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키의 새 앨범 제목을 읽어본다. '와이키키(WhyKiiiKiii)'. 하와이를 대표하는 휴양지 와이키키 해변으로부터 가져온 이름이다. 그룹의 세 번째 미니 앨범이자 여름 작품은 가상의 여름 휴양지에서 보내는 하루 24시간을 여섯 곡에 나눠 소개한다. 컴백을 예고한 웹사이트는 호텔 중개 사이트가 등장하기 전 소규모 펜션과 호텔이 소박하게 유지하던 여행 투어 패키지 그래픽으로 꾸몄다. 여행지로 향하는 항공편부터 숙박 프로그램, 여행 일정 스케줄과 투어 가이드, 소박한 리뷰까지 너무 과거 기억 속에 남아 있던 인터넷의 흔적 그대로다. 쉽사리 클릭했다가 악성 소프트웨어가 설치되고 컴퓨터가 느려질 것 같은 으스스한 기분까지 든달까.
다행히 과거의 흔적은 여름 그 자체를 만끽하는 소녀들의 발랄한 일상을 수식하는 형태로 작동한다. 타이틀곡 '팝 오프 팝 오프(Pop Off Pop Off)'의 뮤직비디오에서 햇살 가득 시원한 여름을 즐기는 키키 멤버들은 인기 인생 시뮬레이션 게임 '심즈'의 캐릭터가 된다. 수없이 늘어나는 버그 걸린 인터넷 창을 계속 건너뛰면서 이국적인 여름 휴양지에서의 즐거운 나날을 향해 달려간다. 레트로라거나 과거 유행, 노스탤지어 등의 단어조차 흐릿해진다. 어떤 요소가 사용되었는지, 어떤 노래와 어떤 시대상을 가져오고 있는지 같은 해석이 과연 필요할까? 다른 시선으로 읽어보자면, 왜 키키일까? 질문을 또 한 번 뒤집어본다. 키키는 왜?
키키는 탈출을 꿈꾸는 그룹이다. 가장 먼저 떠나고자 하는 곳은 한국이라는 장소다. '손끝엔 나비'와 '콩 무당벌레'로 강렬한 인상을 남긴 데뷔부터 Y2K 유행의 선두를 달리는 올해까지 키키의 목표는 머무르지 않는 것이었다. 도시를 빠져나온 소녀들이 뉴질랜드 자연 속에서 하고 싶은 걸 모두 이루겠다고 선언한 '아이 두 미(I DO ME)'와 캐나다 밴쿠버에서의 올 로케이션 촬영을 통해 빛나는 이국의 여름을 담아낸 '댄싱 얼론(Dancing Alone)' 모두 그랬다. 키키 세계관을 이해하는 핵심 지침서 사이트는 빛바랜 초기 웹의 원시적인 레이아웃, 화려한 원색과 클립아트, 아날로그 안내 책자와 같은 요소로 꾸며져 있었다.
여기서 키키는 물리적 공간으로부터의 도피가 아니라 현재라는 시간까지 거슬러 올라가고자 한다. 그 타임머신은 인터넷이다. Y2K 리바이벌로 대표되는 2000년대의 미감은 어렵게 발품 팔지 않아도 유튜브와 핀터레스트, 그리고 기묘하리만치 남아 있는 흔적을 찾을 수 있다. 그 시절 초등학생이었던 나는 독서를 통한 간접 경험의 필요성을 수없이 교육받으며 책을 읽었다. 이제는 인터넷이다. 윈도우 운영체제, 인터넷 익스플로러, 미디어 플레이어, 플래시 기반의 웹페이지가 흥미진진한 고고학 박물관처럼 펼쳐진다. 키키가 웹페이지 접속 시 요청한 페이지를 찾을 수 없다는 '404'를 타이틀곡으로 밀어붙인 배경이다. 곡을 시작하는 첫 번째 벌스 가사를 생각해 보자. '나 잡아봐라 / 오프 더 와이파이'다.
헷갈리지 말아야 할 부분이 있다. 키키의 목적지가 인터넷 그 자체가 아니라는 점이다. '아이 두 미'와 '404', '팝 오프 팝 오프(Pop Off Pop Off)'는 완전히 다른 장소를 배경으로 하는 것처럼 보인다. 아니다. 역할은 똑같다. 역설적으로 이 장소는 스마트폰과 SNS, LTE와 5G가 닿지 못하는 오늘과 가장 멀리 떨어져 있으며 단절된 공간이다. 과거의 인터넷 미학이 젊은 창작가들의 관심을 사로잡는 비결은 그것이 지금의 인터넷과 닮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시기에는 알고리즘이 취향을 강조하고 좋아하는 것을 추천하는 것이 아니라 데이터를 찾고 전달하는 기본적인 절차를 뜻했다. 조회수가 가치를 뜻하지도 않았다. 생태계 연속성이라는 개념도 희박했다. 생성형 AI도 없었다. 키키의 레트로를 과거를 그리워하는 감정으로 읽어서는 곤란하다. 2000년대 중후반에 태어난 멤버들이 열심히 공부하고 익혀도 체험하지 못한 과거를 그대로 소화할 수는 없다. 아니, 그렇게 역할을 수행하면 복각 혹은 박제에 그치고 말 뿐이다.
현재를 피해 가는 통로라는 점에서 '와이키키'를 다시 살펴보자. 앨범은 경계를 허물어트린다. 타이틀곡 '팝 오프 팝 오프'는 일렉트로클래시, 프렌치 터치가 더해진 전자 음악이 인터넷을 통해 공유되던 시기와 2010년대 빌보드 차트를 지배했던 케샤(Ke$ha)를 연상케 하는 팝스타의 상을 뒤섞는다. 가상의 휴양지에 도착한 소녀들은 21세기 초 한국 여학생들처럼 교복 안에 티셔츠를 입고 있다. 엄정화의 디스코와 LMFAO의 셔플 댄스가 공존한다고 해서 문제 될 건 없다. 시대 고증이 뒤섞였다고? 처음부터 키키는 고증을 염두에 두지 않은 기획이다. 겪지 않았으니 엄밀할 필요가 없고 자유로울 수 있다. 사실 그 시절을 통과한 우리들의 기억이라도 엄청나게 정확하던가. 키키는 지루한 자료 정리를 하는 팀이 아니다.
혼합 놀이는 앨범 크레딧에서 분명해진다. 해외 송캠프 및 파이프라인에서 적체를 느낀 K팝 기획자들은 최근 국내 언더그라운드와 인디펜던트 신으로 눈길을 돌리고 있다. '404'의 재치 있는 노랫말을 써낸 바밍 타이거의 오메가 사피엔은 다시 한 번 '팝 오프 팝 오프'에서 매력 넘치는 파티 걸으로 분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하이퍼팝의 흐름을 일찍부터 따라온 이소(iiso)가 작사와 작곡에 이름을 올렸다. 작년 한국대중음악상 최우수 알앤비 소울 음반의 주인공 윤다혜, 두 장의 정규 앨범을 발표한 전천후 싱어송라이터 수민도 눈에 들어온다. 수록곡은 더 주목할 이름이 많다. 앨범을 시작하는 '에버투레이트(Ever2Late!)'에는 수민과 함께 인디 Y2K 걸그룹 토마토맛, 아일릿의 '잇츠 미(It's Me)' 작사에 참여하며 일찍이 일렉트로 팝의 대유행을 몸소 실천해온 트렌드세터 더 딥(The Deep), 19살 싱어송라이터로 어른들이 지어낼 수 없는 진짜 십대 감성을 표현하는 진 초이(ZIN CHOI)가 이름을 올렸다.
가장 중요한 곡은 'Candy Pink Magic Hole Flip Phone (나 어떡해)'다. 이 곡은 지난해 하이퍼팝과 하이퍼팝을 탈출하는 일렉트로 팝 아티스트 가운데 세계적으로도 가장 뚜렷한 결과를 내놓았던 에피(Effie)의 참여로 화제를 모았다. 한국인이라는 정체성과 고향 부산에 대한 사랑을 숨기지 않으며 국제적 공조를 통해 구분 짓기를 거부하는 에피는 키키의 철학을 완성할 핵심 인물이다. '캔디 핑크 매직 홀 플립 폰'에서 분명히 명시되는 '반창고 태닝 키티', '한 칸 배터리', '까만 하늘에다 두고 와 우리 비밀' 등의 노랫말은 에피가 공개한 프레젠테이션 자료와 데모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편곡자의 이름에는 검증된 해외 팝 시장 인력들이 올라와 있어 에피가 이 지점에 대해 의문이자 불만을 토로하기도 했다. 요는 작사 이상의 많은 부분에 관여했는데 그 공을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키키의 또 다른 정체성이 보인다. 모호한 꿈결 같은 존재다. 수많은 창작가의 아이디어와 기획자의 미적 지향이 점철된 키키는 물리적 시간도 발 딛고 있는 장소도 불분명한 미지의 소녀들이다. 그래서 지난 앨범의 제목에도 쓰인 수록곡 이름이 '망상에 빠진', '비현실적인'이라는 뜻의 '델루루(Delulu)'였다. 몽롱한 세상은 번쩍거리는 하우스와 일렉트로 팝의 네온 사인 아래 흐릿해진다. 키키의 기획 방향에 대해 아이돌보다 그들을 만드는 이들의 이름이 더 자주 오르내린다는 비판이 등장하는 이유다. 그 혼란까지도 콘셉트로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과거를 그리워하는 아네모이아적 테마로 연결한다는 점이 키키 기획의 치밀함을 증명하는 포인트가 된다. 다만 갑론을박은 피할 수 없다. 아무리 아이돌이 기획 상품이라지만, 집단적 콜렉티브가 아니라 키키라는 그룹 자체에 집중해야 할 이유는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슬아 작가가 그래서 소중하다. 키키의 처음부터 팀의 이야기를 만들고 있는 그의 노랫말은 이들을 인터넷 세상 속 아바타와 AI 생성 캐릭터에서 한국의 꿈 많고 천진난만한 소녀들로 선명히 각인한다. '그라운드워크(Groundwork)'와 '딸기게임'과 같은 한국인의 놀이로 지유, 이솔, 수이, 하음, 키야가 자기 목소리를 내도록 도왔던 장본인이다. 이번에는 웹페이지에 '나는 네가 이번 여름에 한 일을…'이라는 짧은 글과 뉴잭스윙 풍의 '스윗 사워(Sweet Sour)'를 엮었다. 여름날 유독 눈에 띄는 친구를 향한 복잡미묘한 감정을 2000년대 미니홈피 풍 테마에 담고, 이를 '안 달콤하다 진실은'과 같은 표현으로 내비치며 결국 주저하며 그룹 이름을 반복하며 외치는 노랫말을 통해 키키의 세계는 참여할 틈을 내어준다.
이제야 질문에 답을 할 수 있다. 왜 키키일까? 키키만이 공동의 기억과 취향을 담아낼 수 있는 페르소나로 신속히 그룹의 정체성을 다진 덕분이다. 키키는 왜 이런 콘셉트와 존재가 되고자 하는 걸까? 우리가 키키에게 그것을 원하기 때문이다. 가장 멀리 달아나도록, 달아난 자리에서 즐겁게, 아예 떠나버리지 않고 다시 돌아와서 소중한 기억을 오래오래 간직하고, 가끔 다시 꺼내 보면서 웃음 지을 수 있도록.
김도헌 (대중음악평론가) / zener1218@gmail.com
<사진출처=스타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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