감사했다.
“현장에 가든, 대본을 보든, 연기하는 순간을 즐기자는 마음으로 임했어요. 지금 제가 할 수 있는 것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걸 알았거든요.”
김정현은 사기꾼 구승준을 연기했다. 그의 (삶의) 목적은 돈과 복수.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한 아픔. 대신, 사랑 앞에선 순정남. 감정의 낙차가 큰 인물이었다.
“제일 신경 쓴 부분은 포지션을 유지하는 겁니다. 북한에 표치수(양경원 분)와 대원들이 있다면, 남한에는 그 분위기를 승준이가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김정현은 머리맡에 대본을 두고 잤다. 눈을 감을 때까지 대본을 연구했다. 그리고 연기했다. 너무 진지하지 않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쾌한 승준.
북한 사투리도 자신만의 방법으로 구사했다. “사투리는 대사 해석에 따라 억양이 달라진다”며 “뉘앙스만 캐치해 승준의 말값에 넣었다”고 말했다.
◆ 연기의 정시착
그는 4각 로맨스에 입체감을 불어 넣었다. 분량은 많지 않았지만, 그의 연기는 다이내믹했다. 심지어, 한 인물의 성장까지 담아냈다.
“작가님이 성장에 대한 변곡점을 잘 그려주셨죠. 세리에겐 목적이 있었어요. 단이에겐 인간적으로 다가갔고요. 온도 차가 분명했습니다.”
일례로, 15회의 오열씬. 북한 아이들이 “불쌍한 고아랍니다”라면서 노래 부를 때, 구승준은 혼자 숨죽여 운다. 내면이 처음으로 표출되는 장면이었다.
“위험에 쫓기고 있는 상황, 홀로 숨어있는 공간…그곳에서 승준이가 어땠을까 생각했어요. 마음이 많이 아팠죠. 처절할 거라는 생각을 했어요.”
김정현은 직접 의견을 냈다. “이 씬에서 감정이 표출되면 좋겠다고 말씀드렸다”며 “그래야 승준이가 걸어온 길의 변곡점이 될 거로 생각했다”고 설명했다.
총격씬도 마찬가지. “남쪽에서 클레이 사격 좀 했다”며 장난스러운 대사를 친다. 피식 웃음이 나서 더 가슴 저린 장면이었다. 이것 역시 김정현의 아이디어.
그는 “그게 맞는 것 같았다. 일차적인 목적은 단이를 안심시키는 거였다”며 “죽기 직전까지 단이를 생각하는 마음이었다. 기억에 남는다”고 말했다.
◆ 다시 꾸는, ‘배우’의 꿈
그의 연기에는 특유의 여유가 있다. 재빠른데 느긋하다. 가벼운데 무게가 있다. 그가 유연할 수 있는 이유는, 꼼수 부리지 않는 노력에 있다.
“호수 위에 떠 있는 백조 같아요. 다리를 힘차게 젓고 있어야 여유로워 보일 수 있죠. 연기할 때도 (사실) 속에서는 행동이 계속 진행되고 있어요."
“‘이 대사는 어떤 키워드에 영향을 받은 걸까?’, ‘어떤 목적으로 말하는 걸까?’ 등을 고민합니다. 명확한 생각을 가지고 있어야 (실전에서) 고민이 사라집니다."
그에게 차기작을 물었다. 영화, 드라마, 연극 등 (연기할) 무대를 결정하지 않았다고 답했다. "좋아하는 사람들이랑 팀을 꾸려 공연도 하고 싶다"고 덧붙였다.
요즘은 영어 공부도 한창이다. 이유는, 기승전-연기. "영어를 잘하면 접할 수 있는 작품이 많아지지 않겠냐"며 "다양한 연기를 접하고 또 전하고 싶다”고 말했다.
김정현은 이제 하나의 에피소드를 끝냈을 뿐이다. 일희일비하지 않고 주어진 길을 묵묵히 갈 생각이다. 그는 다시 한번, 배우의 꿈을 꾼다.
“아직 부족한 지점이 보여요. 무작정 달려가는 것보다, 더 성장하고 싶은 욕구가 있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대화법으로 새로운 경험을 공유하고 싶어요.”
그리고 한 마디 더.
"죽을 때까지 노력한다면 그 꿈을 이룰 수 있지 않을까요?"
<사진제공=오앤엔터테인먼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