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spatch=박혜진기자] "이제 좀 알아주실 수 있지 않나요?"

'비중'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 그러자 돌아오는 말 1(↑). 그리고 덧붙이는 말 2(↓).

"저 그런(비중)거 따지지 않아요. 여전히 신인 같은 마음으로 살고 있습니다."

유아인, 참 (행보를) 알 수 없는 배우다. 영화 '베테랑'과 '사도'로 2,000만 관객을 모았다. 그다음 선택은 '버닝'. 흥행의 정점에서 예술을 택했다.

"주목받고 싶은 욕구보다, 좋은 작품을 통한 경험이 더 소중합니다. 제 작품에는 제 의지가 녹아 있습니다."

그 의지는, '국가부도의 날'로 향했다. 그가 맡은 역할은 '금융맨' 윤정학. '지분'을 따지자면, 1/4 정도다. 그래도 선택했다. 그래서 궁금했다.

"왜, 국가부도의 날이었습니까?" (디스패치)

영화 '국가부도의 날'은 위기를 막으려는 자와 이용하는 자, 무너지는 자의 이야기다. 유아인은 IMF에 베팅하는 역할. 위기를 이용하는 자 '2'로 볼 수 있다. 작지는 않지만 크지도 않은 역할이다. 

D. 시나리오를 처음 읽었을 때의 느낌은?

유 : 국민을 생각하지 않는 권력자들의 행태에 화가 났다. 경제위기는 IMF가 아니어도 항상 존재했다. 순간적인 기분에 매몰당할 게 아니라, 선명하게 세상을 바라봐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D. 비중이 (생각보다) 작다. 영화를 이끄는 핵심적인 역할은 아니다. 

유 : 이제 좀 알아주실 수 있지 않나 (웃음). 난, 정말 비중을 따지지 않는 사람이다. 여전히 신인 같은 마음으로 살고 있다. 크든, 작든, 내 역할을 소화하고 싶다. 작품 안에 녹아드는 것, 그래서 작품에 기여하고 싶은 마음이 크다. 이번 선택도 마찬가지다.  

D. 캐릭터와 시나리오, 무엇이 더 중요한가. 

유 : 둘 중에 하나라도 흡족한 느낌이 오면, (비중이 적어도) 선택할 수 있다. 작품에 '충분히' 공감하지 못해도, 캐릭터에 '완전히' 공감한다면, 공감대를 만들면서 작업하기도 한다. 선택 이유가 연출자일 수도 있다. 물론, 이런 요소들이 밸런스를 이룬다면 내 역할의 크기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D. IMF다. 가벼운 주제는 아닌데.

유 : '난 대한민국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지', '대한민국은 나에게 어떤 의미지'라는 고민 가져본 사람이라면, 자기 삶으로 끌고 올 수 있는 영화다. 지금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그 속에서 돈 때문에 울고 웃어본 사람이라면 얼마든지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이다.

D. 공감대? IMF의 직격타를 맞은 세대가 아니다.

유: 어찌 보면 상당히 무겁고 진지한 이야기다. 하지만 그런 상황을 대하는 인물의 자세가 있다. 현실적으로 우리 세대의 친구들에게 '어떤 감각을 만들어 줄 수 있겠다'는 생각이다. (유아인은 영화 속에서 마인드 컨트롤을 한다. '내가 속을 것 같아', '절대 안 속아'를 반복한다.)

D. 영화를 준비하면서 몰랐던, 아니 새롭게 알게 된 IMF는? 

유 : 우리 부모 세대는 뉴스에 대한 맹신이 있었다. 절대적으로 신뢰했다. 하지만 (언론은) 충분한 정보 전달하지 않았다. 그 안에서 (팩트가 아닌) 어떤 힘도 작용했다. 지금은 많이 달라졌지만…. 그런 면에서 우리는 더 똑똑(현명)하게 생각해야 한다. 이번 영화를 통해 전보다 넓은 시야를 가지게 됐다. 

유아인은 예술영화와 대중영화를 넘나들었다. 이 두 장르를 이질감 없이 소화했다. 그러나 스스로, 쉽지 않았다고 고백했다. 예술성과 상업성 사이에서 괴로웠다는 것. 

D. '버닝' 이후, 곧바로 '국가부도의 날' 촬영에 들어갔다. 

유 : '버닝'의 여운이 끝나기 전에, 새 작품에 뛰어들었다. (영화) 인물이 아니라, (작업) 환경에 적응하기 어려웠다. 난 오랫동안 기성 영화를 찍었다. 나름 즉각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순발력을 키워왔다 생각했다. 근데 '버닝'으로 무장해제된 느낌? 일반적인 영화 현장에 대한 감각을 되살리는데 어려움이 있었다.

D. 첫 촬영부터 순탄치 않았겠다.

유 : 실제로, 그랬다. 첫 촬영부터 NG를 냈다. 신입 지원자들 앞에서 설명하고 장난치고 그런 장면. 대사가 긴 것도 아닌데 '상황'에 들어가기 쉽지 않았다. 굉장히 효율적으로 이뤄지는 현장 안에서 여유를 가지고 순발력 있게 반응하기가 어렵더라. 

D. 어떻게 극복했나.

유 : '내가 그 수준의 배우는 아니구나'라고 생각했다. 반성도 했다. (제작진에) 양해를 구하고 2번째 촬영을 하루 미뤘다. 들여다보고, 연습해보고…. (나름의) 시간이 필요했다. 친구들을 불러 연설 장면을 반복해 연습하기도 했다.

D. 그때, 주변 친구들의 반응이 궁금하다.

유 : 내 친구들은, 굉장히 칼날 같다. '잘한다, 잘한다' 해주는 친구들이 별로 없다. '좀 더 신선하게 해봐',  '좀 뻔하지 않아?', '다른 느낌을 줘봐' 하면서 조언하더라.  

D. 친구들이 무섭다. 그래서 도움은 됐겠다. 

유 : (더) 좋은 연기를 끌어내려는, 욕심 있는 사람들이다. 그 누구보다 냉정한 시선을 가진 관객이라고 할까? 정말 고맙다. 친구들은 가장 큰 조력자다. 자신들의 다양한 삶을 들려주는데, (그것이) 캐릭터 선택에 지대한 역할을 미친다. 그들이 내 연기의 밑천이다. 관객들에게 전해지는 '과정'을 만들어줬다.

D. 결국, '버닝'은 득이었다, 독이었다? 

유 : '버닝' 현장에서 엄청 깨졌다. 현장에 대한 감각을 환기시키는 계기가 됐다. 마치 신인의 자세로 돌아간 기분? 성실함, 부지런함, 그런 마음을 돌아보는 과정이 됐다. 할 줄 아는 것, 익숙한 것에 안주할 게 아니라, 다양한 도전을 통해 (나를) 끌고 가겠다는 생각을 했다.

윤정학은 정부를 의심한다. 뉴스를 의심한다. 대신, 자신의 직감은 의심치 않는다. 그러다 그 예상이 맞아떨어졌을 때, 통쾌함. 그러나 (현실이) 그 예상을 벗어나지 못할 때, 씁쓸함을 느낀다.  

D. 윤정학은 기회주의자인가.

유 : 그는 공감 가능한 인물이다. (대부분) 잃는 것보다 얻고 싶어 하니까. 하지만 무언가를 가졌다고 해서 온전히 행복한 건 아니다. 후회, 또는 회한에 젖어 들 때도 있다. 윤정학은 '현명한 인생, 혹은 잘사는 인생은 무엇일까'라는 고민을 제시한다.  

D. 내적 갈등도 느껴진다. 

유 : 그 행위가 어떤 면에선 지탄의 대상이 될 수 있다. 부정적인 측면도 존재할 것이고. 윤정학은 우리 안에 내재된 욕망과 갈등의 또 다른 이름이다. 그의 인간적인 측면이 공감대를 이루길 바랐다.

D. 경제 공부도 필요했겠다. 

유 : (본질을)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일례로, '비트코인'이 오르고 내리는 걸 살펴봤다. 단순한 등락폭을 본 게 아니다. 그것이 만드는 사람들의 마음들, 감정들, 상황들을 봤다. 가볍게 여겨지지 않더라. 

D. 투자자들 앞에서 연설하는 장면을 빼놓을 수 없다. 

유 : 윤정학은 그런 현실을 먼저 바라보고, 그러지 못한 사람들을 설득한다. 그렇다면, 친절한 정보 전달은 아니지 않을까. 나의 믿음, 즉 '내가 바라보는 게 옳다'고 설파했을 것이다. 감정적으로, 에너지 넘치게…

D. 역베팅에 성공했다. 그런데 류덕환의 뺨을 때린다. "돈 벌었다고 좋아하지 마"라며. 

유 : 그게 현실인 것 같다. 죄책감은 죄책감이고, 회한은 회한이다. 그런데도 또 (다시) 그걸 추구하며 쳇바퀴 돌듯 살아가는…. (정학은) 욕망해서 살아가지만, 고통받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사람이기도 하다. 관객들에게 작게나마 울림을 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D. 연기하면서 그런 현실이 씁쓸하기도 했겠다.

유 : 더 좋은 상품들, 더 좋은 기술들이 나오는데 빈부격차는 점점 심해진다. 만족보다 결핍을 가져갈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참 어려운 것 같다. 결국 '내가 무엇을 추구할 것인가', '무엇을 가진 사람이 될 것인가', '오늘을 살 것인가 내일을 살 것인가'…. 정답을 제시할 수 없지만, 더 넓은 시야, 더 정확한 정보를 통해 선택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D. '국가부도의 날'은 정답을 제시하나?

유 : 문제 제기는 누구나 할 수 있다. 단, 뚜렷한 해결방안이 없기에 무력감을 느낀다. 이 영화도 문제를 제기한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해 의문을 품게 한다. 그래도 의문을 외면하는 것보다 의문과 맞닥뜨리는 것이 더 나은 내일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의문.

IMF는 끝났다. 하지만 끝나지 않았다. 그날 이후, 가진 자는 더 가졌다. 잃은 자는 다 잃었다. 정리해고, 비정규직, 계약직…. 낯설지 않은 이 경제용어의 시작도 IMF다. 심지어 금수저와 흙수저마저.

D. 영화는 만족하나.

유 : 발란스가 참 좋다고 생각했다. 영화는 절대적인 기준에 놓고 평가할 수 없다. 주어진 상황, 캐스팅, 환경, 여건, 현실 등을 고려해야 한다. 균형을 참 잘 맞췄다는 느낌을 받았다. 

D. (스포일러) 갑수(허준호 분)가 공장을 재가동한다. 그저 따뜻했던 사람이, 변했다. 특히 외국인 노동자를 대하는 모습이….

유 : 유의미한 장면이라 생각했다. 지금 세대는 기성세대에 대한 원망과 의문이 있다. 하지만 그냥 그런 사람이 되는, 사람은 없다. 가슴 아픈 시기, 돈에 집착할 수밖에 없는 삶, 그것이 좌우하는 행복. 우리 기성세대들은 어떻게 기성세대가 됐을까. '독하다' 이런 말로 표현할 게 아니라, 그런 성질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이런 심적인 이해가 필요한데, 영화가 (그걸) 가져갈 수 있도록 제시한다.

D.선배들의 연기를 보는 건 어땠나. 

유 : 정말 프로페셔널한 분들이다. 김혜수 선배는 또 다른 차원의 힘과 에너지를 보여줬다. 허준호 선배는 존재 그 자체가 만드는 감정이 있다. 아무 말 하지 않아도 상황과 인물이 설명된다. 조우진 선배는 정말 날카롭고 예리하다. 표현의 형태나 섬세함, 힘이 정말 뚜렷하다. 전달되는 효과 자체가 놀라웠다.

D. 연기를 더 잘하고 싶었겠다.

유 : 내 역할 자체가 선배들과 상관없이 진행된다. 그분들을 의식하지 않는 선에서 연기하고자 했다. 그분들의 연기를 선명하게 봤다면 아마도 떨지 않았을까. 선배들의 존재만 느끼려 했다. 그것이 정학을 독립적으로 가져가는 데 효과적이라 생각했다. 

D. 마지막 질문이다. 배우 유아인이 가장 추구하는 것!

유 : '가장’을 추구하지 않는 것을 가장 추구한다. 전부, 최고, 1등과 같은 절대성과 싸우는 것 같다. 순간이 만드는 절대성도 있겠지만, (우린) 순간만 살지 않는다. 지금, 이 순간을 대하는 삶을 위해 애쓰는 삶이 아닌…. 말 자체에 모순이 있지만, 모순조차 받아들이려 한다. 결국, 다양한 가능성을 열어두고 싶다.

D. 다시 마지막. 유아인 앞에 붙이고 싶은 수식어는?

유 : 어떤 수식을 붙여도 어색하지 않은 배우. 한 동생이 그랬다. "형은 현실적이기도 하고 이상적이기도 하다. 세속적인 것 같으면서 딴 세상 사람 같기도 하다. 뭐든 두려워하지 말고 재밌게 하세요." 진짜 고맙게도. 내 안에 '내가 될 수 있는 다양한 사람'의 느낌이 있다.

'어떤' 수식어가 붙어도 어색하지 않고, '없던' 수식어를 붙여도 기대할 수 있는, 그런 배우로 다가가고 싶다. 내 작품이 하나가 아닌 것처럼, 내 성질이 하나가 아닌 것처럼, 오늘만 있고 이 순간만 있지 않은 것처럼, 다양한 기대를 품게 하는 배우가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