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spatch | 부산=정태윤기자] "저에게 선물을 줄 줄 몰랐어요. 못된 주인이죠." (류승룡)
배우 류승룡은 늘 달렸다. 1970년생, 인구가 가장 많던 세대다. 경쟁은 일상이었다. 도태되면 끝이라 믿었고, 달리는 것밖에 몰랐다.
가만히 있으면 밀려난다는 강박도 컸다.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발레, 한국무용, 피아노를 배웠다. 연기에 도움이 된다면 뭐든 배웠다.
보이지 않는 미래가 두려웠고, 생계도 걱정해야 했다. 결혼을 하고, 영화를 시작하고, 사랑을 받고, 책임감이 커졌다.
그렇게 쉰을 넘겼다. 그는 "채근하고 밀어붙였다. 후회 없이 살았지만, 다독여주고 기름도 넣어줘야 하는데, 비로소 이제야 저에게 선물을 주는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털어놨다.
류승룡이 9일 오후 부산 해운대구 우동에서 열린 액터스 하우스의 주인공으로 나섰다. 자신의 연기 인생을 되짚었다.
# 심장이 뛰었다
시작은 중학교 때였다. 우연한 기회로 국립극장에서 연극 '파우스트'를 봤다. 어려운 작품이었지만, 장면들이 스틸컷처럼 머릿속에 각인됐다.
그는 "'시네마 천국'을 보는 아이처럼 심장이 뛰었던 기억이 난다. 고등학교 때 연극부가 있는 학교에 입학해 꿈을 키웠다"고 말했다.
더 깊이 공부하고 싶어 대학교도 연극과에 진학했다. 그는 "군대에서도 연기를 쉬지 않았다. 공연 '난타' 무대에도 오래 섰다"고 떠올렸다.
영화로 눈을 돌린 건 1990년대였다. '너에게 나를 보낸다',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초록물고기' 같은 작가주의 영화들이 쏟아지는 시기였다.
류승룡은 "연극이 아닌 영화로도 나의 생각을 나눌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섬세한 호흡, 눈빛, 떨림을 전할 수 있다는 것이 연극과 달랐다"고 전했다.
# "더 파면 진짜가 나온다"
그는 지난 2004년 '아는 여자'의 복면강도로 본격적으로 스크린에 얼굴을 알렸다. 초창기에는 그의 이국적인 생김새대로 캐스팅이 들어왔다.
류승룡은 "센 역할들만 들어왔다. '이런 연기도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기까지 갈등도 있었다"며 "그 시간에 직접 경험과 간접 경험을 하며 다양한 인물을 담을 수 있게 노력했다"고 말했다.
2010년대에는 다작하는 배우로 이름을 알렸다. 영화 '최종병기 활'을 촬영하던 시기 또 다른 고민이 찾아왔다.
그는 "하고 싶은 작품을 하고 있는데도, 너무 많은 작품을 해 소모되는 것 같았다"며 "이준익 감독에게 '저는 너무 소진되고 있는 것 같다'고 고민 상담을 했다"고 말했다.
"그때 이준익 감독님의 말이 잊히지 않아요. '승룡아 땅을 파면 손가락이 아파. 그런데 더 파면 맑은 물이 나와. 연기도 똑같아. 더 파면 진짜 정수가 나와'라고 하셨죠."
그 말은 엔진이 됐다. '내 아내의 모든 것'에선 틀에 갇히지 않으려 했고, '광해, 왕이 된 남자'에선 다른 걸 덜고 진심을 담았다.
# 내가 안 믿으면 누가 믿나
류승룡은 '7번방의 선물'에선 딸에 대한 감정과 소신을 확고히 가진 아빠지만, 그걸 신체적으로 마음껏 표현하기는 어려운 지적장애인을 맡았다.
자칫하면 희화화될 수 있다는 걱정 속에서 어떻게 풀어냈을까. 그는 "그때는 장진 감독의 말이 기준이 됐다. 술 취한 연기를 하다 거기에 매몰돼 전하려는 내용이 묻히면 안 된다고 하더라"고 말했다.
이어 "딸을 목숨보다 사랑하는 아버지의 모습이 코어에 묵직하게 있어야 했다. 나머지는 상황이고 설정일 뿐이라고 생각하고 연기했다"고 전했다.
넷플릭스 시리즈 '닭강정'과 영화 '아마존 활명수'에선 웃겨야 했다. 꺾기, 호흡, 침묵 등 스킬이 쉽지 않았다. 조금 더하면 과하고, 덜하면 밋밋했다.
그는 "좋은 코미디는 잘 짜인 구조, 그리고 진심을 믿고 연기하는 것"이라며 "정말 딸이 닭강정이 됐다고 믿고 연기했다. 제가 안 믿는데 어떻게 관객을 설득하겠냐"고 말했다.
# 똑같지 않은 눈물
류승룡은 희극과 비극을 자유자재로 오간다. 그 얼굴을 가장 선명히 보여준 건 디즈니+ '무빙'이었다. 13회 장주원(류승룡 분)이 아내를 잃고 오열하는 신.
그는 "사실 한동안 우는 연기를 안 하려 했다.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며 오열할 때 표정이 늘 똑같아 보이더라. 그런데 그 장면은 달랐다. '장주원보다 황소 같은 울음이 먼저 내린다'는 걸 표현하고 싶었다"고 전했다.
이 장면은 앓던 이처럼 품고 있다가 거의 마지막에 찍었다. 울음의 레퍼런스는 아버지였다. 13년 전 누나가 먼저 세상을 떠났을 때 아버지의 얼굴을 기억했다.
류승룡은 "아버지는 제게 엄하고 산 같은 분이었다. 딸을 잃고 그렇게 우시는 모습이 딱 그랬다"며 "아버지도 '무빙' 그 장면을 보고 많이 우셨다고 하더라"고 밝혔다.
# 천태만상의 아버지
류승룡은 JTBC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 부장 이야기'로 백상예술대상 대상을 안았다. 전날까지도 제21회 서울드라마어워즈에서 국제경쟁부문 남자연기상을 받고 부산에 다시 내려왔다.
'김부장' 말고도 '7번방의 선물', '염력', '무빙' 등 수많은 아버지를 연기했다. 같은 틀에 갇히기 쉬운 수식어지만, 그는 오히려 거기서 자유를 찾았다.
"사극 했으니까 다른 거, 아빠했으니까 이거. 그렇게 하지 않으려 해요. 사실 아버지도 천태만상이잖아요. 각 사람의 본질은 정말 다르죠. 거기서부터 엄청난 자유를 찾은 것 같습니다."
류승룡은 제31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한국영화의 오늘 - 스페셜 프리미어'에 초청받은 '정가네'(감독 김지현)로 초청됐다.
'정가네'는 30년간 말 한마디 섞지 않고 살아온 원수 같은 형제가 마을을 덮친 위기 속 운명처럼 태어난 송아지를 지키기 위해 의기투합하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다.
그는 "가까울수록 신뢰가 깨졌을 때 생기는 침묵이 있지 않나. 그걸 자세히 설명하지 않고 이미지 그대로 다가오는 작품"이라고 소개했다.
쉼 없이 달려왔다. 이제는 스스로에게 선물을 줄 줄도 알게 됐다.
그는 "제주 올레길을 걷기 시작했다. 자연의 소리, 제 숨소리, 땀이 송골송골 맺히는 느낌…. 저에게 집중하는 것이 선물을 주는 것처럼 느껴지더라. 제가 비워지고 나서야 치유받는 느낌"이라고 말했다.
남은 배우 인생의 목표는 분명하다. 그는 "다양한 작품을 하며 많은 걸 배웠다. 앞으로 작품으로 질문을 던지고, 윗세대와 아랫세대를 잇는 다리가 되는 것이 남은 배우 인생의 목표"라고 덧붙였다.
<사진=송효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