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spatch=이아진기자] "연기 인생에 의학 드라마도 하나 남기면 어떨까." (김지원)
배우에게는 저마다의 길이 있다. 한 장르에서 자신만의 색깔을 굳히는 배우가 있다. 반면 장르의 경계를 넘나들며 끊임없이 새로운 얼굴을 보여주는 배우도 있다.
김지원은 후자다. 그는 익숙한 자리에 머무르지 않는다. 작품마다 새로운 캐릭터를 만나며 연기의 폭을 넓혀왔다. 로맨스부터 판타지, 사극까지. 장르를 가리지 않고 변신을 거듭했다.
이번에도 새로운 도전에 나섰다. SBS-TV '닥터X : 하얀 마피아의 시대'(이하 '닥터X')로 데뷔 후 첫 메디컬 드라마에 출연한 것. 압도적인 카리스마와 절제된 감정 연기로 인기를 끌고 있다.
'디스패치'가 그의 연기 인생을 되짚어봤다.
◆ "로코퀸의 탄생"
데뷔 초반부터 존재감이 남달랐다. 2011년 MBC-TV '하이킥! 짧은 다리의 역습'에서 여고생 김지원을 연기했다. 청순한 외모에 당찬 말투. 풍부한 표정으로 눈도장을 찍었다.
SBS-TV '상속자들'(2013)에서는 유라헬 역을 맡았다. 차갑고 도도한 재벌가 상속녀였다. 얄미운 행동 속에 사랑에 서툰 소녀의 감정을 녹였다. 미워할 수 없는 악역을 완성했다.
KBS-2TV '태양의 후예'(2016)는 첫 전환점이었다. 군의관 윤명주 역으로 학생 이미지를 벗었다. 진구(서대영 역)와 군인 커플의 로맨스를 펼치며, 큰 인기를 끌었다.
방송 전부터 메인 커플 못지않은 관심을 모았다. 김지원이 흔들리는 눈망울로 진구를 붙잡는 37초 티저 영상에 네티즌 반응이 끓어올랐다. 본 방송에서도 정확한 딕션과 섬세한 감정 연기로 화제를 모았다.
김지원의 활약은 첫 로맨스 주연으로 이어졌다. KBS-2TV '쌈, 마이웨이'(2017)에서 아나운서를 꿈꾸는 최애라로 분했다. 그간 쌓아온 경험을 십분 살렸다.
능청스러운 말투와 코믹한 표정으로 웃음을 유발했다. 거칠고 억척스러운 모습마저 사랑스럽게 선보였다. "귀여운 척하는 게 아니라 귀엽게 태어난 건데"라는 유행어까지 남겼다. 차세대 로코퀸의 탄생이었다.
◆ "안주를 거부하다"
로코퀸의 다음 스텝은, 사극이었다. 안전한 선택 대신 영화 '조선명탐정: 흡혈괴마의 비밀'(2018)에 출연했다. 기억을 잃은 묘령의 여인 월영을 연기했다.
이후 tvN '아스달 연대기'(2019)에서는 판타지에 뛰어들었다. 고대 부족의 후계자 탄야 역이었다. 낯선 세계관 속에서도 탄야의 성장사를 차근차근 쌓았다. 해맑던 소녀가 운명을 받아들이며 단단해지는 과정을 그렸다.
카카오TV '도시남녀의 사랑법'(2020)에서는 이은오와 윤선아, 두 얼굴을 연기했다. 공허한 표정과 반짝이는 눈빛을 오가며 상반된 매력을 보여줬다.
JTBC '나의 해방일지'(2022)에서는 또 달라졌다. 반복되는 일상에 지친 염미정으로 분했다. 단조로운 표정과 나지막한 목소리로 사회에서 움츠러든 청춘을 그려냈다.
특히 "날 추앙해요"라는 대사는 작품의 상징이 됐다. 낯선 단어에 억눌린 울분과 사랑받고 싶은 갈망을 실었다. 절제된 감정 연기로 시청자의 마음을 울렸다.
김지원이 다양한 인물을 선보인 비결은 도전 정신이다. 그는 인터뷰마다 "새로운 캐릭터를 만날 때마다 설렘과 두려움이 공존한다"며 "그러나 그 두려움을 넘어섰을 때 오는 성장의 가치를 믿는다"고 강조해왔다.
낯선 역할에 대한 부담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갈 가능성에 무게를 뒀다. 그렇게 거듭한 도전은 김지원의 연기를 더욱 단단하게 만들었다. 진정성 있는 배우로 성장하게 만들었다.
◆ "흥행퀸으로 거듭나다"
tvN '눈물의 여왕'(2024)은 그간의 내공이 집약된 작품이었다. 퀸즈그룹 재벌 3세 홍해인 역을 맡았다. 당당한 태도와 화려한 비주얼로 시청자들의 시선을 끌었다. 그의 의상과 액세서리까지 연일 화제가 됐다.
무엇보다 섬세한 감정 연기가 빛났다. 백현우(김수현 분)와의 관계 변화에 따라 감정의 결을 달리했다. 무심한 표정 속에 애정을 숨기며 애증 어린 로맨스에 설득력을 더했다.
시한부 선고 이후에는 절절한 눈물 연기로 극을 이끌었다. 14회, 자신을 찾아온 백현우에게 "자꾸 살고 싶게 하지 말라"며 오열하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김지원은 삶에 대한 미련과 이별의 두려움을 동시에 터뜨렸다. 자포자기한 듯 가라앉았던 목소리는 끝내 오열로 번졌다. 안방극장도 눈물바다로 만들었다.
결과는 글로벌 신드롬이었다. 최종회 전국 시청률 24.9%로 tvN 드라마 역대 최고 기록을 갈아치웠다. 넷플릭스 비영어 TV 부문에서도 10주 연속 글로벌 톱10에 올랐다.
◆ "필모그래피의 확장"
'눈물의 여왕' 이후 김지원의 차기작에 모두의 관심이 쏠렸다. 그가 2년 만에 한 선택은 예상 밖이었다. 메디컬 드라마 '닥터X'를 통해 천재 외과의사 계수정으로 변신한 것.
김지원은 과거 한 인터뷰에서 "작품을 선택할 때 바둑을 두듯이 하고 싶다. 눈앞의 한 수가 아니라, 게임이 끝나는 순간까지 멀리 봤으면 한다"고 말한 바 있다.
'닥터X'는 그가 내디딘 또 하나의 수였다. 이전에 보여준 적 없던 얼굴을 꺼냈다. 흔들림 없는 눈빛과 단단한 발성으로 캐릭터의 강단을 살렸다. 권력에 굴하지 않는 의사를 설득력 있게 그려냈다.
"그쪽만 사람이야? 환자도 사람이야" 등의 교과서 같은 대사도 자연스럽게 내뱉었다. 지나치게 과장된 억양과 표정을 쓰지 않았다. 담담하지만 묵직한 톤으로 통쾌함을 높였다.
계수정의 엉뚱한 반전 매력도 능청스럽게 풀어냈다. 디저트 앞에서는 안광을 채웠다. 설교하는 상사 앞에서 눈 한 번 깜빡하지 않고 컵라면을 해치웠다.
그의 승부수는 이번에도 성공적이다. '닥터X'는 6회 만에 전국 시청률 19.5%를 찍었다. SBS 역대 금토 드라마 시청률 5위. 파죽지세를 이어가고 있다.
천재 의사 계수정이 어떤 환자든 살려내듯, 김지원 역시 어떤 장르든 살려낼 수 있음을 증명했다. 그의 다음 수가 어디로 향할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어떤 선택이든 기대하게 만드는 것. 그것이 그가 쌓아온 필모그래피의 힘이다.
<사진출처=SBS, tvN, KBS, JTB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