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spatch=정태윤기자] 미래의 서울, 버려진 로봇들이 사랑에 눈을 뜬다. 공상과학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서 가장 보편적인 감정을 끌어올린다.
프로그래밍이 되지 않은 감정을 깨닫는 순간, 실제 인간보다 더 선명히 마음을 드러낸다. '어쩌면 해피엔딩'의 감동은 그 순간부터 시작된다.
사랑을 조심스럽게 알아가고, 설렘을 느끼고, 어렴풋한 두려움에 흔들리다가, 처음 마주한 외로움까지. 가장 순수한 형태의 감정을 날 것처럼 꺼낸다.
이 모든 것은 한 여름의 반딧불처럼 결국 끝이 존재한다. 그럼에도 두 로봇이 서로를 향해 걸어가는 모습은 묘한 서글픔과 감동을 남긴다.
'어쩌면 해피엔딩'은 그 감정을 차곡차곡 섬세히 쌓아간다. 115분 동안 모두가 아는 이 감정이 왜 여전히 아름다운지 증명해 낸다.
'디스패치'가 지난 29일 서울 종로구 두산아트센터 연강홀에서 열린 '어쩌면 해피엔딩'을 관람했다. 재연에 출연한 전성우와 초연부터 함께한 최수진이 각각 올리버와 클레어로 나섰다.

◆ 영광스러운 10주년
'어쩌다 해피엔딩'은 인간을 돕기 위해 만들어진 헬퍼봇 올리버와 클레어가 사랑이라는 감정을 알아가는 과정을 그린 작품이다.
'윌휴 콤비'인 윌 애런슨과 박천휴 작가의 대표작이다. 지난 2015년 트라이아웃 공연, 이듬해 초연을 거쳐 지난해까지 총 5시즌 공연했다.
대학로에서 시작해 지난해 브로드웨이에 진출했다. 제78회 토니 어워즈 6관왕을 달성했다. 작품상, 극본상, 작곡작사상, 연출상, 무대디자인상, 남우주연상 등이다.
한국 작가가 공동 집필하고, 한국에서 초연되었으며, 한국을 배경으로 한 창작 뮤지컬이 토니 어워즈에서 수상한 건 처음이다.
영광의 10주년 무대를 한국에서 펼쳤다. 350석에서 550석으로 극장 규모를 키웠다. 치열한 티켓 경쟁률에도 중극장 규모를 택했다. 소규모 3인극의 정체성을 잃지 않기 위해서다.
인기와 비교했을 때 턱없이 작은 공연장이다. 그러나 덕분에 특유의 섬세한 매력은 유지했다. 관객들은 숨을 죽이고 올리버와 클레어의 이야기에 귀 기울였다.

◆ 어쩌면, 완벽한 넘버
미래를 배경으로 하지만, 따뜻한 어쿠스틱 사운드로 감성을 자극했다. 무대 옆에는 라이브 쳄버 오케스트라가 놓였다. 피아노와 바이올린 2대, 비올라, 첼로, 드럼으로 구성됐다.
오케스트라는 두 로봇이 사랑에 빠지는 과정에 촘촘한 서사를 부여했다. 24개의 넘버에 서정적인 노랫말을 담아 두 로봇의 변화를 고스란히 전했다.
올리버의 성격을 소개하는 넘버 '나의 방 안에'로 경쾌하게 시작해, 올리버의 주인을 찾아 제주도로 떠나는 두 로봇의 여정을 담은 '드라이빙', '사람들로부터 배운 것'
올리버와 클레어가 감정을 알아가기 시작한 넘버 '반딧불에게', 사랑을 깨달은 '사랑이란'과 '퍼스 타임 인 러브', 영원한 건 없다는 걸 안 두 사람의 슬픔을 담은 '그럼에도 불구하고'와 '그것만은 기억해도 돼'까지.
감정을 점점 쌓아올라가는 넘버들로 구성해 사랑을 입체적으로 표현했다. 낯선 감정의 시작, 마법같은 사랑, 두려움과 슬픔. 유한성을 알고도 사랑을 선택하는 과정을 균형 있게 풀어내며 눈물샘을 자극했다.
소품 하나도 허투루 쓰지 않았다. LP 플레이어, 화분, 어설픈 종이컵 전화기, 반딧불이까지. 아날로그적 사물들은 로봇의 감정에 가장 원초적인 온기를 불어넣었다.

◆ 어쩌면, 완벽한 연기
10주년을 위해 역대 출연자들이 총출동했다. 초연에 함께한 올리버 역의 김재범, 클레어 역의 전미도와 최수진, 그리고 제임스 역의 고훈정.
지난 2018년 재연 올리버 역의 전성우와 클레어 박지연, 2021년 올리버 역의 신성민과 지난해 출연한 클레어 박진주, 제인스 역의 이시안 등이 함께했다.
10주년 공연에는 정휘(올리버 역), 방민아(클레어 역), 박세훈(제임스 역) 등이 새롭게 합류했다. 이날은 전성우와 최수진이 연기 합을 맞췄다.
두 사람은 로봇 특유의 부자연스러운 움직임을 살리면서도, 감정의 흔들림과 온기를 동시에 그려냈다. 최수진은 클레어의 감정을 균열을 세밀히 표현하며 초연 때부터 이어온 호흡을 다시 증명했다.
전성우는 올리버의 순수함을 유쾌하게 그려냈다. 절망에 가까운 감정에 치달을 땐, 폭발하듯 하면서도 정제된 얼굴을 그려냈다. 감정을 갖게 된 로봇을 차곡차곡 쌓아 올리며 연기했다.
엔딩 때 두 배우의 얼굴은 눈물로 퉁퉁 불어있었다. 그만큼 120% 몰입하면서도 흔들림 없는 라이브를 선보였다. 객석을 울음바다로 만들었다.

◆ 어쩌면, 완벽한 이야기
'어쩌면 해피엔딩'이 가진 이야기의 힘은 대단하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보편적 감정을 두드리며, 백발백중 관객들의 눈물 버튼을 저격했다.
박천휴와 윌 애런슨 작가는 "사람들이 점점 더 기계에 의존하는 게 당연한 시대에 이 두 로봇의 이야기를 상상했다"며 "두 로봇을 통해 되려 사람으로서 살아간다는 게 어떤 것인지 돌이켜 보게 한다"고 말했다.
미래의 이야기를 기계적 사운드가 아닌 아날로그 음악으로 표현한 이유도 거기에 있다. 피아노와 현악기, 레코드 플레이어의 바늘이 타닥거리는 소리로 극을 채웠다.
이야기들도 작고 소소하다. 무작정 떠나는 여행, 어느 여름밤에 만난 반딧불이, 그리고 그 모든 것이 반짝이다 사라져 버리는 순간들. 마치 반딧불이처럼 말이다.
'어쩌면 해피엔딩'은 열린 결말이다. 각자의 해석은 다르겠지만, 뮤지컬을 보고 나면 누구나 같은 여운을 품게 된다. 사랑이란 결국 끝날 것을 알면서도 서로를 향해 한 걸음 더 내딛는 마음이라는 것.
'어쩌면 해피엔딩'은 내년 1월 25일까지 두산아트센터에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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