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spatch=김지호기자] "날 추앙해요."

JTBC '나의 해방일지' 2회, 염미정(김지원 분)이 구자경(손석구 분)에게 찾아가 다짜고짜 '추앙'을 외쳤을 때, 마법처럼 '추앙'이 시작됐다. 미정에 대해, 또 김지원에 대해….

"조금 있으면 겨울이에요. 낮부터 마시면서 쓰레기 같은 기분 견디는 거, 지옥같을 거에요. 당신은 어떤 일이든 해야 돼요. 난 한번은 채워지고 싶어. 그러니까 날 추앙해요. 사랑으론 안 돼. 추앙해요." (미정)

미정은 한 마디 한 마디가 귀한 캐릭터다. 현아의 말대로 사람을 홀리려는 의지가 안 보인다. 순수하고 솔직하고 계산할 줄 모르는 여자다.

그냥, (사랑, 사람, 회사, 사회에) 갇혀 납작해진 상태.

그녀가 해방을 얻게 된 건, 자경을 통해서다. 자경에게 추앙해달라 떼썼던 미정은, 오히려 자경을 열렬히 추앙한다. 과거를 묻지도, 현재를 따지지도, 미래를 저울질하지도 않는다. 그저 응원할 뿐이다.  

그래서일까. 미정이 하는 모든 정제되지 않은 말들은 사랑스럽다. 음료수를 마시며 개구리와 짐승들 시체를 논해도, 떨어진 네일을 보며 여자 시체를 떠올려도.  

그런 미정을 연기하는 김지원은, 이 드라마 내내 빛이 났다. 죽어 있는 얼굴로 쳇바퀴 돌듯 살던 모범생이 그 시작. 점차 감정이 다채롭게 살아나며, 여러 압박으로부터 자기 자신을 표출해냈다. 

김지원을 추앙하게 된 마지막 순간은, 바로 최종회 엔딩이다. "마음에 사랑밖에 없어. 그래서 느낄 게 사랑밖에 없어"라며 해사하게 웃는 장면. 어떤 깨달음을 얻은 듯한, 성스러운 미소로 힐링을 선사했다. 

손석구 역시 추앙받아 마땅한 연기를 펼쳤다. 사실, 구자경은 연기하기 쉽지 않은 캐릭터다. 초반에는 거의 대사가 없다. 시키는 일을 하고, 그저 술을 먹으며, 무표정히 먼 곳을 바라본다.  

그의 미스터리는 10회가 넘어야 풀린다. 알고보니 그의 정체는 호스트바 마담 출신 사장. 우울증을 앓던 연인에게 조언을 건넸으나, 그 조언 탓에 연인이 극단적 선택을 했다. 

대사, 행동, 표정 모두 다른 배역에 비해 현저히 적다. 심지어 거칠고 망가졌다. (손석구가 아니었다면) 러브라인 몰입이 어려울 수도 있었다. 

그러나 손석구는 역시 손석구였다. 자경의 무표정이 미정으로 인해 점차 깨져가는 것, 가볍게 웃으며 장난치는 것, 거친 행동 안에 그리움과 사랑을 담는 것 등을 물 흐르듯 해냈다.  

특히 14회. 미정에게 3년 만에 전화를 걸어 재회하는 장면. 살며시 지은 멋쩍은 웃음에는 애정, 설렘, 아련함, 불안함 등이 모두 담겨 있었다. 모두가 벅차오른 순간이었다.  

이 드라마의 또 다른 보석은, 이민기다. 그는 경기도 어딘가에 살고 있을 것만 같은, 말 많고 시끄럽고, (언뜻) 철없어 보이는 청년 염창희로 완벽하게 분했다.  

그의 이야기는 너무나 현실적이다. 유모차 정도는 끌 자격이 되는 좋은 여자를 만나 결혼하고 싶다는 것. 돈을 많이 벌고, 좋은 차를 끌고 싶다는 평범한 욕망이다. 

그러나 창희는 차 때문에 (실은 돈 때문에) 여친과 헤어진다. 새로 다가온 썸조차 쉽사리 시작하지 못한다. 현재를 살아가는 2030이 가장 공감할 만한 캐릭터다. 

"내가 영화를 혼자 봐서 헤어진 걸로 만들고, 걔가 새벽에 딴 놈이랑 톡해서 헤어진 걸로 만들어야 돼. 절대로 내가 별 볼일 없는 인간인 거 그게 들통나서 헤어지는 게 아니라! 나도 알아. 걔가 쥘 수 있는 패 중에 내가 최고의 패는 아니라는거. 더 좋은 패가 있겠다 싶겠지. 나도 알아." (3회) 

이민기는 그런 창희의 애환을 때론 진지하게, 때론 유쾌하게 풀어낸다. 그의 주특기는 장기하에 빙의한 속사포 랩. 창희의 표현대로, 그가 목청껏 떠들 땐 희열이 느껴진다. 

예를 들어, 4회 덮밥집 신. 창희가 회사 옆자리 빌런 정 선배(최보영 분)를 욕하는 장면이다. 약 3분 동안 이어지는 긴 독백 같은 대사를 찰지게 소화해냈다.

"정 선배는 그냥 말이 많아. 말이 너무 많아. 나 죽으면 국민청원 게시판에 꼭 올려줘야 된다. 다말증 환자 얘기 듣다 스트레스로 죽음. 어떻게 외근한 날보다 사무실 나온 날이 더 힘들어. 일주일 동안 있었던 얘기 다 들어야 해. 뭐 먹었는지까지 다. 다말증 환자야. 막 말 하고 싶어 미쳐해. 내가 듣기싫어 미쳐 한다는 건 몰라. 그냥 자기만 있어. 정 선배 털어댈 땐 변상미(편의점주) 전화가 반갑다 그 정도야. 일찍 출근하는 때 있지? 똑같은 얘길 세 번씩 들어."

"나도 알아. 이번 걸로 족치면 정 선배 찍소리도 못한다는 거. 근데 왜 안 하냐? 상대하면 끼리끼리거든. 끼리끼리는 과학이고 난 여길 뜰 거거든. 정 선배랑 끼리끼리 안 할 거거든. 그래서 안 하는거야. 나도 나이스하고 양반 같은 인간들이랑 일하고 싶어. 근데 왜 못 그러냐? 내가 양반이 아니라는 거지. 왜? 끼리끼리는 과학이거든. 내가 양반 되면 정 선배랑 같이 있을래야 있을 수가 없다. 왜? 과학적으로 불가능하거든. 그래서 늘 '양반 되자, 저 인간이 양반 되길 바라지 말고 내가 양반 되자' 한다. 득도한다 내가!" (4회)

창희의 반전은 후반부에 터진다. 혁수(정원조 분)의 임종을 지키기 위해, 대박 예감이었던 군고구마 기계 사업을 내려놨다. 그 결과 빚을 얻고 고생을 했어도, 그는 자신의 선택에 후회하지 않았다. 

이민기를 추앙하게 된 대표적인 회차는 15회. 지현아(전혜진 분)에게 이별을 고하는 장면. 이어 자전거를 타고 달리다 멈춘 채 눈이 새빨개지도록 오열하는 장면이다. 

"형. 난 1원짜리가 아니고 그냥... 저 산이었던 것 같애. 저 산으로 돌아갈 것 같애."  

그 담담한 목소리에 창희의 아픔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1원짜리(77억명 인구 중 1명)로의 욕망을 멈추고, 사람들 사이에 파묻혀 평범하게 살겠다는 좌절이 느껴졌다. 

큰누나 기정(이엘 분)도 빼놓을 수 없다. 기정은 삼남매 중 가장 즉흥적이고 열정적이며, 감정에 충실한 여자다. 말 그대로, 전 회차가 러블리했다. 

"저는 관심이 가는 순간 바로 사랑이 돼요. 단계라는게 없어요. 아니, 남들은 관심이 가다가 진짜로 좋아하게 되는거 같은데, 전 조금이 없어요. 서서히가 없이, 처음부터 그냥 막 많이 좋아요." (5회) 

그래서 그녀의 사랑은 조건이 없다. '아무나' 사랑하겠다더니, 아이 딸린 이혼남 조태훈(이기우 분)에게 꽂혀 뭘 하든지 오케이다. 이런 여자가 있다면, 어떻게 추앙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근데요. 애타는 게 좋은 거에요? 왜 좋아요. 마음이 막 타는데? 남녀가 사귀는데 뭔가 가득 충만하게 채워져야지, 줄듯말듯 찔금. 밥도 그렇게 주면 살인나요. 왜 애정을 그렇게 얄밉게 줘야해요. 간질간질한게 뭐가 좋아. 시원하게 박박 긁어줘야지." (11회) 

이엘의 생활 밀착형 연기도 감탄을 유발한다. 일명 '시집 안 간 큰누나'의 클리셰를 보여주다가, 사랑스러운 사차원 연기로 시청자를 무장해제시켰다. 

덧붙여, 조연들도 빼놓을 수 없다. 개성넘치고 매혹적인 여자 지현아, 창희의 산포 친구들, 미정의 회사 친구들, 해방클럽 회원들까지… 모두 노련한 실생활 연기를 보여줬다. 

다음으로 추앙할 대상은, 이 모든 세계를 창조한 박해영 작가와 김석윤PD다. 먼저, 박해영 작가의 필력은 이미 '나의 아저씨'에서 입증된 바 있다. 당시에도 명대사 퍼레이드로 사람들을 치유했다.  

'해방일지'도 그렇다. 미정이 자경을 위로하는 그 따스한 말들이 힐링의 약이 됐다. 창희가 자신의 신세를 자조할 때, 미정이 인간에 지칠 때…. (시청자에게) 공감과 위로가 됐다. 

"전적으로 준 적도 없고, 전적으로 받은 적도 없고, 다신 그런 짓 안해. 잘돼서 날아갈 거 같으면 기쁘게 날려 보내 줄 거야. 바닥을 긴다고 해도 쪽팔려 하지 않을 거야. 세상 사람들이 다 손가락질해도 인간 대 인간으로 응원만 할 거야." (6회, 미정) 

"하루에 5분만 숨통 트여도 살만하잖아. 편의점 갔을 때 내가 문 열어주면 고맙습니다, 하는 학생 때문에 7초 설레고. 아침에 눈 떴을때, 오늘 토요일이지? 10초 설레고... 그렇게 하루 5분만 채워요. 그게, 내가 죽지 않고 사는 법." (15회, 미정)

또, 김석윤PD 덕분에 한 신 한 신이 소중했다. 삼남매의 시골집은 정겹기 그지 없었다. 회사는 일상적이었고, 술집들은 현실감이 넘쳤다. 

메시지를 전하는 법도 세련됐다. 10회, 이미 미정과 자경의 해방은 예고돼 있었다. 엔딩의 새들은 자유롭게 날았다. 두 사람은 새들을 쫓으며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10회는 마지막 회와 연결된다. 자경은 친한 형에게 돈을 빼앗겼지만 다시 돈을 준비한다. 뭘 하려고 했을까. 아마, 미정의 부탁대로 '환대' 였을 것 같다. 

자경은 한 발 한 발 어렵게, 미정의 방식대로 걷기로 했으니까. (재수없게도) 500원짜리 동전이 굴러떨어져 버렸지만, 다시 주울 수 있었으니까. 

그래서 자경은 평소처럼 산 술을 노숙자에게 줬고, 오백원짜리에 그려진 새를 보고 미소짓는다. 그를 괴롭히던 것들로부터 해방되는 순간이었다.  

우리는 모두 결핍을 가지고 있다. 남들과 같지 않아, 사회에 억지로 맞춰둔 부분도 있다. '나의 해방일지'는 그 모든 이들을 사랑, 아니 사랑보다 더한 추앙으로 위로한다. 이 드라마를 추앙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사진출처=JTB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