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spatch=정태윤기자] JTBC '백번의 추억'의 양희승 작가는 "사랑과 우정을 모두 지켜내는 두 주인공의 여정을 통해 깊이 있는 성장 메시지를 전하고 싶다"고 말했다.
결과적으로는 그 어느 것도 제대로 지켜내지 못했다. 우정의 서사를 정교하게 쌓아 올린 뒤, 마지막에 로맨스로 허물어버렸다.
여성의 연대가 중심이던 이야기는 남자의 선택을 기다리는 멜로로 변했다. 그 변화는 성장이 아닌 퇴행처럼 비춰진다.
'백번의 추억'은 애초에 여성들의 우정을 전면에 내세운 작품이었다. 그러나 후반부로 갈수록, 흔한 삼각관계로 수렴됐다.
결국 작가는 둘 다 지키는 법을 찾지 못했다. 사랑도, 우정도, 끝내 설득력을 잃었다.
'백번의 추억'은 처음엔 단단했다. 영례(김다미 분)와 종희(신예은 분)는 가난하고 불안정한 시대 속에서도 서로를 구하고, 서로의 버팀목이 되어줬다.
집안에 어려움이 생겼을 때 자신의 급여를 선뜻 내어주고, 가정 폭력에는 대신 싸우고, 회사의 부당함에는 힘을 합쳐 맞섰다.
우발적으로 벌어진 사고 앞에선 "나한테 맡기고 도망가라"며 모든 걸 대신 짊어질 줄 아는. 1980년대, 순수한 소녀들의 우정이 따뜻하게 빛났다.
다른 듯 닮은 두 사람이 서로의 빈칸을 채워갈 때, 시청자들은 흔한 로맨스보다 더 깊은 감정의 결을 느꼈다. 하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단단함은 흔들렸다.
우선, 사랑의 짝대기부터 상당히 복잡하다.
영례의 첫사랑은 재필(허남준 분) → 그러나 재필은 종희를 좋아했다 → 두 사람은 사귀었다가 헤어졌다 → 7년 뒤 영례와 재필이 이어졌다.
친구의 애인을 좋아하는 이야기는 흔하다. 대부분 우정·질투·경쟁을 자극하며, 결국 자신을 찾아가는 내면적 이야기로 귀결된다.
'백번의 추억'은 이 고전적 설정에서 우정과 사랑을 동시에 잡으려 했다. 그러나 결국 둘 다 놓쳤다. 감정선이 흔들리며 방향도 잃었다.
서로의 결핍을 채워주던 두 사람은 한 남자를 사이에 두고 흔들리는 인물로 소비되고 말았다. 로맨스에는 설렘보다, 허무함이 앞섰다.
10회, 영례와 재필의 관계는 급전개된다. 영례는 짝사랑을 끝내고 자신의 마음을 표현했고, 재필은 오랜 시간 곁을 지켜준 영례의 마음을 깨닫는다.
'백번의 추억'에서 첫사랑의 의미는 특별하다. 그러나 첫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감정의 비약을 정당화하긴 어렵다. 매력적이지도, 논리적이지도 않았다.
친구의 엑스와 연인이 된 이야기. 머리로는 이해가 안 돼도, 설레면 그만이다. 이건 드라마니까. 그러나 영례와 재필의 로맨스는 머리로도, 가슴으로도 이해되지 않는다.
영례와 종희의 절절했던 우정은 어디로 갔을까. 꼭 로맨스를 끼워넣어야 했을까. 서로를 구하던 쌍방 구원 서사는, 결국 사랑 앞에서 흔들리는 습자지 같은 우정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무엇보다 문제는 감정의 흐름이 아닌 타이밍이었다. 시청자는 그들의 사랑을 응원하기보단, "왜 지금?"이라는 질문부터 던지게 된다.
정현(김정현 분)의 등장과 종희의 선전포고가 없었다면, 이들은 여전히 제자리였을 것이다. 그렇게 우정의 여운은 사라지고, 사랑의 이유는 설득력을 잃었다.
게다가 재필이 두 사람의 관계를 흔들 만큼의 매력을 지녔는지도 의문이다. 그는 둘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며 자신의 마음을 깨닫는 데에도 더디다.
반면 영례 곁에는 정현(김정현 분)이 있었다. 정현은 위기의 순간마다 도움을 주며 감정의 서사를 쌓았다. 자신의 마음을 깨달은 순간부턴 직진했다. 재필과 대비되며, 그의 짝사랑이 더 로맨틱하게 느껴졌다.
'백번의 추억'은 종영까지 2회만을 남겨두고 있다. 예고편에는 영례와 종희가 (뜬금없이) 미스코리아 대회에 출전하는 모습을 담았다.
미스코리아는 종희의 오랜 꿈이었다. 가난과 폭력의 굴레 속에서도 사람들을 울리고 웃기고 감동 주고 싶다는, 소녀의 바람이었다.
그런데 그 무대 위에 영례까지 서 있었다. 영례는 사랑에 이어, 이젠 친구의 꿈까지 끼어든 꼴이 됐다. 종희는 영례에게 "또 페어플레이 해보자"고 말한다.
서로의 결핍을 채워주던 친구가, 지금은 서로의 시험지가 됐다. 드라마는 이들을 어디까지 밀어붙이려는 걸까. 끝에서 다시 손을 잡을 수 있을까.
'백번의 추억'은 18일 오후 10시 40분 11회를 방송한다.
<사진출처=JTB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