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spatch=정태윤기자] 영화는 스쳐 지나갈 법한 일상의 결들을 섬세히 포착한다. 연필심의 사각거림, 파도와 바람 소리, 풀잎이 나부끼는 미세한 움직임까지.
영화 '여행과 나날'이 포착한 여행은, 다이나믹하고 새로움이 가득한 여정이 아니다. 평범함이 특별해지는, 일상이 다시 빛나는 순간들이다.
미야케 쇼 감독은 "여행과 나날, 정반대로 느껴지는 단어이지만, 대립이 아닌 뒤섞인 느낌이 든다"며 "매일매일을 진지하게 열심히 사는 분들에게 와닿는 영화가 될 것"이라고 전했다.
'여행과 나날' 측이 2일 서울 용산 CGV아이파크몰에서 언론 배급 시사회 및 기자간담회를 열었다. 심은경과 미야케 쇼 감독이 자리했다.

'여행과 나날'은 각본가 이(심은경 분)가 어쩌다 떠나온 설국의 여관에서 의외의 시간을 보내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다.
만화 '해변의 서경'과 '혼야라동의 벤상'을 원작으로 한다. 원작과 달라진 점이 있다면, 원작의 주인공은 일본인 중년 남자라는 것.
미야케 감독은 "처음에는 원작대로 시나리오를 썼다. 그런데 어느 순간 심은경이 연기하면 새로울 것 같더라"며 "중요한 건 캐릭터를 표현하는 마음이었다"고 밝혔다.
"심은경은 일본어도 유창하지만, 한국어로 말하는 걸 보면 다른 사람 같기도 합니다. 그 두 모습을 모두 담고 싶었습니다. 가장 중요한 건, 언어를 사용하지 않았을 때였어요. 그냥 그곳에 서 있는 모습 자체를 잘 담고 싶었습니다." (미야케 쇼)

겨울과 여름이라는 이중 구조가 오간다. 이의 각본 속 세상은 여름이다. 일본 배우 키와이 유미와 타카다 만사쿠가 한 여름 해변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다.
각본에서 나온 이의 세상은 겨울이다. 설국의 여행지에서 이방인 츠츠미 신이치를 만난다. 감독은 "한 편의 영화 속에 겨울과 여름을 모두 맞보게 해주고 싶었다"고 전했다.
그는 "추우면 여름이 그립고, 더울 땐 겨울이 그립지 않나. 영화에 두 계절을 담으면 다양한 마음의 체험을 할 수 있을 것 같더라"고 전했다.
심은경은 "눈이 많이 오는 지역에서 촬영한 건 처음이었다. 그런데 생각보다 날씨가 따뜻했다. 눈 오는 걸 기다리느라 3시간을 대기했던 순간이 떠오른다"고 털어놨다.
"그때 마을 어르신들이 견학을 오셨어요. 저희 팀에서 의자를 마련해 보시기 편하게 해드렸죠. 다같이 어르신들과 이야기도 나누고 어떤 영화를 찍고 있는지도 이야기해 드렸어요. 그때 현장의 모습이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남아있습니다." (심은경)

심은경이 맡은 이는 각본가다. 일본이라는 낯선 땅에서 다른 나라의 언어로 글을 쓴다. 이에게 말은 상징적이다. 익숙한 단어도 낯선 언어로 내뱉는 순간 신선한 감정을 주니까.
그러나 언어는 익숙해지고, 이제 그 어떤 문장도 신선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이는 슬럼프에 빠진 상황에서 여행을 떠나게 된다.
"이제는 말에 쫓기고 있다. 나는 말이라는 틀에 갇혀 있다. 여행이란, 말에서 도망치는 행위일지도 모른다." (이)
이는 뜨끈한 우동을 들이키고, 연못 위로 떨어지는 눈을 바라보다, 번화가에서 멀리 떨어진 산 속 여관에 머물게 된다.

그는 영화의 온도처럼 담백하게 그려냈다. "전에는 캐릭터를 구상할 때, 레퍼런스를 조합하고 덧붙이는 작업을 했다. 이번엔 빼는 것에 집중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어떻게 하면 카메라 앵글 안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이' 그 자체로 서 있을 수 있을까에 초점을 맞춰 연기했다"고 전했다
"이가 어떤 식으로 움직이면 좋을 지, 몸을 옆으로 돌리면 좋을지, 정자세로 있으면 좋을지, 걸음은 몇 걸음 걸으면 좋을지 세세하게 모니터하며 만들어갔습니다." (심은경)
심은경은 "관객들이 '이'를 보며 자신과 겹쳐 보이는 부분이 분명 있을 거라 생각했다"며 "자신을 투영해서 봤으면 하는 마음으로 덜어내려 노력했다"고 덧붙였다.

심은경도 이에게 공감했다. "저도 일본에서 연기를 하고 있고, 언어라는 우리에 갇혀 있는 것 같다는 감정을 느낀다. 하지만 그 장벽을 허물어 주는 게 영화의 힘이라고 생각한다"고 강조했다.
미야케 감독 역시 "일본 사회는 남들과 다르면, 인생을 실패한 것처럼 느끼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다는 걸 영화를 통해 느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나와 다른 사람을 무서워하기만 하면 인생이 재미없어진다고 생각한다"며 "영화를 보고 서로 다른 소회를 나누고 인생에 대해 이야기 나누다 보면 사회도 훨씬 풍요로워질 것"이라고 전했다.
"좋은 영화란, 전과 후의 감각이 새롭게 바뀌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물론 영화 한 편으로 인생이 뒤집히는 일은 없겠죠. 그러나 작은 변화가 생기는 일을 정말 좋아합니다. 고정관념과 선입견에서 자유로워지는 것. 그게 영화를 보는 이유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미야케 쇼)

'여행과 나날'은 유수 영화제들의 선택을 받았다. 제78회 르카르노 최고의 영예인 황금 표범상을 수상했다. 제73회 산세바스티안국제영화제, 제22회 레이캬비크 국제영화제, 제 33회 함부르크 영화제 등에서도 러브콜을 받았다.
심은경은 일본 제38회 닛칸스포츠영화대상과 제36회 싱가포르국제영화제 여우주연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심은경은 "해외 영화제들에 후보로 오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개무량하다"며 "많은 책임감을 느끼고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고 소감을 전했다.
미야케 감독은 마지막으로 "극장은 정말 중요한 공간이라고 생각한다. 어둠 속에서만 느낄 수 있는 부분이 분명 있다"며 "그냥 온전히 보시는 체험을 즐기셨으면 좋겠다"고 바랐다.
'여행과 나날은 오는 10일 개봉한다.
<사진출처=엣나인필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