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spatch=정태윤기자] 영화 '가능한 사랑'(감독 이창동)은 적극적으로 선을 넘지 않는다. 누군가의 욕망이 폭발하고, 관계가 단번에 무너지는 식으로 밀어붙이지 않는다.
대신 미지근한 온도를 오래 유지한다. 불편한데도 당장 자리를 박차고 나갈 만큼 뜨겁지는 않다. 그래서 한마디의 대사, 잠깐의 표정, 침묵 사이에 숨어 있는 감정을 들여다보게 된다.
164분이라는 긴 시간도 같은 방식으로 흐른다. 빠른 편집이나 강한 자극으로 관객을 붙잡지 않는다. 한 장면을 오래 바라보고, 한 사람의 말을 끝까지 듣는다.
진득하게 따라가다 보면, 장면의 밀도와 연기의 온도가 그 시간을 채운다. 그 안에서 이창동 감독이 하고 싶은 이야기는 오히려 선명하다.
노동, 계급, 욕망, 사랑, 그리고 타인의 삶을 이야기하는 창작자의 윤리에 대해 묻는다. 다만 그 질문에 답을 붙이지 않는다.
어느 순간에는 답처럼 보이는 장면을 내놓았다가, 곧바로 그 답을 의심하게 만든다.
그 중심에는 네 사람이 있다. 해고 노동자 호석(설경구 분)과 아내 미옥(전도연 분). 다큐멘터리 감독 예지(조여정 분)와 그의 남편 상우(조인성 분).
네 사람은 예지가 해고 노동자들의 삶을 영화로 담으면서 만난다. 카메라를 사이에 둔 관계는 점점 복잡해진다.
호석에게 해고는 직장을 잃은 사건 하나가 아니다. 한 사람의 삶을 무너뜨리고, 가족의 관계를 바꾸고, 자신이 누구인지까지 흔들어 놓은 일이다.
영화는 해고 노동자들의 목소리를 길게 들려준다. 그들이 과거와 상처를 직접 말하게 한다. 그 장면들이 중요한 건 단순히 '해고 노동자는 이런 고통을 겪는다'는 정보를 전달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카메라가 사람의 이야기를 어떻게 담아야 하는지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예지가 그들을 찍는 방식은 그래서 불편하다.
호석이 울부짖으며 자신의 상처를 쏟아낼 때도, 예지는 안절부절못하면서도 카메라가 잘 찍히고 있는지를 확인한다. 몰래 따라가 그 모습을 찍기도 한다.
그렇다고 예지를 쉽게 비난할 수도 없다. 누구나 타인의 슬픔을 보며 울고, 타인의 불행을 이야기하고, 그들의 고통을 콘텐츠로 소비한다.
영화 역시 타인의 삶을 보여주는 매체다. 타인의 삶을 소비하지 않고 그들의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이창동 감독이 영화를 만드는 사람으로서 던진 질문도 여기에 닿아 있다.
상우는 예지에게 "너는 메소드 연기를 하고 있다. 그 사람들과 다른데 같다고 믿고 있지 않냐"고 묻는다. 예지는 "나는 사랑하고 있는 거야"라고 답한다.
이 대목에서 제목이 조금씩 모습을 드러낸다. 예지는 그들을 사랑한다고 믿는다. 동정도 이용도 아니라고. 영화는 다시 질문한다.
그게 정말 가능한 사랑일까. 사랑한다고 믿는 순간에도 우리는 타인의 삶을 욕망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해하려는 마음과 소유하려는 마음은 정말 분리될 수 있을까.
그래서 예지가 선한 사람인지, 나쁜 사람인지 단순하게 규정할 수 없다. 영화는 분명한 메시지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인물을 메시지의 전달 수단으로 만들지는 않는다.
예지가 흥미로운 건, 그 욕망을 지워버리지 않는다는 데 있다. 예지는 미옥과 호석을 이해하고 싶은 사람이면서, 동시에 그들의 삶을 자기 작품으로 만들고 싶어 한다.
어쩌면 네 사람 중 타인의 삶을 가장 강하게 탐하는 인물이다. 그런데 예지는 그 욕망을 사랑이라고 믿는다. 조여정은 그 믿음을 관객에게 설득하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는 것처럼 연기한다. 자신이 카메라를 내려놓지 못하는 이유를 스스로에게 되묻는 사람처럼, 그 신념을 끝까지 붙든다.
그래서 예지는 위선적인 창작자도, 순수한 관찰자도 아니다. 타인의 삶을 작품으로 만들고 싶은 욕망과 그것을 사랑이라고 부르고 싶은 신념 사이에 서 있다.
나머지 세 사람도 마찬가지다. 미옥은 통통 튄다. 삶에 여러 번 배신당했으면서도 여전히 희망을 놓지 않는다.
돈과 계급이 사람의 가치관을 흔들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자신의 가치를 지키려고 한다. 그래서 푼수처럼 보이는 순간에도 이상하게 단단하다.
예지가 비싼 옷을 입고 노동자들의 얼굴을 담을 때도 그렇다. 미옥은 옷 가격을 묻는다. 예지가 얼버무리자, 다시 말한다. 그 옷이 여기선 튀는 것 같다고.
자신이 느끼는 계급의 차이를 돌려 말하지 않고 정확하게 짚는다. 전도연은 미옥을 희망적인 사람이라는 한 문장에 가두지 않는다.
노래하고, 탐내고, 오기를 부리고, 순간적으로 충동적인 행동까지 한다. 그 모든 감정이 한 사람 안에서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호석은 반대로 안으로 움츠러든 사람이다. 해고와 파업 진압의 상처를 안고 살아가면서도 쉽게 속내를 꺼내지 않는다.
말수가 적고, 괴팍하고, 사람을 피한다. 그런 호석이 카메라 앞에서 조금씩 입을 연다.
호석의 상처는 과거의 사건처럼 보이면서도 현재형이다. 영화가 노동을 말하면서 결국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로 확장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일자리를 잃는다는 것은 돈을 잃는 것만이 아니라, 내가 누구인지 설명할 언어 하나를 잃는 일이기도 하니까.
설경구는 호석을 처음부터 상처 입은 사람으로 연기하지 않는다. 그래서 뒤늦게 터져 나오는 감정이 더 아프다.
상우는 겉으로는 모든 것을 가진 사람이다. 돈이 많고, 일도 잘 풀린다. 예의 바르고 여유롭다. 그런데 그 여유가 어느 순간 오만함으로 변한다. 원하면 무엇이든 가질 수 있다고 믿는 사람처럼.
'버닝'의 벤(스티븐 연 분)의 연장선에 있는 인물처럼 보인다. 부족할 것 없는 삶, 매끈하게 웃는 얼굴, 그리고 그 아래를 끝내 보여주지 않는 사람.
조인성은 상우를 많이 드러내지 않는다. 목소리를 높이지도 감정을 쏟아내지도 않는다. 카메라 프레임에서도 늘 멀리 떨어져 있다. 그런데 무섭다. 표현하지 않는 것들이 오히려 서늘하게 남는다.
영화가 끝까지 같은 온도로만 흘러가는 것은 아니다. 미지근하게 쌓아온 감정은 네 사람이 별장에 모이는 순간 서서히 끓기 시작한다.
미옥은 상우가 가진 자유를 보고, 상우는 미옥에게서 자신에게 없는 무언가를 발견한다. 호석은 과거와 현재의 자신 사이에서 흔들리고, 예지는 그 모든 장면을 카메라에 담으려 한다.
누구도 대놓고 선을 긋지 않았는데, 어느 순간 모두가 서로의 것을 바라보고 있다. 그 욕망은 사랑으로도, 동경으로도, 질투로도 보인다.
영화의 첫 문장이 왜 '남의 것을 탐하지 말라'였는지 그제야 이해된다. 노동과 계급에서 출발한 이야기는 결국 인간의 욕망으로 돌아온다.
마지막 장면은 유독 긴 여운을 남긴다. 미옥과 호석이 마당에 앉아 보름달을 바라본다. 영화는 그 달이 무엇인지 설명하지 않는다. 한참 바라보게 할 뿐이다.
모든 영화가 시대의 메시지를 담을 필요는 없다. 무언가를 가르칠 필요도 없다. 그럼에도 '가능한 사랑'에는 무언가를 말하겠다는 이창동의 뚝심이 있다.
다만 뜨겁게 설득하지 않는다. 미지근한 온도로 오래 끌고 간다. 그래서 영화가 끝난 뒤에도 질문은 식지 않는다. 그 목소리를 조용히 심어두고, 오래 곱씹게 한다.
"불가능한 사랑, 가능한 이창동 " (가능한 사랑 ★★★★)
<사진출처=넷플릭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