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spatch=김지호기자] ※ 이 인터뷰에는 영화 '어쩔수가없다'(감독 박찬욱)의 일부 스포일러가 담겨 있습니다.
'어쩔수가없다'의 첫 촬영. 만수(이병헌 분)와 미리(손예진 분) 가족의 평온하고 행복한 하루를 카메라에 담았다. 작품의 오프닝, 만수 가족이 여름에 장어를 구워먹는 신이다.
부부는 서로 애정을 표현하고, 도란도란 장어를 굽는다. 이 장어는 만수가 다니는 제지 회사에서 보내준 (해고) 선물. 미리는 만수에게 "(회사가) 당신 좋아하나봐? 이 비싼 장어를 다 주고"라고 말을 건다.
알고보니 이 평범한(?) 대사의 촬영 과정은, 절대 평범하지 않았다. 손예진은 이 신을 추억하며, "와! 나 진짜 큰일났다 하고 생각했다. 이런 감정은 정말 오랜만이었다"고 말했다.
"저는 이 대사에서 '장어'가 중요한 포인트라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감독님께서 '장어'를 세게 (발음) 하지 말라고 하시는 거예요. 이 대사만 8~10테이크를 다시 가는데, 더워서 땀이 나고 긴장해서 식은땀이 났죠."
손예진은 연기의 고수다. 지난 25년 간, 각종 작품에서 미모를 압도하는 내공을 쌓아왔다. 그런 그도 박찬욱이라는 거장을 만나 한 단계 발전했다. 머리가 터지도록 고민하고, 그 고통을 뛰어넘으며 성숙했다.
'디스패치'가 최근 종로구 소격동의 한 카페에서 손예진과 인터뷰를 진행했다. 그가 '어쩔수가없다'에 담은 치열한 노력을 들을 수 있었다.
◆ "이른 복귀, 어쩔수가 없었다"
'어쩔수가없다'는 손예진에게 7년 만의 스크린 복귀작이다. 그 사이 그에게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결혼(2022년)을 했고, 그해 11월 엄마가 됐다. 덕분에 한동안 작품을 쉬고, 육아에 집중하는 시간을 가져야 했다.
'어쩔수가없다' 촬영은 지난해 8월 중순부터 시작했고, 약 5개월이 소요됐다. 육아휴직 기간이 3년이 채 되지 않는 셈이다. "3년 정도 육아하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그보다 시기가 앞당겨졌다"고 밝혔다.
"복귀는 언제 어떤 작품으로 해야 하는지가 고민이었어요. 아이가 있으면, 예전만큼 제가 하고픈대로 할 시간이 없잖아요. 또 몇 년 만에 작품을 하는 것이라 (복귀작을) 정말 고심했죠."
이른 복귀의 이유는, 한 마디로 박찬욱이었다. 배우라면, 누구나 박찬욱·봉준호의 촬영장을 꿈꾸니까. 그건 손예진도 마찬가지였다. "감독님 작품이어서 시작했고, 이 스타트는 최고의 선택"이라고 미소지었다.
평소 손예진과 현빈 부부는 서로의 연기에 대해 대화를 나누지 않는다고 말해왔다. 그러나 손예진에 따르면, 이 작품은 예외였다. 그는 시나리오를 현빈에게 보여주며 "이거 한번 보라"고 감탄했다.
"처음엔 평온한 가족 이야기였어요. 의심했죠. 감독님께서 갑자기 JSA로 돌아가셨나 할 정도였어요. 그러다 역시나 '아!' 하고 그림이 그려지더라고요. 모순되고 비꼬는 듯한 블랙 코미디인데, 비극적이었습니다. 묘하고 흥미로웠어요."
◆ "미리, 평범한데 안 평범하다"
미리는 평범한 전업주부로 그려진다. 그러나 그는 강하다. 만수가 해고된 후에도 씩씩하게 가정을 지킨다. 남편의 살인을 알고도 모르는 척 덮는다. 아들의 절도 범죄도 무마하려 애쓴다. 비록 그릇된 방법일지라도 말이다.
손예진은 "미리는 아주 극적이거나 어떤 표현이 도드라지는 게 많지 않다"며 "열 받아서 신랑(만수)에게 쏴붙이는, 부부싸움 신을 제외하곤 주로 일상적인 모습이 많다. 엄마로서 낙천적이고 밝은 모습들"이라 소개했다.
그도 그럴 게, 미리는 감정을 과하게 표출하지 않는 캐릭터다. "나중에 만수의 다른 모습을 봤을 때 반응이 그나마 극적인 편"이라며 "다른 캐릭터라면 그 순간 주저앉아 오열할 수도 있다. 그러나 미리는 절제한다"고 짚었다.
그래서, 표정과 눈빛의 미묘한 디테일이 중요했다. 예를 들어, 아들이 아빠의 살인을 목격하고 미리를 찾아오는 신. 손예진의 눈빛은 사정없이 흔들렸다. 애써 아들에게 "엄마가 땅을 파봤어. 근데 돼지였어"라며 다독였다.
"아이를 둔 엄마로서, 내 아이가 악몽을 꾸고 그걸 안심시키려 한다는 눈빛을 해야 했어요. 제가 아이를 낳고 키우지 않았다면, 그렇게까지 표현할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아들의 범죄를 은폐하는 장면도 인상 깊다. "나중에 아들이 훔친 물건들을 땅에 묻으며 남편을 바라보는 신에서는 굉장한 동조자의 표정을 지었다"며 "미리는 아이들을 위해 뭐든 할 수 있는 엄마라는 생각을 했다"고 전했다.
◆ "박찬욱, 마에스트로의 디테일"
박찬욱 감독과의 작업은 어땠을까. 손예진은 "이런 경험이 처음이라 당황스러웠다"고 고백했다. 실제로 '어쩔수가없다' 출연진들은 박찬욱의 디테일과 집념에 놀랐다. 20년 이상 베테랑들이 입을 모아 "촬영 전날이면 긴장해서 잠을 못 잔다"고 증언했다.
"보통 감독님들은 '대사의 감정이 밝았으면 좋겠다', '조금 더 덤덤하게 해달라' 이 정도의 디렉션이거든요? 박 감독님은 한 대사도 허투루 듣지 않으세요. 대사 하나 하나, 단어 하나 하나를 이야기하셨죠."
손예진은 "내 말투가 있고, 내가 준비한 캐릭터의 대사가 있다. 그런데 감독님께서 '어미를 내렸으면 좋겠어' 라고 하시면, 갑자기 그 어미가 내려지지가 않는다"고 예를 들었다.
"감독님의 디렉션을 듣고 테이크를 다시 하는 과정이 결코 쉽지 않았어요. NG가 나고, 또 다시 가고, 또 다시 가고…. 처음에는 정말 긴장했다니까요. 말씀하시는 단어의 디테일이 너무 작아 제가 잘 못 느끼는 것들도 있었고요."
그러나 역시 손예진은 손예진이었다. "그런 과정을 거치며, 정말 단단해졌다"고 강조했다. "촬영 중 후반을 넘어가며 재밌어졌다. 감독님의 디렉션이 큰 도움이 된다고 느꼈다"고 강조했다.
"제가 생각한 대사 톤과 방향에서, 감독님께서 이를테면 '더 진절머리 내며 해봐'라고 하세요. 그 다음엔 '고개를 흔들며 해봐'라고 하시죠. 이걸 반영하면, 더 자연스럽고 좋은 연기들이 나오더라고요."
◆ "N차 관람, 어쩔수가없다"
'어쩔수가없다'는 다채로운 매력이 있는 영화다. 그 중에서도 박찬욱이 그린 설계도를 곱씹는 재미가 있다. 영화의 모든 소품과 배경, 등장인물의 이야기가 하나의 서사로 연결된다.
손예진도 '어쩔수가없다'의 관전 포인트를 "볼 때마다 다른 영화"라고 정의했다. "참 신기했다. 제 영화를 이렇게나 많이 본 게 처음이다. 볼 때마다 안 보이던 장면이 보인다"고 말했다.
"감독님의 이전 작품들에 비해 직관적이라고는 생각해요. 하지만 전작들처럼, 곳곳에 숨어있는 것들을 찾는 재미가 있어요. 처음에 확확 보여지는 것들 이면을 찾는 재미가 있는 영화에요. 눈과 귀가 즐거운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어쩔수가없다'는 불안한 해피엔딩으로 끝난다. 만수 가족이 다시 집을 되찾고, 피비린내 나는 취업에 성공한다. 만수는 새 제지공장으로 출근해 AI 시스템과 다시 경쟁한다.
손예진은 "결말을 정하는 데는 아주 많은 이야기가 오갔다"며 "사실 만수가 떠나고 난 뒤, 미리가 아들을 부르는 장면이 있었다. '지금 방금 떠난 저 남자는 네 아빠가 아냐' 하는 결말이 (후보에) 있었다"고 귀띔했다.
"감독님께서 '과연 미리가 만수의 범죄를 알고도 이 가정이 행복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을 많이 하셨어요. 저희끼리도 의견이 분분했죠. 아마 관객 분들의 시선에 따라 다르지 않을까요. 저 역시 모호한 해피엔딩이라 생각해요."
◆ "엄마 손예진, 배우 손예진"
마지막으로, 손예진에게 '어쩔수가없다'의 의미다. "누구나 하고 싶은 감독님과 했고, 베니스 국제영화제도 처음 가봤다. 배우의 여러 인생에 있어, 제 스스로 하나의 챕터가 끝나고 두 번째 챕터로 넘어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전했다.
"어쩔수가없다는 제게 너무 긍정적인 영향을 준 작품입니다. 연기에 열정이 더 생겼어요. 감독님과 작업하며, '조금 더 다른 방향으로 바라봐야지' 하는 생각도 들었고요. 대단한 배우들의 열연도 제게 너무 큰 자극이 됐어요."
결혼과 출산이 가져온 변화 역시,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삶이 바뀌었고,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달라졌습니다. 그래도 연기에 대한 태도는 달라지지 않았어요. 결혼 전의 연기와 지금의 연기를 비교해보면, 지금이 더 여유로워졌어요. 감사함도 생겼고요."
모성을 연기하고자 하는 마음도 커졌다. "요즘 제 머릿속이 온통 일과 육아다. 그래서 모성에 대한 이야기를 해 보고 싶어졌다. 엄마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연기해보고 싶다. 드라마 '사마귀' 같은 어긋난 모성도 재밌을 것 같다"고 열정을 불태웠다.
"장르적으로는 또 다양하게 스릴러도 해보고 싶고요. 시켜만 주신다면 액션도 할 수 있어요. (현빈과의 재회도) 의향이 있어요. 상대는 모르겠지만요.(웃음) 멜로는 힘들 것 같고, 코미디나 액션에서 만나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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