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spatch=김지호기자] 먼저, (평범한) '나'를 감동케 하는 대본인지 묻는다. 그 이외의 것은 따지지 않는다. 출연을 결정하면, 우직하게 캐릭터에 몰입한다. 

"나라면 어땠을까? 내가 그 캐릭터라면 어떻게 했을까?"

계속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진다. 그렇게 답을 구한다. 아니, 얻는다. 촬영이 끝나더라도, 칭찬에 휩쓸리지 않는다. 자만하지 않고 스스로를 반성한다. 

오직 연기 하나로, '국가대표'의 수식어를 얻은 배우. 이병헌의 연기관이다. 

"흔한 말이지만 화석이 되고 싶지 않습니다. 연기를 오래 했다고 습관처럼 하고 싶지 않아요. 엉뚱하다면 엉뚱하게, 창의적이라면 창의적이게 표현하고 싶죠." (이병헌)

그래서, 그의 시도는 언제나 새롭다. 

이병헌은 올봄 tvN '우리들의 블루스'로 안방극장을 울렸다. 3일부터는 영화 '비상선언'으로 관객을 만난다. 360도 돌아가는 비행기 안에 탑승, 재난에 맞서 싸운다. 

'디스패치'가 지난달 28일 화상 인터뷰로 이병헌을 만났다. '우블'에 이어 '비상선언'으로 관객을 만나는 소회를 들었다.  

(※ 이 기사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 "나라면 어땠을까?"…질문이, 곧 시작이다

'비상선언'은 항공 재난 영화를 표방한다. 그러나 찬찬히 들여다 보면, 기시감이 든다. 재난에 대처하는 인간 군상은, 팬데믹과 우리 사회의 이야기였다. 

이병헌이 '비상선언'에 끌린 이유도, 이것. "예측 못할 상황(테러)과 마주했을 때, 사람들이 상황을 헤쳐가는 방법이 다르다. 시나리오을 보며 여러가지 생각이 들었다"고 밝혔다.

"인간이 이기심을 드러내는 순간도 있고, 반대로 희생 정신이 발현되는 순간들도 있습니다. 대본을 읽으며 '내가 할 수 있는 선택이 과연 무엇일까?' 하는 의문이 들더군요." 

이병헌은 "많은 재난 영화들이 히어로를 등장시키고, 슈퍼파워(초능력)로 이겨낸다. 그래서 결국 해피엔딩으로 끝난다"고 부연했다. 그러나 '비상선언'은 결이 다르다는 것. 

"크랭크인이 시작되고, 팬데믹을 겪어야 했습니다. 너무 걱정스러죠. 그때, '비상선언'이 코로나 시국과 맞닿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팬데믹 시대를 겪고 난 뒤, 편집본을 보니 더 놀라웠습니다."

그는 "극한의 이기심도 이해가 됐고, 숭고한 열정과 희생도 이해가 되더라"며 "인간성을 잃어가는 시대, 생각할 지점을 주는 영화라 매력적이었다. 관객 분들도 마찬가지이실 것이라 예상했다"고 덧붙였다. 

"어떤 분들은 시사회를 보고, 제게 '너무 몰입이 심해 숨이 막힌다'는 평을 해주셨습니다. 의도치 않게도 팬데믹 때문에 영화를 보는 느낌 자체가 특이해져 버린 것 같아요. 좋은 일이죠." 

◆ "잘 표현 됐으면"…주목할 연기 포인트  

이병헌이 연기하는 '재혁'은 비행기 공포증을 가진 전직 파일럿이다. 어린 딸을 데리고 하와이행 비행기에 올라탄다. 예상치 못한 테러에 맞서 싸운다.

그는 파일럿 역을 위해, 김남길(최 부기장 역)과 호흡을 맞췄다. "김남길과 시간을 내 항공 수업을 받았다. 이론 수업, 시뮬레이터 조종 연습 등을 해봤다. 실제 파일럿이 운행하는 모습도 본 적이 있다"고 떠올렸다.

"실제로 조종할 줄 아는 게 중요한 건 아니었고요. 파일럿들이 기기를 만지는 손길, 손의 모습, 터치 스킬, 시선을 어디에 두고 동작하는지 등을 유심히 살펴보는 것에 주력했습니다."

까다로울 것이라 예상한 설정은, 공황장애. "흔들리는 눈빛, 굳어진 표정, 불안해하는 표정이 다 보여져야 한다고 느꼈다"며 "이런 감정을 계속 가진 상태로 연기하는 게, 힘들면서도 관건이겠다 싶었다"고 짚었다. 

이어 "실제로 내가 20대 중반에 비행기에서 공황장애 증상을 겪어본 적이 있다"며 "한편으로는 이미 아는, 겪어본 증상들이라 잘 표현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설명했다. 

마지막 연기 포인트, 부성애를 표현했다. 이병헌은 "실제 제 아들과 비슷한 또래 여아의 아버지 역이다"며 "딸의 아버지로서는 (섬세함이) 다르다. 주변 딸 아빠들을 많이 관찰하게 되더라"고 전했다.  

(예비) 관객들을 위한 스포일러. 이병헌이 가장 신경쓴 장면은, 비행기가 큰 위기를 맞은 순간이다. 

"모든 승객이 패닉 상황일 때, 재혁이 자기도 모르게 본능적으로 나섭니다. 이후 공황장애를 확 느끼는데, 이 부분이 참 어려웠어요. 잘 표현됐으면 좋겠다고 소망했습니다." 

◆ "우린 이미 할리우드급"'비상선언'의 볼거리들

'비상선언'의 가장 큰 자랑. 150석 가량 되는 거대 비행기를 세트장에 그대로 재현했다. 러닝타임 중간에는 360도 돌아가는 비행기가 손에 구슬땀을 쥐게 한다. 

그는 "실제 비행기 의자들과 소품들, 인테리어 등을 다 떼다 공간을 만들었다"며 "심지어 조종실에 있을 땐, 실제 비행기 앞에서 찍은 것들을 LED로 틀어줬다. 내가 진짜 비행하고 있는 느낌을 받았다"고 회상했다.

"저 역시 연기할 때 (기술력에) 큰 도움을 받았습니다. 우리나라의 영화 기술력은 할리우드와 비교했을 때 전혀 모자란 것도 없고, 똑같다고 보여지는 느낌입니다. 스스로 할리우드 급이라 생각합니다."

360도 회전 촬영에 대해서도 "비행기를 움직이는 장치를 한국에서 직접 만들었다. 할리우드에서도 이런 큰 비행기 (세트)는 돌려본 적 없다더라. 우리가 첫 시도이고, 처음으로 만든 것"이라 강조했다. 

"승객 분들의 머리카락이 하늘로 솟구칩니다. 사람들이 바닥과 천장으로 떨어지죠. 관객 분들은 4D가 아니더라도, 실제 탑승객이 된 것 같다는 느낌이 드실 겁니다. 그 정도로 몰입감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이병헌은 함께 출연한 배우들에 대해서도 큰 자부심을 느끼고 있었다. 송강호, 전도연, 김남길, 김소진, 임시완 등을 하나 하나 열거하며 칭찬했다. 

"아무리 시나리오가 좋아도, 작품 결과는 알 수 없는 경우가 많죠. 함께 캐스팅된 배우들이 훌륭하면 자신감이 생깁니다. 영화가 더 많은 사랑을 받을 수 있으니까요.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이었습니다." 

◆ "타성에 젖기 싫다"…이병헌이 바라는 배우

이병헌. 그 이름만으로도 신뢰를 주는, 몇 안 되는 배우다. 연기력은 더 말하면 입 아플 정도. 여기에, 연기에 대한 애티튜드가 "이래서 이병헌이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그는 이날, '우리들의 블루스'에서 함께 했던 고두심과 김혜자의 이야기를 꺼냈다. "두 분이 연기 스타일이 다르신데, 공통점이 있다"며 "두 분을 보며 제가 반성하는 순간들이 있었다"고 밝혔다.

"두심 쌤(선생님)은 촬영장에서 수십 번을 리허설하세요. '나는 저렇게까진 하지 않았는데…' 하고 반성했죠. 혜자 쌤은 (인물의) 정서에 그냥 계속 빠져 계세요. 당신도 모르게 툭, '아이 불쌍해. 못됐어' 하는 말씀을 하십니다. 이야기 안에 빠져 사시려고 애를 쓰시죠. 두 분을 보며, 내가 참 게을렀구나 생각했습니다."

이병헌의 확고한 연기 신념은, 고인물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 그는 "타성에 젖는 것이 정말 싫다"고 강조했다. 

"제가 오래 됐다고 해서 '아 이 신? 이렇게 하면 되지' 하며 관습적으로 연기하고 싶진 않습니다. 그 캐릭터에 온전히 빠져들어야 해요. 그래야 반짝 하고 제 안에서 무언가 나옵니다. 전 그걸 표현하고 싶어요." 

그는 작품 이외의 것은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이 칭찬이라면 더더욱….

"칭찬을 의식하면 잘해야겠다는 부담감이 커지죠. 그러면 제 것을 제대로 보여줄 수 없어요. 어깨가 무거워지면 그 만큼 (몸이) 굳어지니까요. 제가 릴렉스되야 베스트를 보여줄 수 있다고 생각해요."

연출 욕심이나, 원하는 장르에 대한 질문에도 손사래를 친다. "연출 같은 재능은 없다. 미리 어떤 장르나 역할을 하고 싶단 생각도 안 한다"며 "아무 정보 없는 상황에서 대본을 접해야 판단을 제대로 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래서 이병헌은, 천상 배우다.  

"저는 평범한 감성을 가진 사람입니다. 작품을 결정할 땐 (평범한) 제가 푹 빠졌는지, 아님 아무리 읽어도 겉도는지 봅니다. 다른 생각 안 하려고 합니다. '이 캐릭터라면 이럴 것' 이라는 생각에 온 신경을 집중합니다. '비상선언' 역시 제가 빠져들었고, 깊게 몰입한 작품이었습니다. 여러분도 이 감정을 느끼셨으면 합니다."

<사진제공=BH엔터테인먼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