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spatch=이아진기자] "바위에 계란도, 토마토도 던져봤죠."
박지현이 말한 '바위'는 김고은이었다. 그는 믿음직한 선배 앞에서, 모든 연기를 던졌다. 마치 상연(박지현 분)이 은중(김고은 분)을 흔들며 관계를 쌓아가듯 연기했다.
그는 "고은 언니가 있었기에 할 수 있는 모든 연기를 다 해봤다"고 말했다. 김고은의 은중이 있기에 상연의 생애를 입체적으로 그려낼 수 있었다는 의미였다.
20대에는 내성적이었다. 30대에는 여유로운 겉모습 속에 낮은 자존감이 묻어났다. 40대의 상연은 시한부 선고를 받는다. 죽음을 향해 갈수록 초연해졌다.
이번 작품은 박지현에게 도전이자, 성장의 무대였다. 연기적으로도, 내면적으로도 한층 성숙해졌다. 다음은 그가 마주한 '은중과 상연',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한 이야기다.
◆ "축복 같은 대본이었다"
박지현은 작품을 고를 때 자신만의 확고한 기준을 가지고 있다. 인기나 흥행이 (선정의) 우선순위는 아니다. 마음이 움직이는 포인트가 있어야 한다.
그 포인트는 종종 일상의 취미나 철학과 연결됐다. 박지현은 "신기하게 어떠한 공상에 빠져있으면, 꼭 그와 비슷한 결의 작품이 들어온다"고 설명했다.
'은중과 상연'도 마찬가지였다. 박지현은 대본을 받을 당시는 '한 인물의 긴 생애를 표현할 기회는 배우에게 큰 축복'이라는 생각을 하던 시기였다.
그는 '유미의 세포들', '재벌집 막내아들', '재벌X형사' 등을 통해 다양한 모습을 선보여왔다. 하지만 늘 캐릭터들의 인생 중 일부만 표현할 수 있었다.
"캐릭터의 과거와 미래는 항상 상상에 맡겨야 했어요. 그런데 상연은 유년기부터 죽음까지 대본에 나와 있더라고요. 게다가 서사가 많고, 감정 폭이 큰 캐릭터에 대한 갈증까지 해소할 수 있었죠."
게다가 상대역은 김고은이었다. 고민할 시간조차 아까웠다. 박지현은 "너무나도 존경하던 선배님이었다. 작품을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고 밝혔다.
◆ "상연은, 복잡하다"
꿈에 그리던 대본, 존경하던 선배와의 작업이 한 번에 이뤄졌다. 누구보다 잘하고 싶었다. 캐릭터의 서사와 내면 구축부터 심혈을 기울였다.
'은중과 상연'은 은중의 시점으로 전개된다. 상연의 이기적인 행동이 먼저 나오고, 이유는 뒤에 드러났다. 자칫 악역으로 오해받을 수 있는 구조였다.
"시청자들에게 상연이를 효과적으로 이해시키고 싶었어요. 그래서 대본에 없는 감정과 상황까지 상상했죠. 솔직하지 못한 성격 속에 눌러둔 감정들이 겉으로도 드러나길 바랐어요."
은중과 상연의 관계성에 대해서도 깊이 고민했다. "상연에게 은중은 유일한 존재다. 가족, 친구, 연인 등 어떤 단어로도 정의할 수 없는 사이로 보였으면 했다"고 짚었다.
상연은 은중을 질투한다. 박지현은 그 원인을 애정결핍으로 해석했다. "은중이가 되면 사랑받을 수 있을 거라는 마음을 품고 연기했다"고 털어놨다.
신체적 변화도 표현하려고 노력했다. 특히 40대 상연은 암 환자다. 박지현은 "몸은 마르고, 얼굴은 부어 보였으면 했다. 2~3시간씩 울고 촬영에 들어갔다"고 전했다.
◆ "김고은이 만들어준 무대"
박지현은 현장에서도 남다른 몰입도를 보였다. 특히 40대 장면에서는 감정적으로 벅찼다. 촬영 진행이 어려울 정도로 눈물을 흘린 적도 많았다.
그는 "울음을 참는 게 고통스러울 정도로 슬펐다"며 "얼굴이 눈물로 범벅이 됐다. 바스트 신은 눈물이 메마른 뒤 마지막에 찍어야 했다"고 회상했다.
그가 감정을 쏟아낼 수 있었던 건 김고은 덕분이었다. 박지현은 "'김고은이 펼쳐놓은 무한한 무대에서 박지현이 날뛰었다'는 댓글이 공감됐다"고 말했다.
"고은 언니는 제가 어떤 연기를 해도 다 받아줬어요. 대사가 안 될 정도로 울 때는 정말 미안하면서도 고마웠죠. 그래서 이 작품으로 제가 받는 칭찬은 다 고은 언니 몫이라고 생각해요."
정작 김고은은 인터뷰에서 박지현을 "시크하고 멋있는 친구"라고 언급했다. 묵묵히 자기 할 일을 하면서 담요, 내복, 간식 등을 살뜰히 챙겨줬기 때문이다.
박지현은 "연기적으로는 해줄 수 있는 게 없었다"며 "대신 언니가 필요할 법한 것들을 조용히 챙겨줬다. 그 모습이 다소 시크하게 보인 것 같다"고 웃었다.
◆ "아직도, 상연이다"
박지현은 여전히 상연에게서 헤어 나오지 못한 모습이었다. 인터뷰 내내 상연을 떠올리며 말을 이어갔다. 사망 장면 당시의 심정을 묻자, 눈물을 흘리며 답했다.
"고은 언니가 '상연아, 사랑해'라고 애드리브를 했어요. 상연이 살면서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말이라 너무 감동적이었죠. '나도 사랑해'라고 답하고 싶었지만 죽어가는 중이라 말할 수 없어서 더 애절했어요."
모든 걸 쏟아냈기 때문일까. 사실, 촬영이 끝난 직후에는 후폭풍이 없었다. 박지현은 2달간 미국으로 휴가를 떠났다. 촬영 중 참았던 음식들을 마음껏 즐겼다.
그러다 뒤늦게 여운이 몰려왔다. 다른 작품 홍보를 돌며, 다시 상연에 잠겼다. "친구, 죽음과 관련된 질문에 저도 모르게 상연의 시점에서 답하고 있더라"고 털어놨다.
"저는 원래 온·오프가 확실한 배우라고 생각했어요. '은중과 상연' 촬영장에서도 컷 소리만 나면 밝아졌거든요. 그런데 지금 돌이켜보면 억지 텐션이었던 것 같아요. 마음은 이미 상연에게 잠식돼 있었던 거죠."
상연은 단순한 배역이 아니라, 스스로를 돌아보게 하는 캐릭터였다. 박지현은 "부러움을 인정하는 성격이 닮았다. 하지만 저는 상연이보다는 더 솔직한 편"이라고 했다.
◆ "코믹 연기도, 기대해 주세요"
'은중과 상연'은 박지현의 가치관을 바꿔 놓은 작품이었다. 그는 "내면을 더 단단하게 만들어줬다. 특히 죽음을 바라보는 시선이 깊어졌다"고 강조했다.
"예능에서 '잘 죽는 게 목표'라고 말한 적이 있어요. 죽어도 여한이 없을 만큼, 잘 살고 싶다는 뜻이었죠. 지금은 그 말의 무게를 스스로 실감하고 있어요."
시청자 평가에 대한 생각도 전했다. "빌런이라는 소리조차 반가웠다. 그런 평을 보고 작품을 찾아보는 사람들도 있을 것 아니냐"며 미소 지었다.
이어 "결국 시청자의 선택이라고 생각한다"며 "어떤 방향으로든 제 작품을 접해주시면 감사할 따름이다. 그 관심이 배우에게는 큰 힘이 된다"고 덧붙였다.
그는 앞으로 또 다른 도전을 준비 중이다. 이번엔 색다른 변신을 꿈꾼다. "다채로운 코미디 연기를 보여드리는 것이 목표"라며 "사실 이미 찍어둔 작품이 있다"고 귀띔했다.
"제가 보기보다 훨씬 재밌는 사람이에요. 주변 사람들한테 돌아있다는 말을 많이 듣거든요. 앞으로는 제 모습을 더 과감하게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사진제공=넷플릭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