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덕혜옹주'(감독 허진호)의 흥행으로, 다시 주목을 받는 인물이 있습니다.

한때 인터넷을 강타했던 '얼짱 왕자' 이우(1912~1945)인데요. 영화에서는 꽃미남 배우 고수가 이우 역을 맡았습니다.

이우 왕자는 고종 황제의 다섯째 아들인 의친왕의 차남입니다. 덕혜옹주와는 고모·조카 관계이고요.

이우 왕자는 1917년 흥선대원군의 장손 이준용이 죽은 후, 당숙의 양자로 입적됐습니다. 운현궁의 4대 종주가 됐는데요.

어린 시절부터, 일제의 삼엄한 감시 속에서 살았습니다. 잘생긴 외모와 영민한 머리로, 주목을 받던 황족이었습니다.

이우 왕자는 11살 때인 1922년, 일본으로 끌려갔습니다. 육군사관학교와 육군대학을 졸업하고, 일본군 장교가 됐습니다.

당시 일본은 조선 황족을 일본 군인으로 만들었습니다. 일제 치하를 정당화하려는 도구로 이용했는데요.

결혼도 마음대로 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일본 정부는 조선 황족에, 일본여성과의 결혼을 강요했는데요.

1933년 12월 13일. 한일 양국을 놀라게 한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이우 왕자는 언론을 통해 '친일파' 박영효의 서손녀 박찬주와 결혼을 발표했습니다.

일본인과의 결혼을 피하기 위한, 고육지책이었습니다. 친일파라도, 조선인과 결혼해 황족의 자존심을 지키려 했습니다.

하지만, 결혼 외에는 아무 것도 마음대로 할 수 없습니다. 뛰어난 인재였기에, 일본의 눈엣가시로 여겨졌습니다.

실제로 이우 왕자는 일본 정보장교로 활동하면서, 독립운동을 했습니다. 일본 쪽의 정보를 독립군에게 넘긴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이우 왕자는 볼모처럼 일본과 중국 등을 떠돌아다녔습니다. 나라를 지키지 못한 것에 대해 늘 미안해하면서 말이죠.

그는 1945년 6월, 몸이 아프다는 핑계를 대고 귀국했는데요. 한 달만에 다시 일본으로 떠나야했습니다.

일본이 이우 왕자를 보낸 곳은, 히로시마였습니다. 한 달 후인 8월 6일.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떨어졌습니다.

이우 왕자는 원폭 당일, 다리 아래에서 흙투성이로 발견됐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 숨을 거뒀습니다. 향년 33세.

그리고 얼마 후, 일본은 세계에 항복을 선언했습니다. 1945년 8월 15일, 이우 왕자의 장례식이 치뤄졌습니다.

이우 왕자는 아직도 일본에 있습니다. 2007년, 야스쿠니 신사에 묻힌 사실이 뒤늦게 확인됐습니다.

야스쿠니는 일왕을 위해, 사망한 군인과 군속 246만여 명이 합사된 곳인데요. 일본 측은 "죽은 시점에 일본인이었기 때문에, 황족인 이우가 합사됐다"고 입장을 밝혔습니다.

영원히 고국을 그리워했던 이우 왕자. 아직도, 고국의 땅을 밟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진출처=EB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