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spatch=김미겸기자] "제 연기, 진짜로 어떻게 보셨어요?"
장태주를 만났다. '황금의 제국'을 향해 거침없이 달렸던 그다. 하지만 드라마에서 봤던 장태주가 아니다. "남의 인생 평가하지 맙시다"며 귀를 닫았던 장태주, 그런 그가 오히려 자신의 연기에 대해 물었다.
"솔직히 말해주셔도 됩니다. 저 정말 태주 같았나요?" (고수)
장태주, 아니 고수를 만났다. 그가 던진 질문은 곧 자신의 노력이었다. 장태주처럼 생각했고, 말했고, 움직였던, 고수의 열정이었다. 단언컨대, 장태주는 고수가 아니다. 그러나 고수는 장태주였다. 그가 만든 세계였다.
"성진그룹, 지옥 맞습니다. 그런데 살아남으면 거기가 천국입니다." (태주)
'황금의 제국'은 배우들에게 지옥이나 다름없다. 식탁에서 수많은 거래가 이루어지듯, 세트에서 수많은 대사가 오고 간다. 게다가 흥정하는 상대는 손현주, 이요원, 김미숙. 엄효섭. 한 번 밀리면 끝이다.
하지만 고수는 당당히 살아남았다. 이는 자신을 철저히 지우는 작업이었다. 그렇게 거만한 말투와 오만한 행동이 탄생했다. 비웃는 표정부터 불타는 눈빛까지 완성됐다. 그리고, 장태주로 살기위한 몇 가지가 더 있었다.
◆ 준비 과정 | "고수가 태주를 만났을 때"
태주와의 첫 만남은 어땠을까. 부담이 없었다면 거짓말이다. 그도 그럴 것이 '추적자'의 박경수 작가다. 그의 필력에는 장르가 없다. 정치, 경제, 역사, 사회, 문학 등 다양한 분야를 넘나든다. 당연히 이를 소화할 연기력은 필수다.
고수의 표현처럼 나름의 도전이었다. "부담은 어쩔 수 없다. 그럼에도 태주를 선택한 건, 역시나 박경수 작가였기 때문"이라면서 "태주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데 빠져 들었다. 선과 악이 공존하는 복합적인 캐릭터가 매력적이었다"고 밝혔다.
그러나 태주는 역시 만만한 역할이 아니었다. 24부작 안에 정의로운 고학생 → 아버지의 복수를 꿈꾸는 아들 → 야심 넘치는 부동산 사업가 →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냉혈한 등 다양한 캐릭터를 변화무쌍하게 표현해야 했다.
고수는 치밀하게 태주라는 인물을 만들어냈다. "방송 기간은 2달이지만, 극중에서는 20년 이상이 흐른다"면서 "24부를 총 8섹션으로 쪼갰다. 한 섹션 당 3년 이라고 보면 된다. 외모, 스타일, 말투, 몸짓 등 태주의 모든 부분을 각각 고민했다"고 설명했다.
"대학생 태주를 연기할 땐 촌스러운 데님셔츠를 입었죠. 일부러 경직되고 딱딱한 말투를 구사했고요. 반면 3년이 흘러 에덴에 들어갈 땐 달라집니다. 수트를 주로 입고, 유들유들하게 말하죠. 사업가의 가면을 쓰니까요. 성진에 갈 땐요? 오만하게 비꼬고, 시니컬하게 내뱉습니다."
◆ 실제 촬영 | "태주로 사는 방법 3"
촬영장에 들어서면, 고수는 그대로 태주가 됐다. 호기롭게 끝까지 베팅하고, 남이 흘린 땀을 훔치려 발톱을 드러냈다. 성진그룹에 입성한 뒤에는 "난 왜 그 자리에 앉으면 안 되냐"며 정면으로 도전했다. 누구에게도 미안하다 하지 않았고, 무릎을 꿇지도 않았다.
관건은 고수를 지우는 것이었다. 자신의 생각은 철저히 배제하고, 대본에 적힌 태주 그 자체를 보여 준다는 전략이다. 그는 "시청자에게 태주의 편에 서 달라고 설득할 생각은 전혀 없다. 단지, 태주가 누군지를 보여 줄 뿐이다. 판단은 내 몫이 아니다"고 강조했다.
태주 특유의 말투와 동작을 익히는 데도 심혈을 기울였다. 박수를 한 번 친 뒤, "아이고. ~할랍니다"고 말하는 식이다. 고수는 "태주를 직관적으로 표현할 무언가가 필요했다"면서 "'아이고'를 몸에 익을 때까지 연습했다. 알고보면 이는, 거만해야 살 수 있는 태주였다"고 말했다.
심지어 NG를 냈을 때도 태주 마인드를 유지했다. "연기파가 모였다. NG 없는 드라마로 소문이 자자했다"면서 "그런데 어느 순간 '왜 NG를 내면 안 되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NG보다 더 무서운 건, 태주를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는 거다. 그래서 스스로 만족스럽지 않으면 당당하게 NG를 냈다"고 덧붙였다.
◆ 명장면 | "그렇게, 고수는 태주가 됐다"
고수의 도전.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손현주(민재 역), 김미숙(정희 역), 엄효섭(원재 역) 등 검증된 중견 연기자들 사이에서도 묵직한 존재감을 발휘했다. 특히 격렬한 감정을 폭발시키는 장면에선 최고의 몰입도를 보여 줬다.
<13회> 장신영(설희 역)에게 살인죄를 뒤집어 씌우는 장면, <22회> 자신의 신념을 꺾고, 농성자를 무력진압하도록 만드는 장면 등이 백미로 꼽힌다. 고수는 사라지고, 악마 같은 태주가 나타났다. 충혈된 눈으로 눈물을 흘리고, 광기 어린 표정으로 절규해 찬사를 이끌어냈다.
어떤 디렉션이 있었을까. 몰입의 결과였다. "두 장면 모두 아무 계산 없이 연기했던 신들이다"면서 "결국 궁지에 몰린 태주가 여기까지 가는구나 싶었다. 마음이 아프고 괴로웠다"고 당스를 설명했다. 그렇게 고수는 오롯이 태주가 됐다.
"아이고~, 태주랑 한 판 신나게 놀다 갑니다. 많은 걸 얻었습니다. 결국 믿음입니다. 작가, 동료, 그리고 나에 대한 믿음. 답은 그 안에 있었습니다. 앞으로도 도전할랍니다. 정체되지 않을랍니다. 그게 천국입니다" (장태주 버전)
<사진제공=BH엔터테인먼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