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spatch=구민지기자] "연기할 때마다 안구를 갈아 끼우냐 하더라고요." (이병헌)

이병헌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배우다. 그가 출연한 영화만 43편. 드라마까지 합치면 60작이 넘는다. 지난 32년 동안 괴물 같은 연기력을 선보여왔다. 

그러나 지루하지가 않다. 그 어떤 캐릭터라도, 이병헌이 입으면 맞춤옷이 된다. 그의 대표작을 물으면 의견이 갈릴 정도. 대부분의 작품에서 인생 연기라는 호평을 받아왔다. 

더 새로울 것이 있을까?

이병헌이 (또) 이병헌했다.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감독 엄태화)를 통해 역대급 연기를 선보였다. 익숙하지만 낯선 얼굴로 스크린을 압도했다. 

심지어, 본인조차 놀라게 만들었다.

"제게 이런 얼굴이 있었나 싶은 장면이 있었습니다. 저도 처음 보는 얼굴이었어요. 제가 저를 보는데, 무섭더라고요."

'디스패치'가 배우 이병헌의 이야기를 들었다. 

◆ "이게 무슨 영화인데?"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대지진으로 폐허가 된 서울을 배경으로 한다. 유일하게 남은 황궁 아파트로 생존자들이 모여들며 시작되는 이야기다.

이병헌은 "처음엔 '무슨 영화인데?' 했었다. 만화적인 것을 안 좋아하지만, 시나리오가 재밌었다. 캐릭터에 여러 모습이 있을 것 같았다"며 선택 계기를 밝혔다.

극중 아파트 새 주민 대표 '영탁'으로 분했다. 그는 "리더가 된 적이 없는 어수룩한 사람이다. 신분 변화를 겪으며 달라지는 인물"이라고 소개했다.

마치 1인 2역 같은 캐릭터를 소화했다. 초반엔 순박한 얼굴로 귤을 먹으며 등장한다. 후반부엔 다른 얼굴이다. 눈빛과 숨소리로 분위기를 압도한다.

"이병헌은 안구를 갈아 끼운 듯한 연기를 선보였다." (박보영)

끝없는 고민의 결과물이었다. 이병헌은 "영탁은 주어진 권력을 주체하지 못하는 느낌이었다. 점점 광기가 생기는 설정이라고 생각했다"고 털어놨다.

그는 "영화를 찍는 4~5개월간 인물을 이해하려 했다. 귀신에라도 씌어 연기한 것 같다. 스스로 그 인물이 되고 싶어서 발버둥 친 것 같다"고 떠올렸다.

◆ "불안함이, 자신감이 됐다"

이병헌은 스스로 캐릭터를 만들어갔다. 적극적으로 의견을 냈다. "촬영장에서 아이디어를 많이 내는 편이다. 다행히 엄 감독도 좋아했다"고 말했다.

일례로, 장부에 이름을 쓰는 신. '김영탁'이지만 '미음'(ㅁ)부터 쓴다. 이병헌의 애드리브다. 정체를 암시하는 장면을 완성한 것. 감독은 만족감을 드러냈다.

영탁은 극한의 상황에서 점점 변해갔다. 평범한 사람에서 환호 받는 영웅, 그리고 악인까지 오간다. 감정이 끊임없이 바뀌다가 막바지에 폭발시킨다.

그는 혜원(박지후 분)을 던져버린 후, 억울한 사람처럼 포효한다. "분노로 감정의 끈을 놓은 순간이었다. 헛구역질로 과한 감정을 표현했다"고 회상했다.

이병헌이 가장 신경 쓴 부분이다. "설득력이 부족하면 어떡하나, 영탁의 정서가 잘 전달될 수 있을까"를 끊임없이 질문했다.

그도 그럴 게, 극단적인 감정은 사람마다 다르게 받아들인다. 이병헌 역시 감정과 표현의 선을 놓고 스스로에게 몇 번을 되물었다. 

"저 자신을 믿고 임했습니다. '헛구역질' 장면도 그런 경우죠. 다행히 좋은 평가가 나왔어요. '크게 벗어나지 않았구나' 안도감이 들었습니다."

◆ "제 얼굴이, 낯설었다"

"이병헌은 짧은 순간, 대사 한마디 없이 안면의 떨림과 눈빛으로 설명해 내더라고요. 이게 영화적 순간이라는 거구나 느낄 정도였습니다."(엄 감독)

이병헌은 엄 감독의 멘트에 미소 지었다.

"예전에 그런 질문을 받았어요. '거울 보고 연기 연습을 하냐'고요. 그건 껍데기를 움직이는 것에 불과해요. 연기는 내면의 감정이 전달하는 작업이죠. 그럼 껍데기는 자연스레 연기돼요."

그는 "표정이 어떨지 상상하며 연기하진 않는다. 나중에 모니터를 보고 '내가 이랬구나' 알게 된다. '콘유'에선 저도 못 본 얼굴이 나와서 놀랐다"고 밝혔다.

연기 소신도 드러냈다. "배우는 작품이 끝나기 전까지 젖어있어야 한다. 그 인물의 상황과 사회적 신분, 감정 상태를 계속 생각할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이어 "촬영 기간이 길어지더라도, 쉬는 날이 있더라도 감정의 끈을 놓지 말고 있어야 한다. 어떤 작품을 하든 똑같다. 영탁도 당연히 그랬다"고 말했다.

"배우들의 관찰력이 뛰어나다고 봐요. 저도 그렇고요. '왜 눈을 깜빡거릴까', '걸음걸이는 왜 저렇지?' 계속 질문을 던지죠. 이런 부분이 (연기에) 도움이 많이 됩니다."

◆ "아이처럼 연기하고 싶다"

이병헌의 연기에 대한 고민은 현재 진행형이다. "아무리 확신을 가지고 연기해도 보여지기 전에 느끼는 불안감은 어쩔 수 없는 것 같다"고 털어놨다.

"하지만 불안함만 갖고 연기하면 힘듭니다. 다음으로 나아가기 위한 적절한 믿음이 필요하고요. 이 믿음은 반복적인 거더라고요. '내가 맞을 거야', '괜찮을 거야' 여기는 것이죠."

그는 "전작들을 돌아봐도 그렇다. 관객 반응을 확인한 뒤 '틀리지 않았구나' 여기는 경우가 많았다. 경험들이 쌓여 스스로를 믿게 된 게 아닐까 싶다"고 전했다.

이병헌의 변신엔 늘 박수가 쏟아진다. 매번 다른 캐릭터를 (제대로) 연기해내는 배우라는 것. 그는 대중의 평가에 쑥스러운 듯 웃었다.

그는 "그런 반응에 놀랄 때도 있다. '이번에 이런 역을 했으니 다음에 다른 걸 해야지', '다른 캐릭터를 연기해야지' 생각한 적은 없다"며 말문을 열었다.

"배우는 삶을 연기하잖아요. 그저 맡은 캐릭터에 젖으려고 애를 쓰고, 노력을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만들어지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나 더. '아이들'의 순수함을 보탰다.

"모두에게 10살 짜리 아이가 있다는 말이 있어요. 장난기나 엉뚱함 같은 아이들의 마음을 유지하려 노력합니다. 순수함을 잃지 않으려고 발버둥 칩니다."

<사진제공=BH엔터테인먼트, 롯데엔터테인먼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