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spatch=이명구기자] 나이차이가 무려 38살이나 되는 멤버와 13살 때부터 밴드활동을 한 '기타천재'. '13살짜리 기타의 신'이라고까지 불렸던 주인공은 토미김이다. 한국에서 태어나 3살 때 미국으로 입양된 그는 '기타신동'에서 어엿한 대학생으로 성장해 자신의 밴드를 이끌고 있다.
토미김은 헤비메탈 밴드 '레드 헤디드 스텝차일드'(Red Headed Stepchylde)에서 13세 때 최연소 기타리스트로 활동했다. 어린 나이에 감당하기 쉽지 않을 정도로 많은 주목을 받은 셈이다. 당시 한국언론에도 보도돼 화제를 모았던 그는 요란한 관심이 사라진 이후에도 음악의 길을 묵묵히 걸어왔다.
미국인 아버지 토미 기본스 주니어와 한국인 어머니 김매선 씨의 외아들인 토미김의 미국이름은 토미 기본스 3세다. 어머니 김매선 씨는 디스패치와의 전화통화에서 "아직도 잊지 않고 아들을 기억해줘 고맙다"는 인사를 전했다. 토미김은 아쉽게도 한국말에 서툴다.
1991년 토미김은 경기도 오산의 한 병원에서 태어난 날 입양됐다. 이듬해 4월 한국에서 공군복무를 마친 아버지와 함께 미국 애리조나로 이주했다. 토미김은 겨우 3살밖에 안됐을 때 자신의 정체성에 의구심을 품었다.
아빠와 얼굴이 다르다는 사실을 인지한 것이다. 부모가 입양사실을 털어놓은 후에도 달라질 것은 없었다. 실제로 그는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부모이고 기타는 그 다음"이라고 말한다. 토미김이 기타와 운명적으로 만난 것은 만 두 살 무렵이었다.
이후 전자기타에 흥미를 갖게 된 토미김을 위해 하버지는 2001년 크리스마스 선물을 했다. 하루가 다르게 기타실력이 성장한 그는 2004년 3월 '미국 기타센터(Guitar Centers of America)' 주최 애리조나 기타 경연대회에서 2위에 입상하며 본격적으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당시 대회에서 1등을 차지한 기타리스트는 에릭 클랩턴의 백밴드에서 활약한 실력파였다.
그룹활동을 하며 프로 무대에서 경험을 쌓은 토미김은 '메탈리카'를 우상으로 삼았다. 아버지는 가장 열렬한 팬이자 후원자가 됐다. 건축회사를 운영하는 아버지는 그를 위한 연습실 겸 스튜디오를 지어주기도 했다.
토미김은 15살 때 자기그룹을 결성 리더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현재는 자신의 스튜디오에서언더그라운드 밴드들을 위해 프로듀서 역할까지 하고 있다. '기타신동'일 때와 달라진 점은 이제 노래도 직접 한다는 것이다. 물론 모두 자작곡이다.
음악을 하기 위해 대학도 방향을 선회했다. 피닉스 오브 유니버시티를 다니다 뮤직엔지니어를 전공할 수 있는 전문대학으로 학교를 옮긴 것이다. 어머니는 토미김이 학교와 투어공연 두가지를 모두 병행하느라 무척 바쁘다고 전한다.
아직 20대 청춘이지만 음악을 일찍 시작한 탓일까. 토미김은 전통 헤미메탈에서 좀 더 편안한음악으로 변화를 추구하고 있다. 연주나 노래가 여전히 강력한 파워를 근간으로 하고 있지만 누구나 즐길 수 있는 신명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전세계로 뻗어나가고 있는 K팝에 대한 토미김의 생각은 어떨까. 그는 대중성이 뛰어나고 매우 감성적인 것이 장점이라고 평한다. 음악적으로 볼 때 토미김과 K팝은 다소 거리감이 있어보인다. 하지만 토미김의 음악적 감성 속에는 면면히 한국인의 유대감이 흐르고 있다.
토미김은 페이스북을 통해(http://www.facebook.com/TommyGibbonsProject) '토미기본스프로젝트'의 음악을 소개하고 네티즌과 활발히 소통하고 있다. 기회가 닿으면 한국 밴드들과도 언제든지 교류하고 싶다며 기대감을 감추지 않았다.
'입양아' '기타' '신동' 등은 그동안 토미김의 상징 혹은 꼬리표처럼 따라다닌 키워드다. 신동의 시절은 지났고, 입양아로서 잘 성장해왔다는 감동스토리도 많이 반복됐다. 이제 그에게 남은 것은 오로지 기타와 음악 그리고 미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