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spatch=김효은 인턴기자] 말 한 마디에 천 냥 빚을 갚는다고 합니다. 하지만 저는, 말 한 마디에 천 냥 빚을 얻었습니다. 그 만큼 답답했습니다. 집으로 가는 발걸음은 무겁기만 했습니다. 아, 그야말로 입이 방정이고, 또 웬수였습니다.
퇴근 1시간 전, 회의 때 일입니다. 연예계 이슈를 점검하는 시간이었습니다.
팀장 : 크레용팝 인기비결이 뭐야?
김효은 인턴 : 진짜 '일베'가 밀어주는 것 아닐까요?
팀장 : 가서 확인해봐. 일베인지, 삼촌인지.
사실, 전 '디스패치'에 입사한 지 이제 갓 1달 된 인턴입니다. 의욕이 앞서는 시기입니다. 그래서 무턱대고 인터넷에 떠도는 루머를 말한 것 뿐입니다. 그런데 직접 확인해보라니요. 만약 일베들의 모임이라면? 전 감당하기 힘듭니다.
그렇다고 여기서 포기한다면, 말 뿐인 기자가 되고 맙니다. 게다가, 그들의 정체(?)가 조금 궁금하기도 했고요. 아니 세상에, 이 더운 여름 날 헬멧을 쓰고 다니는 게 말이 되나요. '액면가'도 높아 보이던데 말입니다.
◆ D-1. 지피지기면 백전백승
적을 알면 백전백승입니다. 우선 '팝저씨'(크레용팝+아저씨) 분석에 들어갔습니다. 공식 팬사이트에 가입했습니다. 우려와 달리 '팬사'에는 사랑으로 넘쳐났습니다. '배신=죽음'이라며 크레용팝을 향한 결의(?)를 표하기도 했습니다.
팬들끼리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는 게시판에도 욕설은 없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경계심은 조금 누그러들었습니다. 본격적으로 사이트를 탐색했습니다. '뉴비(신입) 가이드'라는 글을 클릭했습니다. 크레용팝에 입문한 삼촌 팬들을 위한 글이었습니다.
지금까지 크레용팝 활동 자료, 용어 설명, 응원법 등 자세한 설명 글들이 올라와 있었습니다. 이런 저런 글을 읽다 보니 가장 궁금했던 트레이닝복에 대한 호기심도 풀렸습니다. 'B' 쇼핑몰에서 자체 제작한 '츄리닝'이더군요.
상하의 세트에 헬멧, 안전봉, 안전조끼 등 풀세트로 구입하면 5만 5,000원이 든다고 합니다. 요청에 따라 등에는 '크레용팝'을 가슴에는 각자의 닉네임을 새겨준다는 설명도 덧붙였습니다. 사이트를 둘러보니 그나마 마음은 편해졌습니다.
"그냥 크레용팝에 빠진 삼촌이구만~"
◆ 8월 15일 15:30. 팝저씨를 만나다
광복절입니다. 모처럼 맞은 휴일에 또 취재라니요. 어쨌든 마음을 추스리고 상암동으로 향했습니다. '엠카운트다운' 공개방송이 있는 날이거든요. 한데 걱정이 앞섭니다. 그냥 가면 만날 수 있을까요. 팬들을 어떻게 찾을지….
하지만 기우였습니다. 저 멀리 빨강, 노랑, 파랑색의 츄리닝 부대가 보입니다. 등에는 '크레용팝'이 궁서체로 새겨져 있더군요. 츄리닝에서 뿜어져 나오는 아우라가 만만치 않습니다. 적진에 들어가는 마음으로 조심조심 다가갔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정상(?)이 아닙니다. 그날 서울 기온은 영상 30도를 넘어섰습니다. 그런데 헬멧을 쓰고 있습니다. 저들끼리 모여 점핑 춤을 연습하며 포즈를 취합니다. 저, 정말 저 무리에 무사히 낄 수 있는걸까요.
심호흡을 하고 츄리닝 부대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팬이 되고 싶어서 왔다'고 말하니 다들 반겨줍니다. 가만보니 대부분 평범한 삼촌이었습니다. 20대 후반, 30대, 40대까지 다양합니다. 그 중에는 앳된 외모의 10대 팬도 있었습니다.
◆ 16:00. '빠빠빠' 춤 배워볼까요?
팝저씨들은 팬클럽 평균 연령이 어려졌다고 좋아합니다. 닉네임 '초아야오빠다'는 "1년 전만 해도 20살 중후반이 막내였다"면서 "빠빠빠가 뜨니까 중딩부터 고딩까지 다양한 팬이 생겼다"고 미소를 짓습니다.
몇 가지 준비한 질문을 던지려는 순간, 함께 춤을 추자고 말합니다. 그 유명한 '직렬 5기통'입니다. 그들과 동화되기 위해 안무를 배워보기로 했습니다. 흔쾌히 헬멧을 빌려주더군요. 그 새 저를 팬으로 받아들이기로 한 모양입니다.
자, 그럼 '직렬5기통' 춤을 소개합니다. 팝저씨들은 저게 센터 자리를 양보하더군요.
"겟~ 셋~ 레디~ 고!"
① 우선 2명과 3명으로 나눠 두 줄로 섭니다.
② 앞줄과 뒷줄은 타이밍을 정해야 합니다.
③ 먼저 뛰는 그룹은 '고!'에 맞춰 뛰어오릅니다.
④ 나중에 뛰는 팀은 '고!'일 때 살짝 무릎을 굽힙니다. 오른팔은 세우고 왼손으로 오른팔 팔꿈치를 받칩니다. 그렇게 교차로 점핑을 하면 끝. 참 쉽죠~?
춤을 배우고 나니 벌써 팝저씨에게 한 걸음 다가간 기분입니다. 헬멧을 벗는데 이마에 땀이 흥건합니다. 불과 5분 밖에 쓰지 않았는데 말입니다. 몇 시간 동안 헬멧을 쓰고 있는 팬들이 대단해보였습니다.
◆ 18:00. 팝저씨가 도발하는 까닭?
드디어 공개방송입니다. 저는 팬클럽이 아니라 함께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감시자'로 빙의, 최대한 가까이서 그들을 관찰했습니다. 수많은 팬들 사이에서도 팝저씨들은 단연 눈에 띄었습니다. 플래카드는 기본. 헬맷 위에 태극기까지 꽂았습니다.
잠깐, '움짤'부터 보고 가실게요~
팝저씨의 자리 선정에도 법칙이 있었습니다. 일부 팬들은 무대 앞쪽에, 나머지 팬들은 MC석 뒷편에 자리잡았습니다. 설마, 이날 MC인 김우빈의 뒷태를 감상하려는 목적은 아니겠죠? 그도 그럴 것이 MC석 뒤에 서면 무대를 바라 볼 수 없습니다.
알고보니 크레용팝을 알리기 위한 노하우였습니다. MC의 얼굴이 카메라에 잡힐 때 마다 열심히 점핑, 크레용팝의 팬덤을 과시하더군요. 녹화가 시작되고 MC가 등장하자 팬들은 행동을 개시하기 시작했습니다. 점핑, 점핑, 그들은 이렇게 방송을 타고 있었습니다.
◆ 19:10. 아저씨 목소리가 들려?
이날 크레용팝은 1위 후보였습니다. 방송이 끝날 무렵 등장하더군요. '빠빠빠' 무대가 시작됐습니다. "백보람 김민영 허민진 허민선 박혜경 크레용팝 빠빠빠" 전주 부분에서부터 팝저씨들의 우렁찬 목소리가 공개홀을 가득 메웠습니다.
얼마전 MR 논란이 있었죠? '빠빠빠'에서 MR를 제거하니, 들리는 건 팝저씨의 응원 목소리 밖에 없었습니다. 뉴스가 팩트인 '디스패치'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준비한 게 바로 '데시벨 측정기'. 또 다른 1위 후보, '투애니원'의 응원 소리와 비교했습니다.
영상을 보기 전에 간단히 설명 드리겠습니다. 일반 차도의 소음은 70dB입니다. 지하철 소음이 80dB, 천둥이 칠 때 90dB 정도의 수치가 나옵니다. 비행기가 이륙할 땐 100dB을 기록합니다. 그렇다면 팝저씨들의 응원 데시벨은 어느 정도일까요?
결과를 말씀드리겠습니다. 크레용팝 무대 중 가장 높은 데시벨은 99.7.dB였습니다. 투애니원은 97.5dB을 기록했습니다. 둘 다 비행기 소음과 맞먹는 수준입니다. 크레용팝은 약 1분 45초 동안, 투애니원은 1분 30초 가량을 90데시벨에 머물렀습니다.
최고점은 막판에 나왔습니다. 노래가 끝날 무렵 "원, 투, 쓰리" 가사가 나오기 직전 팬들의 함성이 99.7dB을 기록했습니다. 게다가 "빠빠빠빠 빠빠빠빠"나 "팝! 팝! 크레용팝!"과 같은 응원법은 기가 막히게 맞아 떨어졌습니다.
◆ 19:20. 팝저씨가 말하는 오해
이날 1위는 투애니원의 몫이었습니다. 하지만 팬들은 훈훈했습니다. 엄지손가락을 치켜들며 끝까지 응원했습니다. 밖으로 나오자 입장하지 못한 또 다른 무리의 팬들이 태극기를 흔들고 있었습니다. 2위도 대견하다는 표정입니다.
그들의 관심사는 오직 크레용팝이었습니다. 색깔논쟁은 관심 밖입니다. 좌(左)와 우(右)는 오직 점핑의 예비 동작에서만 나옵니다. 잠시, 용기를 내어 말을 붙였습니다. 혹시 이곳에 '일베' 회원이 많냐고요. 단도직입적으로 질문을 던졌습니다.
"일베요? 관심없어요. 결혼한 팬도 많아요. 자기 일 열심히 하는 정상적인 사람들이에요. 우리의 공감대는 오직 크레용팝입니다. 크레용팝으로 뭉치는 일종의 동호회 같은거죠. 보수, 진보. 전라도, 경상도, 누구나 팝저씨가 될 수 있는걸요."
마침, '악수회'에서 연세 지긋한 어른 한 분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대화를 시도하니 일본 사람이었습니다. 현지 유명 기업의 고위 관계자랍니다. 크레용팝을 보기 위해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다니, 그저 놀랍습니다. 그렇게 팝저씨들은 다양했습니다.
◆ 19:50. 악수회, 그리고 대반전
공개방송이 끝난 후, 악수회가 열렸습니다. 크레용팝이 차에서 내렸고, 팬들과 악수를 하며 인사를 나눴습니다. 다들 오랜 친구 같더군요. 한 팬에게 "아, 머리 자르셨네요"라며 아는체를 합니다. 닉네임도 아는 모양입니다. "○○님,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더군요.
이야기가 어느 정도 마무리 되고, 이제 본격적인 악수타임이 다가왔습니다. 차례대로 줄을 서서 걸어가는데 괜히 손에 땀이 납니다. 악수를 마친 팝저씨들은 각자 자신의 손을 잡고 기쁜 마음을 주체하지 못했습니다. 크레용팝이 떠나고도 한동안 감격에 젖어 있었습니다.
공개방송 이후에는 팬들끼리 뒷풀이를 한답니다. 가끔 방송이 없는 날에도 모인다네요. 이쯤되면 친목 동호회 수준입니다. 롯데를 좋아하는 '자이언츠 동호회', 자동차를 좋아하는 '튜닝 동호회'와 다를 바 없었습니다. '크레용팝'이라는 공감대로 뭉쳤다는 것, 그 정도.
그리고 하나 더. 나이 많은 삼촌팬이 모이다보니, 역시 어린 걸들을 좋아하더군요. 무슨 이야기냐고요? 잠시 후, 제 눈을 의심한 반전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분명 팬사이트에 '배신=죽음'이라고 했었죠? 한데 이 팝저씨들….
걸그룹 '스텔라'가 '하이파이브&사인회'를 진행하자 우르르 달려갑니다. 심지어 트레이닝복을 벗으며 신분 세탁까지 합니다. 그리곤 "스텔라! 스텔라!"를 외치더군요. 아…, '탈덕'(탈퇴한 덕후라는 팬덤용어)인가요? 뭐, 잠시 '한눈팔기' 정도로 해두겠습니다.
결론은 이렇습니다. 우리가 '일베'라고 알던, 아니 '일베'라고 소문났던 그 팝저씨들. 알고보면, 걸그룹을 좋아하는 우리 주위의 오빠, 삼촌들이었습니다. 사회생활에서 받는 스트레스를 이 모임으로 푸는 이 시대 생활인이었습니다.
김효은 기자가 직접 체험한 '빠빠빠' 춤 감상해보시죠~.
"발동작 따라하기"
"점핑춤 시범보기"
"빠빠빠 완전정복"
다음은 악수회입니다.
"즐거운 악수회"
"또 오셨네요~"
"우리 팬, 짱이에요"
"저, 김효은 기자입니다."
<글=김효은 인턴기자, 사진=송효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