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spatch=김지호기자] 진부하지만, '인생 연기'라는 수식어를 붙이지 않을 수 없다. 일란성 쌍둥이가 서로인 척 하며 살아가는 설정을 완벽하게 소화했다.
미지, 미래, 미지인 척 하는 미래, 미래인 척 하는 미지까지…. 1인 2역, 아니 1인 4역을 정교하게 해냈다. 19년 간 쌓아온 연기 내공을 폭발시켰다.
물론, 쉬운 일이 아니었다. 자신의 연기 인생에, 가장 어려운 숙제. 스스로도 "첫 촬영 전에 진짜 도망가고 싶었다"고 고백할 정도였다.
이 빛나는 성과에는, 배우 박보영의 열정이 녹아 있었다.
"시청자 분들께서 제가 그냥 2번 나오는 것으로 생각하시면 어쩌나 걱정했어요. (대중이) 미래와 미지를 구분해주실 때, 너무 좋았습니다."
'디스패치'가 최근 서울 강남구 BH엔터테인먼트 사옥에서 tvN '미지의 서울'의 주인공, 박보영을 만났다. 그의 1인 2역 도전기를 들었다.
◆ "1인 2역, 부담스러웠다"
박보영은 '미지의 서울' 출연에 대해 "무작정 질렀다"고 털어놓았다. 대본이 너무 좋았다는 것. 탄탄한 스토리, 위로가 되는 대사 등이 마음에 꼭 들었다고 밝혔다.
"대본을 보자마자 너무 욕심이 나더라고요. 많은 사람들이 이 드라마로 인해 공감과 위로를 받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러나, 걱정이 밀려들었다. 그도 그럴 게, 같은 얼굴로 다른 사람을 만들어내야 했다. 평범한 20대 여성들을 연기하는 만큼, 연출에 기댈 수도 없었다. 오로지 연기력으로만 승부해야 했다.
"아! 정말 부담감이 컸죠. 출연을 결정하고 난 다음에야 '어떡하지?' 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과연 내가 할 수 있을까 물음표였어요. 촬영하면서도 많은 고비를 겪었고, 실패를 느꼈습니다."
다행히, 반응이 뜨겁다. 박보영은 "제 TV 드라마가 너무 오랜만인데, 감사하게도 좋은 반응이 많다. 손가락 바쁘게 (댓글을) 찾아보고 있다"고 미소지었다.
◆ "미지와 미래를 만든 디테일"
미지와 미래, 같은 얼굴의 다른 두 사람은 어떻게 탄생했을까? 박보영은 "감독님과 1인 2역에 대해 각자의 그림을 맞춰보는 시간을 가졌다"고 떠올렸다.
박신우 감독이 박보영에게 주문한 건, 디테일이었다. "1인 2역이라고 너무 다르게 하려 노력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고 강조했다. 일부러 안 쓰는 톤을 억지로 내지 말아달라는 것.
"기본적 셋팅값은 차이를 뒀습니다. 미래를 연기할 땐, 제 지극히 개인적인 톤으로 소화했어요. 가족들과 말할 때, 혹은 혼자 있을 때 같은…. 미지는 제가 연기할 때 흔히 쓰는 톤을 준비했죠."
그는 "미지와 미래가 서로 바뀌었을 때도, 서로인 척을 그렇게 열심히 하지 않는다"며 "미지가 미래의 직장에 갈 때가 걱정이긴 했다. 톤을 미지와 미래 사이, 그 어딘가로 뒀다"고 설명했다.
"헤어와 메이크업 디테일, 눈치채셨나요? 미래는 머리를 깔끔히 하나로 묶고, 미지는 꼬랑지를 좀 남겨요. 미래는 점막까지 아이라이너를 다 채우고, 미지는 끝만 그려요. 미지는 화장을 잘 못 하거든요."
◆ "쌍둥이 덕분에, 성장했다"
미지와 미래가 맞닿은 신 비하인드도 들을 수 있었다. 촬영장에는 미래와 미지 역을 소화하는 대역 배우가 존재했다. 박보영은 미지와 미래를 모두 대역에게 선보여야 했다.
"만일 제가 미지를 먼저 연기하게 되면, 리허설 할 때는 미래를 연기해요. 미래를 어떻게 할 건지 (대역 배우에게) 보여드리는 거죠. 그러면 대역 분들께서 최대한 제 연기를 외워주시죠."
박보영은 "촬영이 끝나면 환복을 하고, 미래 버전으로 머리를 다시 한다"며 "미래가 되면, 아까의 미지 역할을 다시 대역 배우 분께서 해주시는 것"이라고 부연했다.
"CG 작업을 하면, 아예 (대역이) 안 계신 게 좋을 때도 있어요. 저와 눈높이가 안 맞을 때도 있고요. 그럴 땐 스탠드를 세우고, 제 눈높이를 표시한 후 혼자 연기했습니다."
박보영은 "이런 작업은 처음이었다. 정말 어렵더라"며 "덕분에 많이 성장한 것 같다. 이제는 상대방의 눈을 보고 하지 않는 연기도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미소지었다.
◆ "공감의 힘을 느꼈다"
이날 박보영은 "좋은 대사가 너무 너무 많다"며 눈을 반짝였다. 휴대폰 메모장을 꺼내, 직접 감동 받았던 부분을 읽기도 했다.
"좋다고 생각한 부분을 다 적어놨거든요. '왜 인간은 날 가장 지켜야 할 순간에 스스로를 공격하는 걸까?', '나한테 남은 날이 길어서 아무 것도 못하겠어'…. 명대사가 너무 많아요!"
박보영은 "연기하며 미지와 미래의 상황에 너무 공감되는 것들이 많았다"며 "저조차 연기하며 위로를 많이 받았다"고 말했다.
그는 "남의 인생은 나보다 더 좋은 것 같다. 하지만, 들여다보면 제각기 고충이 있다"며 "이 점을 서로 이해하게 만드는 게 우리 드라마의 큰 매력 같다"고 덧붙였다.
"어제는 끝났고, 내일은 멀었고, 오늘은 아직 모른다…. 이 말도 너무 좋았어요. 저도 가끔, 어제 촬영이 잘 안 되면 (그 기분이) 이어지거든요. 그럴 때, 실생활에서 많이 되뇌었습니다."
◆ "이미지, 바꾸고 싶었다"
박보영의 최근 행보는, 그의 심경 변화를 알린다. '콘크리트 유토피아'(2023),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2023), 그리고 '미지의 서울'까지. 상큼 발랄을 벗어던지는 선택들이다.
그는 "일부러 (내면 연기가 강조되는 작품을) 많이 택한 게 맞다"고 답했다. "전에는 밝고 통통 튀는 캐릭터를 많이 해왔다"며 "나름 배우로 오래 했는데, 한 가지 이미지로 굳혀지는 게 아닐까 싶었다"고 전했다.
"제 안에는 미래 같은 모습도 있고, 다른 모습도 있어요. 뭔가 보여드려야 하지 않을까 했죠. 또, 다른 분들이 제 작품을 보며 공감과 위로를 받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고요."
차기작에서도, 박보영의 색다른 모습을 만나볼 수 있다. 디즈니+ '골드랜드'가 바로 그것. 박보영 피셜, 어둠의 끝장을 찍는다. "어두운 거 너무 힘들다. 차차기작은 다시 밝은 것으로 하고 싶다"고 웃었다.
"근 2년 동안, 제가 많이 차분해졌어요. 다시 텐션을 올리는 방향으로 살짝 바꿔보고도 싶어요. 위로를 드리는 것도 좋고, 즐거움을 드리는 것도 좋아요!"
◆ "좋은 배우가 되고 싶다"
EBS 청소년 드라마로 데뷔해, 19년 간 한 길을 걸어왔다. 내년이면 꼭 데뷔한 지 20주년이 된다. 박보영은 "제가 20년을 (연기) 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고 말했다.
"데뷔할 땐 맨날 감독님한테 혼났거든요. 집에 가면 '이 길은 내 길이 아냐' 하고 울기도 했고요. 외부 환경으로 연기하기 힘들 때도 있었고요. 그런데, 정신차려보면 (연기) 하고 있더라고요."
그는 "너무 감사한 일이다. 그냥, 연기가 제 운명이었나보다 생각하기도 한다"며 "긴 시간 동안 작품을 계속 할 수 있다는 건, 그래도 제가 못 하고 있지는 않다는 것 아닌가 한다"고 겸손한 태도를 보였다.
이어 박보영은 "20년을 돌아보니, 그래도 나쁘지 않았던 것 같다"며 "이제야 겨우, 조금 성장했다는 생각이 든다"고 미소지었다.
"배우로서 제 역할은, 제가 대본을 읽고 느낀 마음을 시청자 분들께 전달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장르가 변하고, 캐릭터가 달라지더라도요. 앞으로도 잘 하고 싶어요."
<사진제공=BH엔터테인먼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