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spatch=이아진기자] "피 냄새가 나빠?" (정이신)
사실, SBS-TV '사마귀 : 살인자의 외출'은 짜임새가 완벽한 작품은 아니다. 서사가 전개될수록 한계를 보여준다. 극 초반 짜릿한 심리전이, 단순 추격전으로 변질되고 있다.
그럼에도, 고현정은 남달랐다. 허술한 전개마저 압도적인 연기력으로 커버했다. '미실'(선덕여왕)의 냉철한 카리스마, '김모미'(마스크걸)의 절박한 광기를 합쳤다. 또 하나의 인생 캐릭터를 탄생시켰다.
고현정은 엄마와 살인마의 경계에 서서, 아슬한 줄다리기를 선보였다. 정이신의 웃음은 때론 소름이 돋았고, 때로는 안타까웠다. 극적인 온도 차로 숨막히는 긴장감을 선사했다.
고현정이 가장 먼저 보여준 얼굴은 '엄마'다. 연쇄살인마의 냉혹함 속에서도, 아들을 대면하는 순간만큼은 흔들리는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극 중 정이신은 모방 범죄를 자문해 주는 대가로 아들 차수열(장동윤 분)과의 만남을 요청한다. 교도소에서 형사가 된 아들과 면담한다.
고현정은 아들을 마주치는 순간부터 모성애를 섬세하게 그려냈다. "정호(수열의 개명 전 이름)구나"라고 아들을 알아보는 장면. 차갑던 정이신의 눈빛이 저릿하게 요동쳤다.
연기의 스펙트럼도 인상적이었다. 오랜 시간 쌓인 그리움을 분노로 표현했다. 아들이 선을 그을 때면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을 혐오하자 눈꺼풀을 떨며 울컥했다.
자문 장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사건의 실마리를 알려주는 말투는 담담했고, 눈빛은 날카로웠다. 하지만 그 속엔 체념과 애틋함이 동시에 느껴졌다.
고현정의 또 다른 얼굴은 연쇄살인마다. 정이신은 5명의 남성을 죽인 희대의 범죄자. 고현정은 짠한 엄마일 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극의 흐름을 바꿨다.
처음부터 광기가 스쳤다. 정이신은 살인을 회상하며 재현했다. 고현정은 눈을 감고, 살인의 쾌락을 느꼈다. 힘을 줄 때의 신음까지 표현하며 기괴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억눌린 살인 본능도 터져 나왔다. 정이신은 차분히 모방범을 취조하다가 돌연 그의 넥타이를 움켜쥐었다. 숨통을 조이고, 머리를 철창에 내리쳤다.
고현정은 깔깔거리는 웃음을 더하며 소름을 자아냈다. 형사들이 제지하자 후련한 듯 폭소를 터뜨렸다. 아들에게도 살인을 부추기며 공포를 절정으로 끌어올렸다.
고현정이 살인마의 얼굴로 변할 때면, 극의 분위기는 단숨에 얼어붙었다. 이 드라마의 장르가 가족 재회 물이 아닌, 범죄 스릴러임을 다시금 상기시켰다.
고현정의 연기를 더 짜릿하게 만드는 건 장동윤이다. 그는 엄마를 두려워하면서도 형사로 마주해야 하는 아이러니를 풀어냈다. 두 감정을 충돌시키며 긴장감을 높였다.
장동윤은 회차를 거듭하며 성장했다. 1~2화 취조 장면, 처음엔 다소 힘이 들어간 연기를 보였다. 정이신을 마주하는 두려움과, 감정을 감추려는 억지가 섞였다. 고현정에 비해 어색하다는 지적을 받았다.
하지만 3화부터는 완전히 극에 녹아들었다. 차수열은 정이신의 살인이 6번이라는 사실을 눈치챈다. 그리고 감춰진 피해자가 자신의 아버지임을 알아낸다.
옛 본가 우물에서 아버지의 유골을 발견한 장면은 압권이었다. 실소과 울음을 동시에 터뜨렸다. 그 오열 속에는 억울함과 서러움까지 뒤섞여 있었다.
이어지는 독대 장면, 차수열은 분노하며 정이신의 목을 움켜쥔다. 그러나 질식하는 얼굴은 오히려 장동윤 쪽에서 드러났다. 고현정의 섬뜩함을 도드라지게 하는 시너지 효과를 냈다.
드라마는 이제 중반부에 접어들었다. 정이신의 과거가 점점 드러나고 있다. 그는 남편의 폭력 앞에서는 무력했다. 하지만 아들을 지키려 남편을 죽였다.
정이신은 남편의 시체를 집 앞 우물에 버렸다. 그러고는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았다. 마침, 비가 내려 핏자국이 씻겨 나갔다. 그는 "죽였더니 비가 온다"며 하염없이 웃었다.
이 장면에서 고현정은 눈빛에 해방감과 광기를 동시에 담았다. 살인의 쾌락과 무너진 정신의 경계를 표현했다. 정이신이 살인에 중독되는 과정에 대한 궁금증을 자극했다.
고현정은 스릴 뿐만 아니라, 감정의 몰입까지 끌어내고 있다. 과연 정이신을 모방하고 있는 범인은 누구일까. 사건의 끝에서 정이신은 엄마로 남을까, 살인마로 남을까.
'사마귀' 4회, 형사들은 어이없게 용의자를 놓쳤다. 정이신의 탈옥도 막지 못했다. 남은 이야기는 매주 금요일 오후 9시 50분, 토요일 10시에 SBS-TV에서 만날 수 있다.
<사진출처='사마귀: 살인자의 외출' 캡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