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조가 사도세자를 죽인 임오화변. 이것은 익숙한 이야기이다. 수많은 영화와 드라마를 통해 반복 또 반복돼왔다.
그렇다면 이건 어떨까. 영조가 '아들바보'이자, '강남엄마' 뺨치는 극성 부모였다면? 사도세자가 이에 따라가지 못해 갈등을 겪었다면?
2015년, 영조 부자가 좀더 새로운 옷을 입고 나왔다. 영화 '사도(감독 이준익)가 바로 그것. 대부분의 에피소드를 실제 기록에서 찾아 재연했다.
'사도' 속 장면과 역사를 직접 비교했다. 90% 이상의 사실을 역사에서 찾았고, 10%를 허구로 채웠다.
P.s. 이 기사에는 스포가 다량 포함돼 있습니다.
◆ 사도의 어린시절 |
① 신동 아기세자 : 세자는 어린 나이에 영조와 조정 대신 앞에서 글씨를 썼다. 이어 한 대신에게 글씨를 하사한다. 영조와 대신들은 굉장히 기뻐했다.
☞ 역사 : 세자 나이 3세였는데, 행동거지가 의젓했다. 임금 앞에서 '효경'을 펴고 '문왕(文王)'이란 글자를 송독했다. '천지왕춘'(天地王春)이란 글자도 썼다.
임금이 이르기를 "네가 주고 싶은 사람을 가리키라"고 했다. 세자는 도제조 김흥경을 가리켰고, 임금은 웃으며 "세자도 대신을 아는구나"라고 했다. (영조 13년 2월 14일, '영조실록')
② '사치' 에피소드 : 아기 사도세자는 무명옷은 검소한 것이고, 사치는 자신이 입은 비단옷이라고 했다. 영조는 어린 아들의 총명함에 크게 만족한다.
☞ 역사 : "천자문을 배우시다가 사치 치 자를 집고, 입은 옷을 가리켜 '이것이 사치'라고 하셨다.", "모신 이들이 비단과 무명을 놓고 묻자 '비단은 사치', '무명은 사치가 아니다'고 하셨다" (한중록, 현륭원지문)
◆ 갈등의 시작 |
① 공부를 게을리하다 : '사도'에서 영조는 사도에게 하루 동안 얼마나 공부하냐고 캐묻는다. 사도가 "1~2시진"이라 답하자, "정직해서 좋다"며 혀를 끌끌 찼다.
☞ 역사 : "임금이 '12시 안에 네가 책읽기를 좋아하는 마음은 얼마 정도 되느냐?' 하니, 세자가 대답하기를, '1, 2시입니다'고 했다.
(중략) 그러자 임금은 '이는 정직한 대답이다. 마음을 속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다'고 했다." (영조 23년 10월 3일, '영조실록')
② 사도는 그림마니아? : 영화에서 사도세자는 그림그리기를 좋아한다. 실제 역사에서도 마찬가지다. 사도세자가 그렸다는 개 그림이 전해진다.
☞ 역사 : "큰 개를 향해 반갑게 달려가는 작은 개와, 무덤덤한 큰 개가 영조 부자의 관계를 잘 표현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서울대 국문학과 정병설 교수, '궁궐의 개, 사도세자의 개')
"세자께서 활쏘기, 칼 쓰기, 기예붙이를 능히 즐기셨다. 경문과 잡서를 좋아하셨다. 이런 잡일에만 관심을 두시니 어찌 강학이 온전하리오?" (한중록)
◆ 영조의 결벽증 |
① 아들을 미워한 아버지 : 대궐 어른들은 혜경궁 홍씨에게 영조의 성격을 설명해준다. '한중록'에서 모티브를 얻은 것으로, 사실은 혜경궁 홍씨가 직접 적은 내용.
☞ 역사 : "(영조가) 동궁을 부르시어 '밥 먹었냐'고 물은 다음, 경모궁(세자)께서 대답하시면 그 자리에서 귀를 씻으시고, 씻으신 물을 당신(영조)이 사랑치 않는 화협옹주 있는 광창(창문) 쪽으로 버리시니라." (한중록)
"일 보시며 입으신 옷은 갈아입고 나서야 안으로 들어오신다. 불길한 말씀을 나누거나 들으시면 양치질하고 귀를 씻으신다. 또, 좋은 일과 좋지 않은 일을 하실 때 출입하시는 문이 다르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 집에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함께 있지 못하게 하신다." (한중록)
② 능행 배행을 막다 : 영화에서 영조는 사도와 숙종 능행을 떠난다. 하지만 도중에 비가 오자 "너 때문에 그렇다"며 돌아가라 일갈한다.
☞ 역사 : 실록과 한중록의 기록이 다르다. 실록에서는 세자가 비를 맞자, 영조가 몸을 조리하러 가라고 한 것으로 묘사된다. 영화는 한중록의 이야기를 따른 셈.
"세자는 소나기가 내리자 병세가 생겼다. 영조는 '차가운 비에 젖어 그런 것이니 가마를 타고 돌아가도록 하라'고 명했다." (영조 34년 8월 1일, 영조실록)
"소나기가 쏟아지자 대조(영조)께선 '날씨 이런 것이 전부 동궁의 탓이라! 도로 들어가라'고 하셨다. 세자는 화증을 진정시킨 후에 돌아와 '점점 살 길이 없노라'고 한탄하셨다." (한중록)
◆ 대리청정 |
① 사사건건 트집 잡기 : 대리청정 이후 갈등은 폭발했다. 영조는 세자가 결정한 일은 '자신에게 의논하지 않는다'며 화를 냈다. 반대로 자신에게 물어오면 '그런 것도 알아서 하지 못하느냐'고 질책했다.
☞ 역사 : "경모궁(세자)께서 영조께 취품(웃어른께 여쭘)하시면, 영조께서는 '그만한 일을 혼자 결단치 못하니 대리 시킨 보람이 없다'고 꾸중하셨다.
그런데 또 중요한 일을 취품치 않으면, '그런 일을 어찌 취품치 않고 스스로 결정했는가'라고 꾸중하셨다.
저리한 일은 이리 아니하였다 꾸중하셨고, 이리한 일은 저리 아니하였다 꾸중하셨다. 이 일에도 격노하시고, 저 일에도 뜻 같지 않다 하셨다.
천재지변이라도 있으면 '소조(세자)에게 덕이 없어 그렇다'고 꾸중하셨다. 그러니 겨울에 천둥이라도 치면, 영조께서 무슨 꾸중을 할까 근심하셨다.
사사건건 두려워 떨고, 이로 인해 나쁜 생각을 하시니, 이것이 병환의 싹이었다." (한중록)
◆ 사도의 정신병 | 영화에서는 어머니와 할머니의 연이은 죽음에 충격을 받고, 미쳐버린 것으로 전했다. 하지만 실제 역사에서는 두 사람의 죽음이 5년 차이가 난다.
또한, 엽기적인 행각의 강도도 좀더 약하게 그려냈다. 기록에는 사도세자가 100여 명 이상을 무차별 살인한 것으로 적혀 있다.
① 의대증 : 사도세자는 옷을 제대로 입지 못하는 병이 있었다. 아버지인 영조에게 가고싶지 않다는 마음이 정신병으로 발생했다.
☞ 역사 : "옷을 입으려 하시면 10벌, 2~30벌을 해 놓아야 한다. 그마저도 잘 입지 못하시면 귀인인지 무엇인지를 위해 불태우신다.
갈아입으시면 다행이지만, 옷을 입지 못하시는 경우가 많았다. 시중드는 이가 조금이라도 잘못하면 사람이 다친다." (한중록)
② 광기 : 영화에서 사도세자는 미신에 심취한다. 옷을 입다 눈이 돌아가 내관을 죽인 적도 있다. 그 목을 들고 화완옹주에게 내보이기도 한다.
☞ 역사 : "왕손의 어미(빙애)를 때려 죽이고, 여승을 궁으로 들였으며, 서로에 행역(서쪽으로 놀러 가고)하고, 북성으로 나가 유람했는데, 이것이 어찌 세자로서 행할 일이냐?
(중략) 왕손의 어미를 네가 처음에 매우 사랑하여 우물에 빠진 듯한 지경에 이르렀는데, 어찌하여 마침내는 죽였느냐?
그 사람이 아주 강직하였으니, 반드시 네 행실과 일을 간(諫)하다가 이로 말미암아서 죽임을 당했을 것이다." (영조 38년 5월 22일, 영조실록)
"세자가 중관, 내관, 노비 등을 죽여 거의 100여 명에 이르고, 낙형 등이 참혹하고 잔인한 모양이 말로 할 수 없다." (대천록)
"(세자가) 1757년 6월부터 화증이 더하시어 사람 죽이기를 시작하시니라. 그때 장번내관 김한채라 하는 것을 먼저 죽이셔서, 그 머리를 들고 들어오셔서 내인들에게 둘러 보이셨다." (한중록)
"점치는 맹인들도 점을 치다 말을 잘못하면 죽이니, 의관이며 호위 무관이며 그밖의 아랫것들 가운데도 죽은 것도 있고 병신된 것도 있느니라. 대궐에서 하루에도 죽은 사람 여럿을 져낼 때가 있으니, 안팎으로 두려워 심히 말들이 많더라." (한중록)
◆ 임오화변 |
① 칼을 빼들고 아버지에게 향하다 : 사도세자는 비가 오는 날, 칼을 빼들고 영조가 있는 침전으로 향한다. 그 곳에서 본 것은 자신의 아들(정조)과 영조의 대화. 결국 사도세자는 눈물을 흘리며 도로 돌아간다.
☞ 역사 : 세손과 영조의 대화를 듣고 돌아왔다는 이야기는 사실이 아니다. 기록에는 사도세자가 정신이 나간 상태에서 저지른 일로 표현된다.
"경모궁(세자)이 수구를 통해 윗대궐(영조가 머물고 있는 궁궐)로 가신다 하다 못 가시고 도로 오셨다. 상황이 이러니 어찌 허황된 소문인들 나지 않으리오.
경모궁께서 정신을 잃고 인사도 모르실 적 홧김에 하시는 말씀이, '병기로 아무리나(어떻게) 하려노라', '칼 차고 가서 아무리나(어떻게) 하고 오고 싶다' 하셨다.
조금이나마 온전한 정신이면 어찌 부왕(영조)을 죽이고 싶다는 극언까지 하시리오." (한중록)
② 영빈 이씨의 고변 : 보다 못한 세자의 친모 이 씨가 직접 영조에게 간언한 것으로 그려진다. 이는 사실이다.
"(이씨가 영조에게) 세자가 내관, 내인, 하인을 죽인 것이 거의 100여 명입니다. 기생, 비구니와 주야로 음란한 일을 벌였습니다. 궁궐 후원에 무덤을 만들어 감히 말할 수 없는 곳을 묻고자 하기도 했습니다.
지난번 제가 창덕궁에 갔을 때 몇 번이나 저를 죽이려 했는데, 겨우 제 몸의 화는 면했습니다만 임금의 몸을 생각하니 어찌 감히 사실을 아뢰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정병설 교수, '권력과 인간')
③ 아버지가 아들을 죽이다 : 결국 영조는 결단을 내린다. 종묘사직 보전을 위해 사랑하는 자식을 죽이기로 결정한 것. 단, 역적으로 처리하지는 않았다. 세손인 정조를 왕위에 무사히 올리기 위해서였다.
☞ 역사 : 사실에 가깝다.
"영조가 칼을 들고 연달아 차마 들을 수 없는 전교를 내려 동궁의 자결을 재촉하니, 세자가 자결하고자 하였는데 여러 신하들이 말렸다. 임금이 이어서 폐하여 서인을 삼는다는 명을 내렸다.
(중략) 세자가 곡하면서 다시 들어가 땅에 엎드려 애걸하며 개과천선하기를 청하였다. 임금의 전교는 더욱 엄해지고 영빈이 고한 바를 대략 진술하였는데, 영빈은 바로 세자의 탄생모 이씨다." (영조 38년 윤5월 13일, 영조실록)
④ 뒤주에 갇힌 8일 : 어린 세자(정조)와 세손빈은 물그릇을 들고 뒤주를 찾아간다. 사도세자는 극심한 목마름에 부채에 오줌을 받아먹기도 한다.
☞ 역사 : 먼저 세손의 이야기는 사실이 아니다. 세자가 뒤주에 갇히자마자 혜경궁 홍씨 및 세손은 홍봉한의 집으로 출궁했다. 따라서 물그릇을 전해줄 수 없었다.
부채 이야기는 야사를 각색한 것. 야사에는 세자가 적은 뒤 뒤주에서 반으로 접힌 부채가 나왔다고 전해진다. 이 부채에 소변을 받아먹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사진출처='사도' 스틸·예고편 영상캡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