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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D] “할아버지는 예술이었다?”…강동원, 친일 후손의 실체 17

기사입력/수정 : 2017-03-03 10:41 오후
[Dispatch=김수지·김지호·양지연기자] 2007년, 강동원은 자신의 외증조부를 ‘예술’이라 말했다.

“증조 할아버지도 예술이에요. 성함이 이종만 씨거든요. 대동기업 회장이셨는데, 금광을 했어요.” (조선일보 인터뷰 中)

2017년, 강동원은 자신의 외증조부를 ‘삭제’하고 있다. 외할아버지와 관련된 게시물을 지우는 중이다. ‘명예훼손’을 문제로 삼았다.

10년이 지났다. 변한 건 없다. 강동원의 외증조부 이름은 이종만. 그는 일제 강점기 때 광산사업을 했다. 일명 ‘금광왕’으로 통한다.

10년이 지났다. 그러나 강동원의 태도는 변했다. 그는 더이상 외증조부를 언급하지 않는다. ‘존경’의 대상은 10년 사이 ‘침묵’의 대상으로 바뀌었다.

이종만은 지난 2009년 친일인명사전에 최종 수록됐다.

‘디스패치’는 강동원 친일파 후손 논란을 취재했다. 네티즌이 이종만에 분노하는 지점, 더불어 강동원(의 태도)에 실망하는 이유를 찾았다.

우선 친일인명사전을 펴낸 ‘민족문제연구소’ 측에 문의했다. 이용창 편찬실장과 인터뷰를 했다. 친일행각이 기록된 자료도 확인했다. 이종만의 딸, 이남순의 회고록도 읽었다.

그리고, 해당 내용을 종합해 Q&D(Question & Dispatch)로 정리했다.

Q1. 강동원 친일파 후손 논란의 시발점은 무엇인가.

D : 영화지 <맥스무비>가 3.1절을 기념해 ‘친일파의 후손’과 ‘독립군의 후손’을 정리했다. 강동원은 친일파의 후손으로 분류됐다.

강동원의 외증조부 이종만은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1급 친일파. 위안부 창설, 유지를 위한 자금 지원. 대가로 채굴권을 얻어 부를 쌓음. 일본에 전쟁 자금 상납.” (맥스무비)

Q2. 강동원은 해당 게시글 삭제요청에 나섰다. 명예훼손이라는 입장인데. 

D : 강동원은 해당 글에 대해 어떤 입장도 표명하고 있지 않다. 대신 관련 게시글을 조용히(?) 삭제하고 있다. ‘명예훼손’ 소지가 있다는 이유다.

이 부분이 네티즌의 공분을 사고 있다. “(현재) 게시글을 삭제할 게 아니라, (과거) 인터뷰를 해명하는 게 먼저”라는 것.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냐는 지적이다.

Q3. 우선 이종만(1885~1977)에 대해 알아볼 필요가 있겠다.

D : 이종만은 일제 강점기 ‘금광왕’으로 불렸다. 금광, 광산, 교육 등의 분야에서 부를 축적했다. 해방 이후 자진 월북했다. 1~2기 최고 인민회의 대의원을 지냈다. 북한 애국열사릉에 묻혔다.

Q4.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된 이유는 무엇인가.

D : ‘민족문제연구소’ 측은 지난 2005년 이종만을 친일인명사전 1차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이후 계속해서 흠결 여부를 조사했고, 2009년 최종적으로 수록했다.

“여러 사료와 문헌을 바탕으로 조사했다. 이종만의 친일 행적은 여러 곳에서 드러났다. 반면 독립운동 활동은 찾아볼 수 없었다. 이에 최종적으로 이름을 올렸다.” (이용창 편찬실장)

Q5. 친일 행위에 대한 구체적인 사례가 궁금하다.

D : 이종만은 1930년대 중반부터 일본군에 전쟁 위문품 등을 보냈다. 유명한 친일 단체에서 활동했다. 전쟁 독려글도 기고했다. 일본군에 전쟁 헌금을 내기도 했다. 

Q5. 일본군의 전쟁을 위해 헌금을 했다는 말인가.

D :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북지(황군)위문품대’로 1,000원(1억)을 기탁했다. 1939년 7월에도 ‘위문대’에 1,000원을 기부했다.

<조선일보 1937.7.21. 2면. 대동광업회사 사장 이종만 씨는 19일 애국부인회 조선본부를 찾아가 황군위문품대로 금 1,000원을 기탁하였다.>

<매일신보. 1939.7.6. 2면. 장병들에게 보내는 위문대가 감소하는 것을 유감으로 생각, 이종만 씨가 현금 1,000원을 군 애국부에 헌금했다.> 

Q6. 위문대? 네티즌들은 이를 위안부 지원자금으로 해석하고 있는데.

D : ‘위문대’는 ‘위안부’가 아니다. “이종만이 위안부 자금을 지원한 게 아니냐”는 비난은, 잘못된 해석이다. 다음은 이용창 편찬실장의 이야기다.

“위문대는 ‘물품을 넣는 주머니’를 뜻한다. 전쟁에 참전한 (조선인) 병사들에게 전하는 위문품 비용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일왕을 위해 전쟁을 잘 수행하라는 목적이 담겨있다.” (이용창)

당시 ‘매일신보’에 따르면, 일본 군사령부는 이종만이 기부한 1,000원으로 통조림 3,600개를 구입했다. 이종만의 뜻에 감격해 보람있는 곳에 썼다는 내용이 덧붙여져 있다.

Q7. 친일 단체 활동은 얼마나 했나?

① 1939년 4월 ‘조선산금협의회’ 위원이 된다. 조선총독부가 전시 총동원 체제를 위해 만든 단체다. 금(金) 사용 제한 강화 등을 논의했다.

② 그 해 11월, ‘조선유도연합회’ 평의원으로 임명됐다. 총독부가 친일(유림) 인사들을 동원해 만든 단체다. 회원 자격은 ‘성년 이상의 제국 신민으로 본 회의 취지에 찬동하는 자’다.

③ 1940년에는 ‘대화숙’이라는 친일 단체에 가입했다. 대화숙은 내선일체를 강화하고, 사상 사건 관계자를 선도한다는 취지로 운영됐다.

④ 1941년 9월엔 조선임전보국단 발기인으로 들어갔다. 이어지는 10월에는 이 단체의 이사가 됐다. 조선인을 수탈해 전쟁을 지원하는 데 힘을 보탰다.

Q8. 이런 활동이 친일인명사전 등재의 기준이 되는가.

D : 민족문제연구소에 따르면, 친일 단체에 가입한 모든 사람을 ‘친일파’로 규정하진 않는다. 어느 정도로 참여했고, 어떤 목적으로 활동했는지를 세세히 따진다는 이야기.

“모든 발기인을 친일 인사로 규정하진 않는다. 임전보국단의 경우 (지역 별로) 수백 명이 발기인으로 들어가 있다. 이종만은 전국적 규모 단체의 중앙 조직(본부) 이사를 맡았다.” (이용창)

Q9. 친일 언론 활동도 문제가 된다고 들었다.

D : 이종만은 1939년 1월 1일 <매일신보>에 ‘축전첩신년, 기무운장구’ 시국 광고에 참여했다. ‘기무운장구’는 “무운이 오래되기를 기원한다”는 의미다. 일제의 승전을 축원하는 것이다.

1940년 7월에는 잡지 <삼천리>에 지원병 격려글-지원병과 혈한애의 인-을 기고했다. 조선인들에게 ‘천황을 위해 전장으로 나가 싸울 것’을 독려했다.

“지금 대아시아의 신질서건설의 성업에 조선 청소년이 참가하는 것을 참으로 높게 평가한다. 이 거룩한 사업에 우리 조선 청소년이 진심으로 지원병을 희망하여 몸을 위에 바치는 모양에 감사를 금할 길이 없다. 조선 청소년 제군은 혈과 한과 애의 인이 되라.” (삼천리. by 이종만)

Q10. 이종만 가족 입장은 정반대다. ‘아름다운 부자’였다는 입장이다.

D : 이종만의 딸 이남순은 저서 <북으로 간 아름다운 부자 이종만의 딸 이남순 영혼의 회고록-나는 이렇게 평화가 되었다>를 발간했다.

이남순 씨는 “친일인명사전은 아버지에 대한 공정한 평가가 아니라고 생각한다”며 “아버지는 농민과 광부, 근로자의 복지와 대동평등평화사회 구현에 최선을 다했다”고 주장했다.

Q11. 이남순의 저서에 따르면, 이종만의 사회 기부 금액은 어느 정도인가.

D : 이종만의 가족이 주장하는 사회 환원금은 엄청나다. 예를 들어, 영평 금광을 155만 원에 매각했다. 그 중 50만 원을 소작농을 위해 썼다는 것.

그 후에도 80만 원을 사회에 환원했다는 입장이다. 이남순은 “아버지는 가족에겐 1~2만 원만 남겼다”고 강조했다. 그는 당시 1,000원을 현재 1억 원 정도의 가치로 환산했다.

Q12. 민족문제연구소 측은 이런 사회 공헌 행위를 참작하지 않았나.

D : 민족문제연구소 측도 이종만의 사회 환원 관련 부분을 파악했다. 하지만 친일 행위를 상쇄할 독립 운동 행적은 없었다는 것. 다음은 이용창 편찬실장의 설명이다.

“가족의 증언이나 회고록은 1차 사료로 채택하지 않는다. 객관적인 증거가 있어야 한다. 이종만의 사회 사업 부분도 살펴봤다. 그러나 친일을 상쇄할만한 독립 행적을 찾지 못했다.” 

Q13. 숭실학교나 대동공전 등 교육사업을 펼치기도 했는데.

D : 민족문제연구소는 사회복지 환원사업의 시기, 지속성, 연관성 등을 종합해서 살펴본다. 이종만의 경우 1937년 7월부터 1941년 10월까지 일관되게 친일 행적만을 보였다는 것.

“일제강점기에 학교를 설립했다고 반드시 독립이나 애국은 아니다. 반대로 조선총독부에서 진행한 교육정책에 부흥했다고 볼 수도 있다. 교육 사업과 독립 운동의 연관성이 필요하다.”

Q14. 이종만 가족(후손) 등은 이런 친일를 어떻게 보고 있는가.

D : 이남순은 자신의 저서에서 “이종만은 1942년 800만 원의 부채를 갖고 있었다”면서 “아버지는 빚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일본의 황민화 운동에 참여했다”고 항변했다. (저서 321P)

조익종 박사는 2008년 6월 ‘월간조선’에 “기업을 경영하려면 권력의 비위를 맞춰야만 했다”면서 “이종만이 일제에 협력하지 않을 재간이 없지 않냐”고 대변하기도 했다.

Q15. 사업가가 기업을 운영하기 위해 택한 친일, 면죄부가 될 수 있을까.

D : 물론, 기업가의 헌납이 ‘자발적’이냐, ‘강제적’이냐는 것은 가치 판단의 문제일 수 있다. 하지만 한국 청년들에게 “천황을 위해 목숨을 버리라”고 강요하는 건 어떻게 볼 수 있을까.

자신의 이익을 위해 정권에 협력하는 것. 빚을 갚기 위해, 사업을 하기 위해…. 그런 이유로 후방에서 전쟁을 지원했다면, 비인도적인 행위다. 반대로 독립군은 어떤 이익도 포기했다.

Q16. 다시 강동원이다. 지금 그에 대한 비판은 정당한가.

D : 먼저, 연좌제는 안된다. 이종만이 친일파였다는 이유로 강동원을 비난할 수 없다. 비판받을 이유도 없다. 강동원이 저지른 죄가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강동원의 태도는 아쉬운 면이 없지 않다. 일례로 ‘삭제 요청’은 과거를 지우는 수단은 아니다. 게시글이 사라진다고 친일 행각이 없어질까. 그의 잘못된 대응이 논란을 부추기고 있다.

Q17. 친일파 후손들이 가져야할 자세가 있다면.

D : 이종만의 경우 왜곡된 면도 있다. 우선 친일파는 급수를 나누지 않는다. ‘1급 친일파’는 없다. 이종만이 ‘위안부’ 창설 자금을 지원한 것도 아니다. ‘위문대'(위문품) 비용을 기부했다.

“모든 친일파 후손들이 방관만 하는 건 아니다. 과거의 잘못을 반성하는 사람도 있다. 문제는 친일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역사적 사실까지 부정하는 태도다. 감춘다고 되는 건 아니다.” (이용창)

<자료제공=민족문제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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