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spatch=정태윤기자] 무대는 멈추지 않고, 관객은 빠져나올 수 없다. 공연은 병원, 동물원, 태평양 한가운데를 오가며 쉼 없이 변주된다.
거친 폭풍우, 광활한 망망대해, 밤하늘을 가득 메우는 별까지. 빛과 움직임으로 그려내며 자연의 예측할 수 없는 변화 속에 관객을 던져 넣는다.
그 중심에는 소년 '파이'와 퍼펫(인형)으로 살아 움직이는 벵골 호랑이 '리처드 파커'가 있다. '라이프 오브 파이' 라이브 온 스테이지는, 상상을 재현하는 대신 생존의 공포를 무대 위에 끌어올렸다.
'디스패치'가 최근 서울 역삼동 GS아트 센터에서 한국 초연으로 개막한 '라이프 오브 파이'를 관람했다. 8년 만에 무대 위에 오른 배우 박정민의 무대를 확인했다.

◆ 무대의 π
'라이프 오브 파이' 라이브 온 스테이지가 지난 2일 한국 초연으로 개막했다. 이미 글로벌 화제작이다. 올리비에상 5개 부문, 토니상 3개 부문을 수상했다.
원작 소설과 이를 바탕으로 한 영화 역시 유명하다. 태평양 한가운데 구명보트에 남겨진 소년 파이와 벵골 호랑이 리처드 파커의 227일간의 생존기를 그린다.
영화는 CG 기술로 광활한 바다와 동물들을 구현해 장대한 영상미로 담아냈다. 아카데미상 4개 부문에서 수상하기도 했다. 무대는 어떻게 이 장대한 세계를 어떻게 옮겨냈을까.
'라이프 오브 파이'는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파이의 기억을 펼쳐낸다. 병실에 놓인 단 하나의 침대는 순식간에 인도의 평화로운 동물원으로 뒤바뀐다.
또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폭풍우로, 태평양 한가운데 떠 있는 구명보트로 변신한다. 병원의 무균적 공간과 파이가 표류하는 거친 파도의 대비는 극한의 현실을 입체적으로 드러낸다.
무대 바닥과 벽면 전체를 뒤덮은 영상 연출, 음악, 조명 등이 어우러지며 객석을 압도했다. 구현하기 어려운 장면들을 무대 전체가 살아 움직이듯 실감나게 펼쳐냈다.

◆ 퍼펫의 π
무대보다 구현하기 어려운 건 살아 움직이는 동물들이었다. '라이프 오브 파이'에는 파이와 벵골 호랑이 퍼커 뿐 아니라 기린, 오랑우탄, 하이에나, 얼룩말, 바다거북까지 등장한다.
퍼펫티어(인형 조종 배우)들이 이들에게 생명력을 불어넣었다. 골격과 근육 구조를 본떠 설계한 퍼펫 안에서 3명이 한 팀이 되어 유기적으로 호흡했다.
그 안에는 야생의 본능과 위험성도 담아야 했다. 페펫 디자이너 닉 반스와 핀 콜드웰은, 표류 목재처럼 거칠고 사실적인 텍스처를 구현해 퍼펫을 제작했다. 파이가 지나온 난파선의 잔해를 보여주고자 했다.
흥미로운 점은, 퍼펫티어들이 숨지 않는다는 것이다. 관객은 동물과 함께 그들을 조종하는 사람도 동시에 보게 된다. 몰입을 방해하는 요소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동물의 생명성을 더 또렷하게 만들었다. 퍼펫티어의 호흡과 동물의 움직임이 겹치며, 퍼펫은 단순한 조형물이 아닌 살아 있는 존재로 보이기 시작했다.

◆ 파이의 π
퍼펫이 숨을 얻는다면, 그 숨에 의미를 부여하는 건 파이다. 파이의 눈길 하나 손짓 하나가 동물들의 존재를 현실로 끌어올리고, 관객을 순식간에 망망대해로 밀어 넣었다.
파이는 무대의 구심점이다. 인터미션을 제외하면 단 한 번도 무대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 온전히 혼자서 희로애락의 모든 감정을 끌고 간다.
소년의 천진난만함, 표류에 대한 공포,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 절망과 희망 사이를 오가는 감정의 진폭 등. 파이의 에너지가 곧 공연의 호흡이었다.
박정민은 8년 만의 무대 복귀라 믿기 어려울 만큼 압도적인 연기를 펼쳤다. 소년의 밝음에서 생존의 광기까지. 감정의 결을 정확하게 짚어내며 빠르게 전환했다.
파이는 마지막 독백에선 객석을 짓누르는 에너지로 이야기를 폭발시켰다. 그는 눈물과 땀으로 뒤범벅된 얼굴로 파이와 한몸이 되어 절규했다.
방대한 대사량에도 집중력을 잃지 않고 마지막까지 피치를 끌어올렸다. 관객들은 눈을 떼지 못하고, 숨이 새어 나갈까 긴장한 채 지켜봤다. 공연장의 공기마저 굳어질 정도로 압도적인 순간이었다.

◆ 이야기의 π
"어느 쪽 이야기가 더 좋으세요?"
물도 음식도 없이 벵갈 호랑이와 바다 위에서 227일을 살았다는 파이의 진술. 그러나 인간의 상식으로는 받아들이기 어렵다.
그래서 파이는 진실을 요구하는 변호사 앞에서 또 다른 이야기를 꺼내놓는다. 얼룩말, 하이에나, 오랑우탄, 그리고 리차드 파커가 누구를 상징했는지.
절규에 가까운 독백은 이 작품이 진짜로 말하고 싶었던 질문을 던진다. 파이는 "어느 쪽 이야기가 더 좋냐"고 다시 묻는다.
파이가 버텨낸 시간을 어떤 진실로 받아들일 것인가. 관객들에게 되돌리는 물음이었다. 기적과 잔혹함, 믿음과 현실 사이에서 답을 찾는 건 관객의 몫이다.
판타지 같던 이야기는 현실의 얼굴을 드러내고, 파이의 고백은 마음 한쪽에 오래 머문다. 그의 파이(π)라는 이름처럼 이야기는 하나의 결론으로 끝나지 않는다. 공연이 끝난 뒤에도 여운이 길게 남는 이유다.
'라이프 오브 파이'는 내년 3월 2일까지 계속된다.
<사진제공=에스앤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