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spatch=이아진기자] "저는 스타가 아닙니다. 그렇게 쓰지 말아주세요."
무명 생활만 10년이었다. 지난 2015년 영화 '조류인간'으로 데뷔했지만, 이름도 없는 '낯선 2' 역할이었다. 이후로도, 단막극과 조연만 전전했다.
정준원은 늘 연기를 갈망했다. 준비는 100% 되어 있었다. 언제든 무대가 주어진다면 흔들림 없이 해낼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기회는 좀처럼 허락되지 않았다.
막막한 시간 속에서도 주저앉지 않았다. 조급해하지 않고, 자신만의 속도로 묵묵히 걸었다. 그렇게 쌓은 시간의 끝에서, 2019년 SBS 드라마 '브이아이피'의 '차진호' 역으로 얼굴을 알리기 시작했다.
"이 일이 너무 좋으니까 포기는 못하겠더라고요. 스스로 (잘 될 거라고) 최면을 많이 걸었어요. 저까지 저를 의심해 버리면 아무도 저를 믿을 사람이 없을 것 같았거든요."
그렇게 2025년 마침내 장편극 첫 주연 자리를 꿰찼다. 그는 오랜 시간 다져온 안정적인 연기를 펼쳤다. 준비된 배우답게, 바로 대세 반열에 올랐다.
'디스패치'가 최근 강남구 청담동에서 정준원을 만났다. 그의 인생에 전환점이 된 드라마 '언젠가는 슬기로울 전공의 생활'(이하 '언슬전')의 이야기를 들었다.
◆ 인생 남주, 구도원
'언슬전'은 '슬기로운 의사생활' 시리즈의 스핀오프. 든든한 동료들 덕에 긴장은 덜했다. "혼자 끌어가는 작품이 아니었다. 믿음 가는 연기자들과 함께해서 생각보다 부담감은 없었다"고 전했다.
드라마는 1년 차 산부인과 전공의들의 성장 과정을 그렸다. 정준원은 4년 차 레지던트 구도원을 연기했다. 후배들을 다정하게 이끌어주는 천사표 선배다.
극 중 '오이영' 역을 맡은 고윤정과 로맨스를 펼쳤다. 미녀 배우 상대역은 쉽지 않았다. 아무리 신경 써도, 외적인 케미스트리를 맞추기 어려웠다. 초반에는 이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도 있었다.
"윤정이 외모가 워낙 신의 영역이라, 연기라도 최대한 잘하려고 노력했어요. 회를 거듭할수록 연기력으로 (로맨스를) 설득했다는 댓글이 되게 위안이 됐던 것 같아요."
기억에 남는 신도 꼽았다. 오이영이 놀이터에서 구도원을 위로하기 위해 욕을 하는 장면. 정준원은 "촬영 날, 날씨까지 너무 좋았다. 온도와 습도마저 완벽했다. 그런 부분까지 화면에 담겨서 좋다"고 회상했다.
신원호 크리에이터는 제작발표회에서부터 정준원을 히든카드라고 자랑했다. 이유 있는 자신감이었다. 구도원은 많은 시청자 마음 속에 인생 남주로 등극했다.
"제가 구도원을 연기하면서 가졌던 목표가 딱 하나였거든요. '내 주변에 구도원 같은 사람 1명 정도는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게 하자. 구도원의 다정하고 멋있는 모습들이 시청자 분들에게 어필이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 현실 선배, 정준원
정준원은 현실에서도 구도원처럼 다정한 선배로 통한다. 그는 "남자 친구든, 여자 친구든 다 잘 지내는 게 좋다. 굳이 불화를 만들지 않는 성격"이라고 밝혔다.
'언슬전' 촬영 현장에서도 마찬가지였다. 1년 차 역할을 맡은 후배들 사이에서 호구 선배를 자처했다. 나이와 경력을 다 제쳐두고, 격 없이 친구처럼 지냈다.
"나이가 많다는 이유만으로 불편한 사람이 될 수도 있잖아요. 그걸 빨리 없애고 싶었어요. 후배들한테 차라리 만만한 사람이 되는 게 좋겠다 싶었죠."
다정하지만, 대문자 T였다. 그는 "동료들이랑 정이 많이 들어서, 마지막 촬영 날 너무 서운했다"면서도 "남자라서 눈물은 흘리지 않았다"고 결연한 눈빛으로 말했다.
시종일관 차분했던 그가 유일하게 흥분했던 순간이 있었다. 바로, 과거의 연기를 떠올릴 때였다. "흑역사라고 생각했던 장면들이 (유튜브에) 올라올 때마다 식은땀이 난다"며 온 몸으로 부끄러움을 표현했다.
엠비티아이는 ISTP와 ISTJ를 왔다 갔다 한다. 부드러운 말투와 성격을 제외하면 구도원과 사뭇 다른 매력도 많다. 특히, 구도원은 계획적이지만, 정준원은 프리하다.
그는 "갓생 사는 성격은 전혀 아니다. 쉬는 날에도 친구들 만나거나, 운동하러 가거나 계획 없이 움직인다. 구도원처럼 특별한 루틴을 가지고 살지는 않는 것 같다"고 짚었다.
◆ 잠깐, 관심 받는 사람
정준원은 인터뷰 내내 '스타'라는 말에 격하게 손사래를 쳤다. "자기 객관화가 잘 되어있는 편"이라며 "지금 잠시동안만 관심받는 것 뿐"이라고 겸손한 태도를 보였다.
하지만 잠깐치고는 주변 반응이 너무 뜨거웠다. 친구들 사이에서도 '구도원 선배'로 불리기 시작했다. 작품을 보고 오랜만에 연락이 오는 지인들도 수두룩했다.
그는 지금의 인기에 상당히 얼떨떨해했다. 왜냐하면 '언슬전'의 메인은 1년차 전공의들의 성장기라고 생각했기 때문. 서브 역할인 본인에게 관심이 쏟아질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이렇게 큰 관심을 가져주실지 전혀 몰랐어요. 정말 꿈처럼 설레는 시간이었습니다. 평생 잊지 못할 6주가 될 것 같아요."
배우로서 인정받는 순간들은 행복할 수 밖에 없었다. 그는 "이렇게 화제성 있는 캐릭터를 해본적이 처음이라 신기하다. 좋은 댓글 보면 엄마한테 자랑하기도 한다"며 웃었다.
정준원은 배우라는 직업에 늘 진심이다. 반짝 스타보다는 잔잔한 롱런을 희망한다. 원하는 차기작을 묻는 질문에도, 앞으로 오래오래 연기 할 수 있기만을 바랬다.
"역할의 크기에 상관하지 않고 좋은 작품, 좋은 역할을 연기할 수 있는 기회가 계속 유지됐으면 합니다. 그게 예전에도, 지금에도 가장 큰 꿈이자 목표입니다."
<사진제공=에일리언컴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